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재발견

우오가와 유지 지음|이광준 옮김|조계종출판사 펴냄|1만 5천원

[현대불교=노덕현 기자] 우리가 명상과 불교를 수행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깨달음, 일반인 눈높이서 설명

경전서 깨달음 경지 단초 찾아

착하게 살기 위해서, 혹은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서 바르게 사는 길을 찾기 위해서 등등. 사람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이러한 답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불교의 개조(開祖)인 고따마 붓다에게 불교 수행은 그런 게 아니었다. 붓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수행 목적은 ‘해탈(解脫)’이며 또한 그것을 달성한 경지인 ‘열반(涅槃)’이었다. 통상 ‘깨달음’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달리 명상 ‘효과’들이 강조되면서 불교 수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달성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담론은 먼 나라 이야기다. 심지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불교는 자기계발이나 처세에 동원된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본래 목적인 깨달음이라는 목표와는 분명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애당초 ‘과학성’과 ‘합리성’을 바란다면 불교 관련 책보다는 자연과학 책을 읽게 되고, ‘처세술’을 알고 싶다면 2,500년 전의 인도인이 현대인 상황에 딱 맞게 말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빨리어 경전과 아함경전 등 비교적 초기에 쓰였다고 전해진 경전들서 그 깨달음의 전제와 과정 그리고 그 경지에 대한 단초들을 찾아내고, 또한 현대 실천자들의 증언부터 유추해 그 대강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마디로 “중생이 자신의 버릇 때문에 맹목적으로 계속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고 정의한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마음에 번뇌가 있어서 더렵혀진 상태를 ‘유루(有漏)’라 불렀는데 이런 루의 영향 아래 있는 중생의 행동 양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쁜 버릇’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습관적이고 맹목적인 행위로서 ‘이건 나쁜 짓이다.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정신이 들면 어느새 또 저지르고 마는 행위이다. 불교에서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머리로는 제대로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도 습관적인 행위를 끊을 수가 없는 한 달성됐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깨달음’이라는 것의 성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을 현상의 측면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행위, 즉 버릇(漏)과 비슷한 것, 번뇌를 영원히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설명하면 ‘중생이 버릇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행위를 계속하는 상태’가 ‘미혹(迷)’이고, ‘이것이 끊어진 상태’가 ‘깨달음’이다. 특히 남방불교서 강조하고, 최근 대승의 승려들도 채용해서 흔히 사용하는 ‘마음챙김(sati)’이 이를 위한 실천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서 이 책 때문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을까? 이 책은 깨달음의 정의와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의 상태를 일반인 눈높이서 하나하나 설명한다. 특히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무상, 고, 무아라는 테마서 시작해 연기까지 이어지는 저자의 설명은 이의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 명징한 설명으로 이 책은 일본 불교학계서 일가를 이뤘다는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추천사를 받았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견지를 갖는 일본 학계는 들썩였다. 심지어 논쟁은 물론 이 책을 비판하는 단행본까지 쏟아졌다. 저자가 던진 도발적인 질문 혹은 신선한 논쟁 중에 수행자와 학계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붓다는 깨달은 다음에 왜 죽지 않았나?=이 도발적 질문을 던진 후 저자는 “진리를 체득한 다음에 하는 모든 ‘행위’는 순수한 ‘유희’임을 고려해야 한다며 붓다의 이타행은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부처님 말씀은 오히려 사회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노동과 생식을 부정하고, 애초부터 그 전제가 되는 ‘인간’이라든가 ‘올바르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파괴하는 작용을 한다고 봤다. 그래서 불교는 반선악(反善惡)이 아니라 탈선악(脫善惡)이라는 주장이다. 〈제 3장 탈선악의 윤리〉

반면 불교를 말하면서 아직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논증,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는 논지와 증명은 불교를 더 불교답게 했다는 높은 평가를 일본 최고의 불교 학자들로부터 받았다. 물론 아직도 윤회를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과 윤회의 주체가 없을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현재 일본 불교학계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피’다. 아직 마흔도 안 된 젊은 나이라는 것 외에도 학계와 수행자 사이에 여전히 만연한 윤회 부정과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는 문제에 대해 과감히 지적한다. 이 비판에는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인 나카무라 하지메(비아설)나 와츠지 테츠로(윤회와 불교 세계관의 분리) 등도 포함돼 있다.

저자는 이런 거장들의 불교 논지 전개가 경전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솎아 내거나 때론 ‘절대로 얼버무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애써 무시하는 태도라도 통렬히 비판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명상으로 인격이 좋아지지 않는다’거나 ‘불교는 착하게 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붓다가 깨달은 후 바로 열반에 들지 않고 법을 설했던 것은 유희다’라는 등의 도발적인 주장과 논지가 합쳐져 그 ‘젊은 피’는 논쟁의 한가운데 서고 말았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애초 목적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은 어쩌면 ‘나의 가르침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 붓다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다.

 

▲저자 우오가와 유지는?

도쿄대 문학부서 서양철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서 인도철학과 불교학을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9년 미얀마로 건너가 현재까지 테라와다 불교의 교리를 배우고 수행하면서 불교, 가치, 자유 등을 주제로 한 연구를 진행한다. 2015년 첫 선을 보인 이 책(원제 〈불교 사상의 제로포인트〉)은 일본서 깨달음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키며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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