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폐허의 날란다 대학서

인도 동북부에 위치한 날란다 대학의 전경. 현재는 폐허가 됐지만, 전성기에는 대승불교 연구대학으로 국제적 명성을 가졌다. 동아시아에서도 현장, 혜초 등이 구법길에 올라 이곳서 수학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

폐허, 거대한 폐허, 폐허에도 거대함이 있는가. 날란다. 한 때 ‘인도 불교교학의 중심지’ 혹은 ‘대승불교대학’이라고 주목을 끌었던 곳. 하지만 오늘의 날란다는 건물의 잔해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다. 불경 읽는 소리 대신 바람소리만 스쳐 지나갈 따름이다. 아니, 뜨거운 햇볕이 붉은 벽돌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 폐허의 거리를 거닌다.

印 동북부 위치한 날란다 유적
국제적 불교교육·연구처 ‘명성’
혜초·현장 등 동아시아 구법승
목숨 걸고 求法유학, 공부 매진
 
12세기 이슬람 침략으로 폐허
인류유산 파괴 이해 못할 행위


날란다는 인도 동북부 비하르에 위치해 있다. 마가다 왕국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그러니까 오늘의 라즈기르와 가깝다. 생전의 붓다는 이곳 날란다에서 설법을 자주 베풀었다. 아니, 쿠시나가라의 열반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도 날란다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날란다는 거룩한 곳이었다. 그래서 폐허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날란다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이들 가운데 아쇼카 왕을 비롯 나가르주나와 같은 사상가도 있다. 오늘의 유적은 6세기 이후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까 날란다는 6세기 무렵 불교연구 센터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같은 명성은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12세기 이슬람의 침략으로 사양길에 들어섰다.

전성기는 당 나라와 신라의 구법승들도 끊이지 않고 찾아와 불교를 연구했다. 그리고 폐허, 오늘의 모습은 20세기 전반 고고학적 발굴 작업에 의한 결과이다. 현재 확인된 건물 터는 사당(祠堂) 6군데, 승방(僧房) 11군데 등 17군데이다. 발굴 당시 발견된 유물은 부근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현장 법사는 그의 인도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날란다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우선 날란다의 명칭과 위치에 대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날란다는 신왕사성 북쪽 30여리에 있다고 했다. 가람 남쪽 숲속의 연못에 용이 살고 있는데, 용의 이름이 날란다라고 했다. 그래서 용의 이름을 따 절 이름을 지었다는 것. 하지만 여래가 보살행을 닦을 때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 중생을 살폈는바, 왕의 덕을 찬미하여 가람 이름을 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붓다 재세 시에는 상인 5백 명이 10억의 돈을 보시했고, 붓다는 이곳에서 3개월간 설법했다고 했다. 붓다 열반 이후 한 점쟁이가 예언하기를, “이곳은 훌륭한 고장이다. 가람을 세우면 반드시 성대하게 되어 인도의 모범으로 천년을 지나도 오히려 번창할 것이다. 후진 학자들은 이곳에 오면 학업의 성취에 이익이 될 것이다. 다만 피를 토하는 자가 많겠는데 이는 용을 해친 때문이다”고 했다. 현장법사의 날란다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면서도 흥미롭다. 그만큼 날란다의 의의에 대하여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승도는 수천 명인데 모두 재능이 높고 학식이 있다. 덕행이 당대에 존중을 받고 명성이 외국에까지 뻗치고 있는 사람만도 수백 명이다. 계행도 청결하고 수칙도 순수하다. 승도에게는 엄한 규제가 있고 사람들이 이를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인도의 제국에서 모범으로 우러르고 있다. 교의(敎義)를 연구함에 있어 날을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해 하며 아침저녁으로 서로 훈계하는 가운데 젊은이나 연장자나 서로서로 돕고 있다. 만약 삼장의 유현한 취지를 말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이경(異境)의 학자로서 성예(聲譽)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곳에 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비로소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유학했다고 허위사실로 말하며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해도 어디서고 정중한 예우를 받는다.”

날란다 대학의 학승 숫자만 해도 수천 명, 엄청난 규모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웬만한 대학 규모와 비슷하다. 문제는 재학생의 숫자가 아니다. 수천 명 가운데 학식과 덕행을 갖춘 거목도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날란다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당시에도 가짜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날란다대학을 팔면 어디서나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일류대학 사칭의 역사는 이렇듯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니!

