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밖의 禪] 석지현 스님 (시인)

석지현 스님이 자신의 저작 대부분을 출간한 도서출판 민족사 서재를 등뒤로 생각에 잠겨있다. 방대한 저술을 통해 한국 선수행의 저변을 넓혀온 삶이 스님의 모습에서 그려진다.

 “쉼 없는 수행, 방대한 禪語 번역 원동력”

“언어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죠.” 그는 ‘선(禪)’을 그렇게 설명했다. 참으로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한 줄의 문장이 있기까지는 방대한 문자를 넘어야 했고, 그 많은 문자를 넘기까지는 오랜 체험의 시간, 즉 수행의 시간이 있었다. 선어록의 백미인 〈벽암록〉과 〈종용록〉의 완역 완간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한국 선수행의 저변을 넓히고 이끌어온 석지현 스님(72)이다. 

-출가와 만행이 곧 삶
13세 때 부여 고란사서 출가
종단 소임보다 인도로 ‘萬行’
세계 곳곳엔 선지식이 있었고
자연 만물은 스승이 되었다

 

-선어록 번역 대작 불사
곳곳서 만난 수행은 禪의 원형
만행 이후 마음 향한 곳도 ‘禪’
“선어록, 한글로 옮기자” 서원

 

〈벽암록〉 〈종용록〉 완역
〈벽암록〉, 12년동안 번역·교정
2007년 발간, 대중 관심 뜨거워
내친김에 〈종용록〉까지 완역
현재는 〈임제록〉 완역 집필 중

윤창화 민족사 대표(사진 왼쪽)와 석지현 스님은 20년 도반으로 선수행 진작에 힘쓰고 있다. 스님의 〈벽암록〉 〈종용록〉 등 주요 저작 출간도 민족사서 맡았다.

출가, 그리고 삶 바꾼 만행
“불연(佛緣)이겠죠.” 스님은 열세 살 때 충남 부여의 고란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출가의 이유 역시 간단히 한 줄로 설명했다. 그 한 줄이 있기까지도 역시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불연’이라는 스님의 한 마디는 출가자에게 출가 이전의 시간과 출가의 이유를 묻는 것이 얼마나 미욱하고 불필요한 일인지를 새삼 일러주었다. 하지만 스님과 마주하면 유달리 그 미욱한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고, 우문의 말머리를 쉽게 감출 수 없다. 스님의 모습이 ‘스님’이라는 호칭이 가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지금의 모습이 출가 당시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스님의 지금 모습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출가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세간을 떠나왔지만 ‘현실’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간단치 않았어요. 어디에 머물러도 ‘현실’로부터 오는 번민은 늘 존재했죠.”   

1973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1977년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소임을 보고 있었다. 경전으로 하루를 살고, 생사를 걸고 좌복 위에 앉아도 출가로 이어진 숙업의 근원과 출가서원에 대한 답은 여전히 멀기만 했던 스님에게 한 칸의 책상으로 옮겨진 하루하루는 더욱 더 스님으로 하여금 ‘오늘’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그 한 칸의 책상도 누군가는 지켜야 할 소중한 자리였지만 그 자리가 스님이 원했던 자리는 아니었다. 스님은 한 칸의 책상을 뒤로 하고 기약 없는 먼 만행 길에 오른다. 만행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인도. 불조의 발자국 위를 걷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였어요.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살았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죠. 내가 알고 있던 불교, 내가 알고 있던 세상, 내가 알고 있던 선 등 그동안 나를 지탱했던 모든 ‘앎’은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간을 겪어야 했죠. 내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사상과 삶의 모습들이 그곳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 다양한 사상과 삶을 존중하며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스님의 현재 모습은 그 시절에서 시작됐다. 각양각색의 삶을 보면서 스님은 남에게 보이는 것과 불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자신의 자리를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이 겉모습과 상관없이 지금까지 ‘스님’으로 불리는 것은 규정이나 형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모습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의 자리와 모습에 대한 물음에 ‘비승비속’이라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 간단히 답한다.

석지현 스님은 …13세 때 충남 부여 고란사에서 출가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1973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을 지냈다. 1977년 이후 인도를 비롯해 네팔, 티베트, 예루살렘, 미국 등지를 돌며 다양한 사상과 선지식들을 만났다. 이후 방대한 저술로 한국의 선 문화를 이끌어 왔다. 편ㆍ저ㆍ역서로 〈선시〉, 〈선시감상사전〉(2권), 〈벽암록〉(5권), 〈종용록〉(5권), 〈법구경〉 〈바가바드 기따〉, 〈우파니샤드〉, 〈반야심경〉, 〈숫타니파타〉, 〈불교를 찾아서〉, 〈선으로 가는 길〉, 〈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제일로 아파하는 마음에-관음경 강의〉, 〈행복한 마음 휴식〉 등 다수가 있다.

