중앙승가대 명예교수 종범 스님

부산불교열린아카데미… ‘마음공부와 경전공부’

대상을 보는 나는 잊은 채
나그네를 쫓아 주인 잃는다
망상 만드는 自性 청정하니
시선을 안쪽으로 돌려 보라

불도(佛道)를 닦는 불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참선·독경·염불 등 다양한 방편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 과정서 찾아오는 번뇌망상은 이를 괴롭게 한다. 어떤 자세로 공부할 때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중앙승가대 명예교수 종범 스님은 4월 3일 부산불교열린아카데미가 봉행한 ‘2017 선지식 초청 특별법회’서 “경전은 연구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아는 것이고, 마음공부는 자성청정심을 보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리=하성미 기자

종범 스님은… 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69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조계종 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1991년 한국불교학회 이사ㆍ행원문화재단 이사, 1994년 조계종 개혁의회 의원, 1995년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 1996년 삼보법회 교양대학장, 2000년 중앙승가대 총장ㆍ제5대 승가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자성만큼은 청정하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설법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대중에 전해주고자 설법을 하셨습니다.

깨달음이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늘 있었는데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다 안 것, 그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에는 ‘비여암중보(譬如暗中寶) 무등불가견(無燈不可見) 불법무인설 (佛法無人說) 수혜막능료(雖慧莫能了)’라고 했습니다. 암실 속에 보물이 있는데 그걸 보기 위해선 등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명등(明燈)입니다. 밝은 등불입니다. 어둠 속 보물은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도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지혜가 있다고 해서 능히 알지 못합니다. 설법이 없으면 비록 재주가 있고 지혜가 있어도 불법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럼 경전공부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로 어떻게 가며, 마음공부를 통해 깨달음 세계는 어떻게 가야 할까요?

〈금강경〉에 ‘제상비상(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했습니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로 볼 때 여래를 본다는 것입니다. 여래가 자성청정심입니다. 사람은 망상을 일으키지만 이를 일으키는 자성은 청정하기 때문에 자성청정심이 있다고 합니다. 대승불교가 가르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마음, 깨달음, 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바로 이것이 대승불교 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깨닫고 자성청정심을 깨달았습니다. 보이는데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데 들리는 것이 없고, 없는데도 없는 것이 없고, 있는데도 있는 것이 없는 적멸을 마음으로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중생은 이것을 믿지도 못하고 믿어도 깨닫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믿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많은 가르침이 나왔는데 그걸 방편이라 합니다.

의식은 창고와 같다
안이비설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등 이 모든 것은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을 경계라 합니다. 경계를 인식할 때 마음은 밖에서 나그네가 되어 돌아와 정작 주인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공감하십니까? 자신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나요? 전부 남의 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사물 경계만 우글우글합니다. 노 씨의 것이 많이 들어가면 노사모가 되고, 박 씨의 것이 많이 들어가면 박사모가 됩니다. 즉 의식은 창고와 같습니다. 그래서 창고에 들어오는 것을 취한다 해서 취상심(取相故)이라 합니다. 왔다 갔다 사라지는 것은 주인이 아닙니다. 형상은 티끌이고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 객’에 ‘티끌 진’을 써 객진(客塵)이라 합니다. 이 몸이 다 객진인데 나그네처럼 밖에서 온 것에 매여서 젊으면 젊음에 매이고, 나이 들면 나이에 매이고, 죽을 땐 죽음에 매이고, 그래서 한 몸을 갖고도 여러 형태로 매입니다. 객진망상은 허망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허망한 생각을 쫓아다니는 것을 윤회라 합니다. 하지만 취상심만이 전부가 아니고, 자성청정심이 있기 때문에 윤회를 끊으려면 자성청정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경전에서도 생멸 없는 적멸세계, 그것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자성청정심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닙니다. 하늘을 보지만 그 보는바 자성청정심은 하늘도 아니며 죽음을 인식하지만 죽음도 아니며 삶을 인식하지만 삶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걸 이름하여 자성청정심이라 합니다. 그걸 딱 깨달으면 밝고 어둡고 죽고 살고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걸 무가애(無??), 즉 걸림이 없다고 합니다.

경을 펴고 경을 읽고 경을 해석하고 경을 쓰면서 결국 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을 통해 마음을 압니다. 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마치 거울을 보는데 거울을 통해 내 모습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간경공부란 경을 통해서 자신을 깨달으려 하는 것입니다. 경을 수지(受持)하며 독(讀)하며, 송(誦)하며, 해설(解說)하며, 서사(書寫)해서 자기 마음은 생멸 속에 생멸 없는 적멸을 깨닫게 됩니다. 그걸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왔고 마음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한마음이 혼란한데서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한마음 조용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일체가 유심조입니다. 일체가 마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든 마음을 돌아보고, 마음에서 나왔기에 다시 돌아가면 해결됩니다.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에서 나왔기에 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걸 믿는 것이 첫째 마음공부입니다.

