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 속 스토리텔링- 선재동자 이야기 上

미국 하버드대 포그박물관에 소장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수월관음 도상 부분. 선재동자가, ‘보살도와 보살행’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구도 순례를 하다가 28번째 만나게 되는 선지식이 관세음보살이다.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살면서, 동시에 부처님 세계에 머물며, 지치거나 싫은 마음이 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미 위없는 보리심을 냈습니다.
하지만,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여러 세상을 유전하면서도 항상 보리심을 잊지 않으며,
어떻게 평등한 뜻을 얻어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으며,
어떻게 청정한 마음을 깨뜨릴 수 없으며,
어떻게 큰 자비의 힘(大悲力)을 내어 항상 고달프지 않으며,
어떻게 다라니에 들어가 두루 청정을 얻는지 알지 못합니다.
-〈화엄경〉 ‘입법계품’ 미가장자 편 

‘저는 보리심을 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보살이 될 수 있는 겁니까’라는 것이 선재동자의 화두입니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53명의 선지식들을 만날 때 마다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질문을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반복합니다. 방대한 스케일의 입법계품 전편을 통틀어 계속되는 일관된 화두입니다. 이를 통해 ‘보살의 경지’에 대한 선재동자의 갈망이 얼마나 진실되고 또 간절한 지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 주인공 ‘선재’
위없는 보리심 일으킨 수행자
‘보살 이뤄 중생제도’ 화두 여정
“보살로서의 삶에 주목해야”


보살, 보리심을 낸 존재 
그런데 선재동자가 품은 화두에서 이미 그는 삼업(三業) 속에서 헤매는 일반 중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위없는 보리심(無上菩提心)’을 발심한 수행자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마음을 일으킨 존재를 보살이라고 합니다. 발보리심하였기에 세속적 욕망과 개인적 집착을 버린 청정하고도 깨끗한 마음 상태입니다.

선재동자는 이미 무아(無我) 체험을 하여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유위법이 마치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음(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을 체득했습니다. 삼라만상의 본질은 공(空)이고 인생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수행의 시작은 삶이 공한 줄 알고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선재동자가 구도의 초반부에 만나게 되는 미가장자라는 선지식은, 선재동자가 무상보리심을 내고 왔다는 말에, 당장 높은 사자좌에서 내려와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합니다. ‘부처님이 되려는 씨앗’인 법기(法器)가 이미 마련된 선재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은 발보리심한 선재동자가 바야흐로 ‘어떻게 부처님의 씨앗을 싹틔워 성장하고 꽃 피워 열매 맺는가’에 대한 여정입니다.  
 
‘나’를 벗어나 만난 진짜 세상
‘입법계품’의 입법계(入法界)는, ‘법계로 진입한다’ 또는 ‘깨달음의 세계로 계합한다’라는 뜻입니다. ‘중생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법계를 장엄할 수 있습니까’라는 선재동자의 화두는 모든 불자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사는 속계를 ‘임시의 세계’, ‘거짓 또는 환영에 불과한 세계’라고 하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진실로 여여하게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를 ‘법계’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이 ‘법계’에 눈 뜨는 과정이고, 깨달음의 세계에 눈뜨면 자연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마땅한 길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깨달음의 세계를 못 보는 것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우리 생각의 99%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지?’ ‘나는 왜 이렇게 안되지?’라는 식으로, 많은 생각 속에 계속적으로 ‘나’가 따라붙습니다. 우리는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의 절대적인 작용을 믿어야만 합니다. 모든 형태와 색깔이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믿어야만 합니다. ‘공’에 대한 믿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공이라고 해서 없다거나 공허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날 준비가 늘 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불성이라 하며, 이것이 부처 자체입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 또는 불성의 체현(體現)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스즈키 순류, 〈선심초심〉 中에서

수월관음도 하단의 선재동자. 보타라카산 꼭대기에 계시다는 관세음보살의 성지를 목숨 걸고 찾아간 선재동자, 바야흐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대목이다.

〈선심초심〉을 쓴 스즈키 순류는 미국에서 선(禪)을 확립시킨 인물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적 스승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왜냐하면 애플사의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가 그를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 또는 이면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그 세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눈 뜬 세계이고 그 세계의 모습을 펼쳐 보인 것인 〈화엄경〉입니다.

그 세계는 한없이 무궁무진한 상서로운 빛으로 가득한 세계였기에 그 세계를 광명편조(光明遍照), 비로자나(Virocana)라고 합니다. 우리가 ‘개체로서의 자아’를 초월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계입니다. 개체로서의 생명인 내가 나온 모태가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작은 생명체로서의 한계를 넘어 거대한 생명의 바탕으로 어떻게 계합하느냐가 수행의 관건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바탕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고 또 떠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생물에게 숨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눈 뜬 세계가 우리에게는 왜 이리도 어려운가’라고 화엄학자 다마키 고시로(玉城康四郞)는 질문합니다. 우리는 왜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그 이유는 ‘자아개념이 가로막고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자아’라는 존재의 마지막 둑이 무너져 버리면 노출되게 되는 광활한 바탕의 세계, 한량없는 빛의 세계가 〈화엄경〉의 세계입니다.

물방울은 바다를 볼 수 있나
〈화엄경〉은 가장 궁극의 바탕으로서 해인삼매를 말하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행(行)을 화엄삼매라고 말합니다. 궁극의 법신(法身)과 그 작용인 보신(報身)에 대한 방대한 비유적 설명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위한 첫 번째 필수조건은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함께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재동자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보리심은 내었으나, 어떻게 보살이 되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실제로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있기에 나 혼자만의 이익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무가치합니다. 그래서 일체 중생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닌 한은 그 어떤 것도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세계 구조 자체가 ‘하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다(一卽多 多卽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찌되었든 ‘보살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정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짤막 불교 상식
선재동자는 누구인가?

선재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주인공이다. 산스크리트 이름은 ‘수디나(Sudhana)’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창고에 보물이 가득 찼기에 ‘선재(善財)’라고 이름 붙였다. 선재동자는 구도의 마음을 가지고 남방의 해안 지역을 순례하기에 ‘남순(南巡)동자’라고도 불린다.

선재동자는 ‘속세의 묶인 중생의 몸으로 어떻게 보살이 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선지식 53명을 만나 도(道)를 구한다.

선지식이란 덕이 높은 성자를 말하는데, 구도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선지식을 선우(善友) 또는 승우(勝友)라는 용어로 일컫기도 한다. 깨달음의 세계와 인연을 맺게 해주는 존재로, 중생으로 하여금 선업(善業)의 공덕을 쌓도록 인도한다. 〈화엄경〉에는 ‘중생을 인도하여 일체지(一切智)로 가게 하는 문이며, 수레이며, 배이며, 횃불이며, 길이며, 다리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동자’로 주인공을 설정한 이유는, 도를 구하는 데 있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한 ‘청정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선재동자는, 선지식들의 수승한 가르침을 받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본인도 보살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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