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마음을 중도에다 두고 중심을 지키면서 행해 나가야

물리가 터질 수 있는 공부 방법은

질문 스님께서는 법문 중에 물리가 터져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물리가 터질 수 있는 공부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을 소상히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동을 하면서도, 죽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자유스러워야 공부가 되는 거지

강제 계율을 받으면서 어떻게 공부가 됩니까?

답변 여러분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에 여러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 까닭에 공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숨쉬기를 ‘만든다’ 하면은 벌써 그건 아닙니다. 한도가 있는 것은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우린 자연적으로 생명이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공기가 들고 나서 우리는 호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게 뭐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고 얼마나 무서운 도리면서도 자비한 도리인지 모를 겁니다. 요만큼 하나 새, 틈이 없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를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마는 우리가 마음 씀씀이를 쓰는 데에 전체가,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좋은 거든지 나쁜 거든지 거기서 다 나옵니다. 틈이 없어요.

요거를 하나 얘기를 할까요. 제가 예전에 산중에 들어가서 돌아다닐 때에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진리는 목적지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인가 하면은 종점이고, 종점인가 하면은 시발점이 돼서 도저히 그것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대로 그냥 다리를 떼어 놓은 것이죠. 떼어 놓다 보니깐 어느 산중에 근근 들어갔는데 때에 따라서는 참, 장난이라고 할까요? 장난이 아니라 공부라고 할까?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다가 어느 절이나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은 사람 같지 않으니깐 내쫓았습니다. 내쫓아도 안 나가면은 그냥 떠다박질러서 그냥 내쫓죠.

그러면 그 사람이 원망이 되는 게 아니라 웃음이 나는 겁니다. 왜 웃음이 나느냐. 글쎄, 왜 일부러 가서 거기서 자고 싶지도 않은 거를, 이 산울 밑에 어디 잘 데가 없어서 거기 가서 일부러 잔다고 해 가지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발길로 채이고 떠다박질러지고 넘어져서 피가 나고 그러느냐 말이에요. 그걸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말입니다, 엎드려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어떤 생각이 났느냐 하면은 ‘야, 저 사람에게 괜히 내가 죄를 지어 주고….’ 나는 나대로 우습기만 한 겁니다. 그래, 어디 잘 데가 없어서 저 천막이나 쳐 놓고 있는 데 가서 자자는 거냐 이겁니다. 천막은 본래 쳐져 있고 본래 탁 터져 있는데. 그건 한생각에 달려 있는 건데. 아, 그거 얼마나 편안해. 세금 달라는 소리도 없고 와서 자란 말, 자지 말란 말도 할 거 없고 그런데, 풀 속을 헤치고선 거기 가서 턱 드러누우면 만사가 편안한 것을, 글쎄 그게 무슨 짓이냐 말입니다.

그리고 또 뭘 얻어먹자고 들어가는 거야, 또. 얻어먹긴 뭘 얻어먹어? 아, 맨 먹을 건데. 이 세상에 먹을 게 없는 데가 어딨어요? 모든 풀이 다 먹을 거예요. 그런데 먹을 거를 그렇게 찾고 다니면 먹을 게 안 나와. 먹을 게 보이지도 않고, 또. 먹을 걸 찾지 않고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해골이 있고 뼈다귀 있는 데로 가겠다’ 이런다면은 아예 먹을 게 나오죠. 해골들이 다 쫓아다니면서 해 줘요. 그러나 내가 죽지 않겠다고, 살겠다고 먹을 걸 짊어지고 다니거나, 자겠다고 어디 가서 구걸을 하거나, 노비를 얻거나 이런다면은 절대 그것은 생기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승엘 들어갈 수도 없고요. 산 몸으로 어떻게 저승엘 들어갑니까. 네? 산 몸을 가지고, 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겁니다. 마음이 죽어야 들어가지.

그래서 야단을 맞고 싱그레 웃고선, 본래는 그러한 마음을 굳이 가지고 갔던 게 아니기 때문에 ‘아하, 이것이 바로, 내가 예전에 누구한테 들은 바대로 이것이 바로 탁마요, 이것이 바로 탁발이요, 이것이 바로 선법의 도리를, 지혜로운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하고선 스스로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참나가 고마워서 말입니다, 싱그레 웃고서 ‘야, 이렇게 다친 이 무르팍은 금방 낫겠지.’ 하고선 그냥 갑니다. 산으로 올라갈 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말입니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그전에도 그런 말을 벌써 몇 번째 했으나 되풀이하죠.

큰 묘지에다가 등을 기대고 자려고 떡 앉아 있으니까 아, 거기서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나와서 신발 한 짝 훔치러 왔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묘지는 큰 우주의 근본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묘지, 묘산은. 이걸 뜻으로 배워야지 어떠한 물질로다가 배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엉뚱하게 그냥 물질로 가 버리고 말아 버려요. 뜻으로 아셔야 돼요. 그래서 신발 한 짝은 이승에 발 한 짝, 저승에 발 한 짝을 디뎌야 왕래를 하죠.