일념신심(一念信心)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늘도 하늘이라 아는 것은 나의 지견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고 하늘인 줄만 알고 하늘을 아는 자기 지견은 모릅니다. 마음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경계 없이 마음이 홀로 일어난다는 것은 없습니다. 조용한 생각을 해도 이 조용한 것이 경계이며 대상입니다. 시끄러운 것을 생각하는 것도 시끄러운 경계 대상입니다. 죽는 것도 태어남도 대상이고 다 마음은 경계에 의탁해서 바야흐로 생깁니다. 모든 것은 자기 지견인데 경계만 알고 자기 지견은 모릅니다. 자기 지견이 깨끗하면 경계도 깨끗해지고 지견이 산란하면 경계도 산란합니다. 마음 없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걸 확실히 믿을 때 마음공부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나를 깨닫기 위해 읽는 經
〈금강경〉에 ‘득문시경(得聞是經) 신심청정(信心淸淨) 즉생실상(卽生實相)’이라 했습니다.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드러납니다.

경을 수지독송해 서사하면 신심이 청정해지고 신심이 청정해지면 본래 보고 아는 밑바탕, 자기 본래면목을 압니다. 경전을 자꾸 보면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닌 자성청정심을 보는 것인데 어려운 것 같아도 부처님께서 먼저 깨닫지 않았습니까? 깨달은 분이 자세히 말해주셨으니 깨달음에 실패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내가 안 믿어서 못하고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믿고 하면 실패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먼저 이루신 분이 그대로 잘 가르쳐놨기 때문에 마음공부는 경전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는 경전을 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 또한 깨끗해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깊어지면 모든 것이 깊어집니다. 죽고 살고 하는데도 죽고 삶이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현지(玄志)라 합니다. 죽고 사는 속에 생과 사가 아닌 세계가 있습니다. 현묘(玄妙)하단 말을 씁니다. 조주록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람이 태어나고 죽지만 태어나는 가운데 태어나지 않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죽는데 죽지 아니하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깊은 뜻을 아는 것을 현오(玄奧)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깊게 아는 것, 그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견성이라 합니다. 오도라 합니다.

깊이 알기 위한 방법이 섭심반조(攝心返照)입니다. 객진취상심인 마음은 돌아다닙니다. 마음은 컨트롤이 안 됩니다. 잠을 푹 자려고 침실을 잘 꾸며서 잠자리 만들어도, 잠자리가 아무리 좋아도 꿈자리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꿈자리가 생각대로 안 되는 것처럼 객진취상심, 이 마음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산란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객진취상심을 거둬들이는 것, 이것을 섭심반조라 합니다. 쫓아가면 마음공부가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생각은 티끌일 뿐입니다.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다 거두는 게 섭심입니다. 쫓아가면 향진(向進)이며 티끌로 향하는 것입니다. 섭심을 해서 반조를 해야 합니다. 반조(返照)는 돌이켜본다는 것입니다. 보는 대로 쫓아가는 것이 향진이고 이놈이 뭔가 하고 생각을 다 거둬 비춰보는 것이 섭심반조입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전부입니다. 근데 이걸 하라고 하면 따분해하고 갑갑해합니다. 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이걸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데 그걸 못 믿습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보면 모든 공부가 다 됩니다.

믿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현지를 현오하는 찰나가 옵니다. 한 번 온다고 거기에 매이면 안 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차츰 차츰 더 들어가고 더 들어가면 망상은 자꾸 줄고, 지혜는 자꾸 늘어나서 현지를 현오하는 단계가 높아집니다. 건물을 올라갈 때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집니다. 망상심이 줄어들수록 지혜가 점점 더 밝아집니다. 밝아지고 밝아져서 완전히 밝아지면 그게 구경각입니다. 의심이 전혀 없고 지혜만 완전한 것, 그것을 원각이라 합니다. 원각은 의심이 없고 지혜만 뚜렷할 때 자성원명이라 해서 둥글고 밝습니다. 망상은 객진일 뿐, 나그네일 뿐입니다. 아무리 나그네가 와도 아무리 많이 와도 주인이 바르면 아무상관 없습니다. 주인이 강하면 나그네가 많이 와도 좋습니다. 그리고 공부의 마지막 단계가 회수진로(回首進路)입니다. 머리를 돌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이 가득한 사람한테로 깨달은 사람이 머리를 돌리는 것입니다. 중생제도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중생을 위해 설법을 했듯이 자성청정심을 깨달았으면 중생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가 마음공부 최고의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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