수행이 된 만행
“그땐 그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연까지 저에겐 스승이었어요. 인도의 다양한 문화와 힌두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사유의 세계를 알게 됐어요.”

부처님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나섰던 만행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교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엔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스님은 약 3년여 동안 인도의 각지를 돌며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묵다난다 등 많은 구루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사상과 만난다. 그것들은 우리의 불교나 선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들은 같은 가지였다. 스님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허물고 다시 쌓기 시작했다. 허물고 쌓은 일은 다름 아닌 넓어지는 일이었다. 보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 것. 지금까지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양성과 유연성을 경험하고 외연을 넓히기 시작한 스님은 차츰 우리 불교와 선에 원형이 있음을 알게 됐고 그 원형에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원형에 다가간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였다. 이유를 알고 사는 것이고, 과정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의 ‘앎’이야말로 ‘앎’이었다. 자연까지도 스승이었다는 스님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인도의 구석구석을 밟은 스님의 만행은 훗날 네팔, 부탄, 예루살렘 그리고 미국으로까지 이어진다. 스님은 그 길에서 많은 선지식과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났다. 그 시간들은 수행이라는 말로 대신해도 될 것이다. 훗날 스님의 업적과 마주하면 그 시간들이 튼튼한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스님은 1970년대 후반 라즈니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해 라즈니쉬 열풍과 명상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작불사 〈벽암록〉 〈종용록〉 완역
“경전을 보는데, 전부 한자여서 뜻을 알 수 없었어요.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외우면 된다고 했어요. 답답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내가 이 뜻 모를 문장들을 우리 글로 옮겨보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스님은 지금까지 〈선시〉, 〈벽암록〉, 〈종용록〉, 〈우파니샤드〉 등 10여 종의 책 30여 권을 출간했다. 그 중 〈벽암록〉 완역과 〈종용록〉 완역은 가장 큰 불사다. 스님의 이와 같은 원력불사는 스님의 그 오래된 출가시절의 서원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으며, 만행 길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한자,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등 스님의 다양한 언어구사가 밑거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선이란 언어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개념을 통해 개념을 벗어나는 작업인데,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입니다. 그 체험의 하나는 언어의 개념에 집중하는 것과 또 하나는 철저히 언어들과 멀리 떨어지는 것입니다. 전자를 간화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묵조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이 세상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긴 만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의 마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선(禪)’이었다. 만행 시절 만난 다양한 사상과 수행은 우리 대중이 고민하고 있는 선의 원형들이었다. 선의 원형들을 보고 돌아온 스님은 고민하고 있는 대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결론은 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선어록을 제대로 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벽암록〉이다.

선어록의 백미이자 선종에서 종문제일서로 불리는 〈벽암록〉은 설두중현(980~1052)이 〈조당집〉, 〈전등록〉 등에서 옛 공안 100칙을 가려 뽑아 송을 붙여 펴낸 〈설두송고백칙〉에 원오극근(1063~1135)이 수시, 착어, 평창을 붙여 완성한 선종의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선 수행의 필독 도서로 통하는 〈벽암록〉은 그 명성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완역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번역 자체가 쉽지 않았다.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한 뜻을 품고 있는 천 년 전의 언어, 그것도 선어를 오늘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저자와 그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글자의 뜻만을 모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독자를 ‘선(禪)’이라는 세계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온전히 다가갈 수 없었던 〈벽암록ㆍ5권 한 질-민족사〉이 2007년 마침내 스님에 의해 깊고 풍부한 우리의 언어로 완역되어 이 세상에 나온다. 집필 10년, 교정 편집 작업 2년 등 스님이 집필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이룬 대작불사다. 석지현 스님의 〈벽암록〉은 〈벽암록〉의 정신을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석지현 스님의 〈벽암록〉이 출간되자 교계와 출판계를 비롯해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내친 김에 〈종용록〉”이란 말이 스님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벽암록〉으로 10년을 보낸 스님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종용록〉은 2015년에 세상으로 나온다. 역시 석지현표 〈종용록ㆍ5권 한 질-민족사〉으로, ‘완역’이다. 스님은 〈종용록〉을 내기 위해 육필로 A4 용지 2천매의 원고를 썼다.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지만 집필을 통해 다시 한 번 선지식의 가르침에 감동할 수 있었고,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님의 〈종용록〉 집필 7년 동안의 소회다. 또 한 번의 대작불사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벽암록〉보다 100년 늦게 나온 〈종용록〉은 〈벽암록〉과 쌍벽을 이루는 선가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벽암록〉보다도 낯선 이름이다. 〈벽암록〉이 간화선의 교과서라면 〈종용록〉은 묵조선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 중심의 한국 선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종용록〉은 북송말 남송초에 천동정각(1091~1157)이 옛 공안 100칙을 가려 뽑아 공안마다 읊은 송을 ‘천동백칙송고’라 불렀고, 이 ‘천동백칙송고’에 만송행수(1196~1246)가 시중, 착어, 평창을 붙여 완성한 것이다. 〈벽암록〉이 선 이야기만으로 되어 있는 반면, 〈종용록〉은 선은 물론이고 제자백가를 비롯한 중국의 모든 분야에 걸친 문헌을 총망라해 평창을 붙였다. 중국의 역사와 고사, 민간설화까지 포함한 방대한 내용이어서 〈벽암록〉과 마찬가지로 결코 쉽지 않은 번역으로 알려져 왔다. 공안을 깊이 파헤치고 참구하는 것은 〈벽암록〉과 같지만, 할과 방이 따로 없으며 잔잔하고 섬세한 설명이 그것을 대신한다. 간화선이 깨달음을 강조한다면, 묵조선은 수행정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종용록〉 100칙 공안 중 29개가 〈벽암록〉과 겹치는데, 이는 “간화선과 다른 견해가 있음을 뜻하며, 〈벽암록〉이 놓친 부분을 보완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님은 설명한다.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우리 세대가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국불교에서 〈벽암록〉과 〈종용록〉은 영원히 볼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서 〈종용록〉까지 하게 되었죠.” 그랬다. 스님의 원력은 그 오래 전 출가 당시의 서원과 정진의 끈을 놓지 않는 수많은 대중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탄허 강숙 강좌서 〈벽암록〉을 강연하는 모습.

