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암에서 청암사 가는 길

불령산 정상에서 크고 작은 숱한 산들이 포개져 그려낸 마루금을 바라보는 도반의 모습이 여유롭다. 산 아래에는 마치 극장 스크린이 펼쳐지듯 시원스럽게 산맥이 눈앞에 들어온다.

“오늘 억수로 추운데이. 여는 산골이라 이래 추버요. 그나저나 수도암 만디는 눈이 안 왔능가 몰라.”

장뜰이라 부르고, 장평이라고도 부르는 산 아래 시골마을에서 할머니가 나를 걱정한다. 산 위에 있는 수도암으로 간다니까 쯧쯧 혀를 찬다. 그러다 손을 휘저어 차를 부른다. 스피커를 머리에 단 1톤 트럭이 마을 앞을 지나다 멈춰 섰다.

“야야, 이분 태워라. 수도암에 간다카이.”

산림청 하부기관에 속한 트럭인지 옆구리에 ‘산불방지’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는 장뜰마을 사람으로 마침 수도암 신자라고 했다. 덕분에 마을에서 수도암에 이르는 7km 시멘트 찻길을 두 발로 오르는 수고를 면할 수 있었다. 가파른 길이라 차가 들려서 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구불구불해서 어지럽기도 했다.

'창(건)주 도선국사’가 쓰여진 수도암 석주.

“거는 사진 찍을라꼬 가는 겁니꺼?”

기사가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힐끗 바라본다. 나는 짐짓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속으론 딴말을 중얼거렸다. 춤추러 가는 거지. 만일 내가 절에 춤추러 간단 말을 입 밖에 냈다간 기사가 브레이크를 쿡 밟을지도 몰랐다.

수도암에서 가까운 수도리란 마을에 이르자 기사는 차 유리창을 내려 이런저런 사람과 아는 체를 했다. 수도리를 벗어나자 지금보다 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기사가 이를 앙다물어 비탈길을 올랐다.

그 옛날 도선 국사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불령산에 올랐다. 바위투성이 계곡을 지나 여러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문득 야릇한 기운을 감지했다.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길 두식경, 다시 능선을 넘어서는데 갑자기 눈앞이 탁 트였다. 휘황한 세상이었다. 아, 저곳이구나! 도선은 한눈에 길지임을 알아 차렸다. 꿈에서도 찾아 헤맸던 명당이었다. 도선은 어린애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도암 대적광전 오르는 계단.

수도암. 도를 닦거나 깨우치는 데는 1,050m 높이가 필요했다. 수도산이라고도 부르는 불령산이 1,360m니까 8부 능선에 위치하는 까닭이다. 풍수의 원조 도선은 이 높은 곳에서 천하명당을 찾아냈다.

올라와 보니 4월의 햇살이 그득히 내려앉아 있었다. 장뜰마을 할머니가 궁금해 했던 수도암은 기이하게도 아랫마을보다 따듯했다. 응달진 요사채 골기와에 녹지 않은 눈이 더러 남아있었지만, 그조차도 왠지 포근해 보였다. 과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풍수에 문외한이지만 햇볕이 두루 충만한 이곳이 예사로운 터는 아님을 직감했다. 수도암에 얽힌 도선의 이야기가 더 있을지 궁금했다. 종무소에 들렀으나 스님들이 선방에 가고 안 계시다고 했다. 관음전에서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아 올랐다. 오를수록 조망이 넓어진다. 대적광전 앞에 이르러 등을 돌렸다. 첩첩한 산 너머로 희미하게 가야산 상왕봉이 보였다. 불가에선 그 봉우리를 연화봉이라 부르는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주변을 살피자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에 각각 1기의 통일신라 삼층석탑 우뚝 서 있고, 그 사이에 창주도선국사비와 석등이 놓여 있었다.

