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택시를 탔다. 조수석에 앉고 보니 그곳은 달리는 작은 불국토였다. 룸미러에는 언젠가 불사(佛事)에 쓰였을 오색실로 만든 매듭이 걸려 있었고, 기어 아랫부분에는 알 굵은 염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수석 앞으로는 어느 사찰이름과 풍경이 그려진 작은 달력이 고정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나무로 깎은 조그마하고 귀여운 동자승과 모형 목탁이 놓여있었다. 나 역시 불자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기사님 불심이 깊으신가봅니다?”

“예. 제가 절에 오래 다녀서….”

기사님의 대답에 이어 다시 물어봤다.

“어느 사찰에 다니시나요?”

그러자 기사님 왈 “절도 절이지만 사실은 제가 웬만한 스님보다 경전도 많이 읽었고 염불도 잘 하지요. 그리고….”

즉, 불교 의례며 불교 지식이 ‘웬만한’ 스님들보다 더 나아서 여러 절에 다니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답이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지식이 많으면 혹시 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셨나 싶어 언제, 어디서 불교 공부를 했는지 물어봤다. 우리나라 불교 관련 학과를 가진 대학은 몇 없으니, 몇 다리 걸쳐 내가 아는 분들을 기사님도 아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기사님은 대뜸, “이 분이 불교를 잘 모르시는구먼!”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어디서 불교를 공부하셨느냐는 나의 질문에 내가 ‘불교를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질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바로 그렇게 규정되고 나니 속 좁은 내 심사가 조금 꼬이기 시작했다.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기사님은 “요즘은 큰 사찰마다 불교교양대학이 있는데 나는 ○○절에서 불교대학 법사과정을 1기로 마친 사람이에요. 지금 활동하는 법사들은 다 내 후배들이지요”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는 염불할 때 목소리도 좋고, 스님들보다 아는 것이 많아서 여기저기 불려간다는, 자신의 ‘화려한’ 신앙 활동 자랑을 이어가셨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이론, 한국불교의 문제점 등도 쉬지 않고 이야기하셨다. 기사님의 불교지식이 불교에 관한 개론서도 거의 읽어본 적 없는, ‘근거 없는 자기만의 해석’임은 불교를 조금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기사님은 혼자 신이 나셨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병들게 하는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에 대해 많이 듣지만 정확히 그 내용을 모른다. 특히나 ‘탐심’을 욕심으로만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자신을 늘 드러내고 뽐내고 싶은 자만심과 교만함, 즉 만심(慢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력한 집착의 산물이므로 탐심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기사님은 삼독을 없애기 위한 공부인 불교를 알게 되어 오히려 ‘나, 나의 것’에 대한 아상(我相)이 더 커져버린 듯 했다. 그런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얘기에 내 심사가 꼬인 건 내게도 불교를 조금 공부했다는 깜냥과 이에 대한 아상이 기사님 못지않게 가득했었기 때문이리라.

그날 그 택시는 염불소리와 작은 목탁과 부처님을 모신 불국토였지만, 실상은 스님보다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불교법사’와 그런 법사보다 더 잘났다고 믿는 ‘불교학도’의 아상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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