“선어 번역은 수행 병행해야”
“구름은 피어 온 산이 새벽이요 / 바람은 높아 나무마다 가을이네 / 나그네 성 아래 머무나니 / 물결이 고기잡이 뱃전을 두드리네.”

1975년 출간된 석지현 스님의 〈선시〉 중 설잠 스님(매월 김시습)의 선시 ‘구름은 피어’다. ‘선시’라는 말과 장르는 이 책에 의해 처음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선시는 시를 빌려 깨달음의 경지를 읊은 시를 말한다. 앞서 말한 선어록을 비롯해 모든 선어는 이처럼 체험에서 온 언어다. 때문에 선어는 체험 없이는 쓸 수도 제대로 읽을 수도 없는 언어다. 글자의 뜻으로 읽는 언어가 아니라 글자에 깃든 체험의 세계를 읽는 것이다. 때문에 아득한 시절에 선지식이 경험했던 적정의 순간을 오늘의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체험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선어를 번역하기 위해선 반드시 정진을 병행해야 합니다. 글자만을 보고 번역하는 것은 필사에 불과합니다. 직접 수행을 통한 체험이 있어야 그 언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스님은 매일 오전에 참선을 통한 수행을 하고 오후엔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선어 앞에 앉는다.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글자 너머에 숨은 뜻과 만나기 위해 아득한 시절을 걷고 체험의 시간에 머물기도 한다. 수행을 위한 자리를 따로 찾아 나설 일도, 정해진 한 철을 찾아 굳이 이름을 적을 일도 없다. 스님에겐 쉼 없이 그 문자 아닌 문자 앞에 앉는 일이 곧 수행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선인 것이다. 

스님은 〈벽암록〉, 〈종용록〉에 이어 〈임제록〉을 준비하고 있다. 원고 작업은 마친 상태이고 출판사의 교정 작업과 마무리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스님의 원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님은 그 동안 보아왔던 선어록에서 정수만을 가려 뽑는 작업을 시작했다. 1차로 ‘당ㆍ송’ 시대의 것을 작업 중이다. 이어 ‘원ㆍ명ㆍ청’과 ‘한ㆍ일’까지 갈 생각이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불사다.

“대중에게 선은 점점 더 필요할 것입니다. 시대 자체가 빠른 시대입니다. 때문에 직관이 필요한 시대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은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선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세수 하듯이 5분씩만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라고 한다. 꾸준히 그 시간을 쌓으면 힘이 길러지고 힘이 길러지면 그것이 선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석지현 스님이 완역한 〈벽암록〉.

스님은 3월 13일 개강한 ‘2017년 탄허강숙’ 강좌에서 〈벽암록〉을 강의하는 등 번역과 더불어 선의 저변을 위한 불사를 쉼 없이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스님이 번역과 강의 등 쉼 없는 불사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쉼 없는 수행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첫 번째 이름은 수행자이며, 스님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비승비속’이라고 했던 것처럼 스님에게 산문의 안과 밖은 따로 없었다. 앉는 자리가 곧 고요한 자리이고, 보는 자리가 곧 깨닫는 자리였다. 스님의 걸림 없는 모습이 또 하나의 공안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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