풍수가에서는 수도암 터를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상이라 부른다.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게돌이고,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 삼층석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며, 대적광전 자리에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라는 것이다. 막상 대적광전에 들어가 보니 옥녀 대신 통일신라 석조비로자나불이 앉아 있었다. 법당이 꽉 차는 거불이었다. 약광전에도 돌부처가 앉아 있었는데, 고려시대 약사여래좌상이었다. 수도암이 명당임을 입증하듯 석탑 두 기와 두 석불이 모두 보물급 문화재였다.

종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선원장 원인 스님이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원인 스님에 대해 조금 들은 얘기가 있다. 해인총림의 선통을 이어받은 선승으로, 무문관을 자청하여 3년 동안 외부와 단절하고 묵언으로 정진했던 우리 시대의 도인. 그는 또 종정을 지냈던 법전 스님의 상좌이다.

“도선 스님 얘기를 듣겠다고 했다면서요. 보여줄 곳이 있어서요.”

스님이 앞장서 관음전 옆으로 난 좁을 길을 걸었다. 다리를 건너 나한전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부터 숲길이 나 있었다. 원인 스님은 숲길의 끝, ‘법전대’라 부르는 바위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법전 스님이 불령산과 가야산을 향한 자세로 좌선하시곤 했어요. 이 바위로 올라오시오.”

스님이 먼저 뒷짐을 진 채 바위에 올라섰다. 따라 올랐더니 과연 수도암을 감싼 불령산이 극장에서 스크린을 보듯 펼쳐진다. 수도암으로 내리뻗은 능선이 보였는데 원인 스님은 그걸 지맥이라 불렀다.

“풍수에서 저걸 지맥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매우 특이하게도 불령산 지맥이 세 가닥이나 수도암으로 흐릅니다. 풍수가들 말인즉, 전국 어느 산을 보더라도 지맥이 같은 방향으로 세 가닥씩이나 흐르는 건 매우 희귀한 일이라 해요.”

보아하니 지맥이 태극 문양을 그리듯 S자로 휘어져 흘러내리다가 수도암 앞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흘러내린다. 잠시 멈출 때 세 가닥 지맥이 모이는 곳, 그곳이 수도암 선방 터였다.

법전대에 올라 수도암을 바라보는 원인 스님.

스님이 몸을 돌려 이번에는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을 향했다.

“저렇듯 첩첩산중 너머에 우뚝 솟은 가야산 봉우리가 보이잖아요. 구름이 층층 끼는 새벽에 보면 첩첩산중이 일(一)자를 그리면서 마치 바다처럼 보입니다. 수평선을 이루는 거예요. 그 위에 피어오르는 연꽃을 상상해 보세요.”

수평선, 즉 높낮이 없는 바다의 모습은 좋고 나쁨이 없는 무분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이(不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의미한다고 한다. 진리는, 그 위에서 꽃을 피운다. 가야산 상왕봉은 진공이라는 산의 바다에 묘유라는 연꽃 봉우리를 피운,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것이 원인 스님의 설명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수도암 모든 전각들은 연화봉을 향하고 있어요. 무릇 수행자란 어느 한 면에 치우치지 않고 정견을 유지하는 자세라야 하기에 연화봉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 법전대에 올라 원인 스님 설명을 듣자 그 이전보다 수도암이 조금 더 자세히 보이는 듯했다. 도선처럼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춤이 터져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도암을 감싼 신령한 기운이 자연과 부처의 깨달음이 어울려 조화를 이룬 까닭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선대를 지나 불령산 정상에 오르는 동쪽으로 가야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 위에서 가물거렸다. 서쪽은 덕유산과 민주지산이 가지를 뻗어와 가야산에 합류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숱한 산들이 포개져 마루금을 그려냈다. 산과 춤이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산들이 춤을 추려고 몸을 들썩거리더니 이내 참을 수 없도록 춤이 흘러넘쳤다. 산의 몸속에 고인 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춤이 산을 빙의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풍경이라면 도선 스님이 아닌 누구라도 춤을 출 수밖에 없겠다!

걷는길 : 수도암 - 신선대 - 불령산 정상 - 신선대 - 청암사

거리와 시간 : 6km, 3시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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