의정(義淨)은 날란다에서 10년간 공부한 구법승이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날란다의 승도 숫자는 3천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하여 승방은 8군데로 방은 3백여 개나 된다고 했다. 엄청난 규모를 일러주고 있다. 때문에 날란다의 승원은 3층 구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10년 유학이라. 이는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10년 동안 연구할 만큼 날란다는 시설과 학문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날란다의 마당을 거닐어 본다. 신라에서 온 학승의 모습도 그려본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인도 여행기를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을 그려본다. 신라에서 멀고도 먼 이국에 온 이유, 오로지 구법, 그 한가지의 사실이 아닌가. 목숨을 걸고 온 길. 오늘의 인도여행도 인내심을 많이 요구하고 있는데, 그 옛날의 사정은 얼마나 가시밭길이었을까.

신라는 인도문화를 직수입하는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우리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해 답답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기록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책 한 권 제대로 간직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나마 돈황 막고굴 석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혜초의 기행문 때문에 일말의 안도감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폐허의 날란다를 거닐면서 많은 상념에 빠져야했다.

날란다 대학의 제3사당지 소조상군. 31m에 달하는 높이에 굽타양식의 소조불들이 봉안돼 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승방 터, 크게 8개 정도의 사각 건물이다. 이들 뒤로 간격을 두고 사당 자리가 있다. 대규모의 기초를 남겨 전성기의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 건물 유적 가운데 눈길을 강하게 끄는 곳은 제3사당이다. 현재의 건물 높이만 해도 31m 정도이다. 꼭대기에 불상을 봉안했을 터인데, 현재는 없다.

불상이 없어서 그럴까, 무너지다만 붉은 벽돌의 건축이어서 그럴까, 붉은 벽돌이 안기는 의미는 자못 숙연하게 한다. 제3승방 터의 한 가운데 커다란 스투파가 있다. 7개의 층위 가운데 5층은 굽타양식(6세기 말~7세기 초)의 소조불상이 발견된 곳이다. 소조상을 봉안했을 벽감은 현재 40여 군데로 헤아려진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 벽감에 남아 있는 불상들을 보면서 과거의 영화를 생각해 본다.

날란다에서 발견된 불상은 많다. 그 가운데 나의 눈길을 오랫동안 묶어 둔 걸작은 ‘석조 문수보살입상(6세기, 뉴델리국립박물관 소장)’이다. 제1승방지에서 출토된 이 작품은 늘씬한 몸매에 부드러운 세련미를 자랑하고 있다. 허리가 잘록하고 몸은 약간 비튼 것처럼 운동감을 자아내고 있다. 왼손은 어깨 쪽으로 들어 연꽃을 들고 있고, 오른 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트려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듯 어여쁜 자태에 머리 장식이 화사하다.

세 갈래의 머리 매듭과 화려한 목걸이는 나신의 상체에 변화감을 준다. 상체의 단순미와 비교하여 하체의 복잡한 구성은 상호 비교하게 한다. 아름다운 문수보살, 이런 작품이 날란다에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인도미술의 찬란함에 대하여 감탄사를 준비하게 한다.

“인도 불교미술의 고전시대는 굽타시대(320~550년경, 미술사적으로는 750년경까지)에 도래하였다.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이 등장한 강성한 제국인 굽타 왕조는 궁정과 큰 도시를 중심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하였다. 문학과 음악, 미술이 모두 번성했는데, 특히 미술은 인도의 수준으로 볼 때 하나의 완성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전개되어 온 발전이 절정기를 맞으면서, 그렇게 완성된 형태는 고전적인 모델로서 아시아의 광대한 여러 지역에 파급되었다. 굽타 왕조는 종교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여러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불교 안에서도 소승불교도들이 대승불교도들과 함께 생활을 영위하였다. 대승불교가 이 시대에 유신론(有神論)적인 경향을 띠게 됨에 따라, 숭배되는 신들의 종류가 다양하게 늘어나고 복잡한 주술 의례가 중시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힌두화 과정으로 귀결되었는데, 힌두교의 시바 숭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머지않아 북인도에서 불교의 종말을 가져왔다. 8세기에 시작된 이 과정은 불교가 이슬람교의 침입으로 인해 절멸되는 12세기까지 진행되었다.”
 - 디트리히 제켈, <불교미술> 中

신라 미술의 절정은 8세기에 도달했다. 토함산 석굴암이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인도 불교의 화려한 만개, 그리고 굽타시대의 절정, 8세기를 하나의 꼭지점으로 이루고 12세기까지 하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슬람의 침입은 결정타였다. 형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의 교리는 많은 미술품을 파괴하게 했다. 중국 베제클릭 석굴사원의 파괴된 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도처에서 이슬람의 만행을 볼 수 있다. 근래 바미얀 석불의 파괴 행위에서 전 세계인은 경악을 금치 못한 바 있다.

종교의 차원을 떠나 인류문화 유산을 그렇게 쉽게 파괴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아무리 성주괴공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경우가 있는 것이다. 날란다를 거닌다. 붉은 벽돌의 건물 터 사이를 거닐면서 폐허의 의미를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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