그런데 그걸 처음에 들을 때는 그냥 별안간에 각중에 그렇게 일어나니까 내가 너무나 놀라서 막 뛰었습니다. 그냥 막 뒤로 가는데 그믐밤에 뒤로 가면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때도 어린 마음이니깐 그렇겠죠. 그래서 가다가 주저앉아 궁둥이를 찍고 보니까는 그냥 얼마나 아프던지 눈에서 불이 번쩍 나면서, 번쩍 나는 순간에 뭔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어, 샐 틈이 없구나!’ 귀신이고 뭐고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왜? 나한테서 나왔다 나한테로 들고, 나한테서 나왔다 나한테서 들고 그러는데 그 자리의 조작이지 딴 데서는 조작이 없어, 도저히. 그걸 아셔야 됩니다. 딴 데서 들어오는 조작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자리입니다. 나고 드는 조작이 거기지, 나고 드는 조작이 거기라는 거를 알게 되면 속지 않습니다. 절대 속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속아서 이리 팡 치고 저리 팡 치고 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석존께서는 속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항복을 했고 자기가 항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서 턱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샐 틈이 없이 여기에서 나고 드는데, 날 때도 샐 틈이 없고 들일 때도 샐 틈이 없는데 아니, 각중에 뭐가 나서….’ 하고선 딱 앉아 있으니까 물리가 터지는 겁니다. 우주의 섭리라든가 이런 문제가 전부 마음으로부터 오관을 통해서 다 섭리가 터지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지, 머리에서 계발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에서 그렇게 들이고 내는 게 빈틈없다는 그 사실에, 즉 뿌리 없는 기둥이 하늘을 받치고 빙글빙글 돌릴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내가 자꾸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오관을 통해서 지혜로운 마음과 또는 물리가 터져서 참, 용이 됐어도 물이 없어서 헤엄을 못 치다가 물을 만나 헤엄을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그러한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계율과 깨달음이 연관이 있는지

질문 스님, 다른 스님들은 계율에 대해서 중요하게 말씀을 하고 그러시는데 스님께선 계율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계율과 깨달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요.

답변 계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계율이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벌써 자기가 상식과 교양, 교육을 다 받고 잘못된 거 잘된 거를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벌써 근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말은 안 해도 좋지만 사회에서 사시는 분들은 사회의 계율이 있고 질서가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승려들이 사는 도량에는, 여러분이 사는 데나 우리 승려들이 사는 도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도량’ 하면 전 우주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절 도량에서 사는 승려들은 승려들대로 계율이 있고 그렇지마는 그 계율을 무시하고 공부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 계율도 거기에 근본적으로 바란스가 맞아야지 만약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근본적으로 상식을 알기 때문에 내가 절에 들어가면 절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들에 나가면 들에 나가는 대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계율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절간에서는 시켜서 하는 이 군대식 같은 그러한 계율이죠.

사회에서도 어느 회사에 들어가거나 하면 거기도 계율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게 계율은 제가끔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계율이 따로따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계율을 지키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차를 피해서 보도로 간다. 차 속에 들어가지 말라니까 우리가 안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죽을까 봐 안 들어가요. 그건 저절로 그렇게 돼 있죠? 차가 오는데도 무조건 내가 차 속으로 들어가질 않죠? 차를 피해서 내가 또 갑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에요, 근본적인. 집안에서도 그럽니다. 아, 더러운 것은 좀 더 훔치고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 놓는 것도 계율이고, 모든 것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계율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 사는 것이 계율에 의해서 올바르게 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행한다 이 소립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돼 있어요. 여기에 앉아 계시는 분들에 한해서는 돈을 천만 원을 주고 오늘 강도질을 한번 하라고 그래도 못해요.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기 이전에,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 이걸 떠나서 우리는 계율을 지금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태여 ‘계율이다, 아니다’ 그런 말을 붙일 필요가 없죠. 그리고 요것을 계율에다가 딱 얽매어 놓는다면, 이북의 저 김일성처럼 딱 묶어 놓는다면 이건 독재예요. 자유 계율이 아니라 독재! 이러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계율 속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죠, 강제 계율 속에서는.

그래서 예전에 미국에서 포교를 하셨던 행원 스님이 중국으로 순례를 하고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거기 선맥이 끊어진 듯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제 계율이란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마음이 자유스러야지, 노동을 하면서도, 죽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자유스러워야 공부가 되는 거지 강제 계율을 받으면서 어떻게 공부가 됩니까?

그리고 ‘식탐을 갖지 마시라’ 한 것도 우리가 공부를 하려면 외로워야 하고 고독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고 어따 기댈 데도 없을 때에 우리는 자기의 생명수가 홀연히 나서 맛을 보는 거지, 배부르고 호화롭고 안락하고 마음이 이래서는 일심으로써 그 철벽을 뚫을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있어도 자기 게 아니고, 먹을 게 많아도 자기 게 아니고, 호화로워도 자기 게 아니고, 모든 게 자기 것만은 아니다 이겁니다. 일체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언짢아할 것도 없고 또 슬퍼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이 항상 마음을 중도에다 두고 중심을 지키면서 해 나갈 수 있는 그 공부가 필요한 거죠.

그리고 계율 이 자체가 말입니다, 계율이라 하면 이런 게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몇 시까지 공양을 끝내고, 또는 아침에 몇 시에서부터 예불을 올리면 그다음에 법당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또는 몇 분,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30분이면 30분 좌선하고 앉아 있는 거, 참선한다 이런 계율, 또는 오늘은 오늘의 소임을 맡은 사람들의 짜임새가 똑똑 떨어지게 요렇게 돼 있는 것을 이름해서 계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승려라면 그렇고 여러분도 아침에 일어나시면 으레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 씻고 여자는 밥한다.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뭣을 하고 내 몸에 있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몇 시간이면 벌써 어디까지 간다. 회사에 나간다. 장사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맞춰서 나가는 것도 역시 그것도 이름 붙이다 보면 계율이죠. 그리고 나가서도 올바로 해야만 그게 계율이죠. 우리가 올바로 못하는데 어떻게 계율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식화돼 있단 얘깁니다, 근본적으로. 그거를, 시간을 요렇게 요렇게, 요땐 요거를 하고 요때는 요거를 하고 요땐 요거를 하고, 요렇게 짜 놓는 거를 계율이라고 이름해서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입산한 분들도 아닌데 계율 뭐, 이런 거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에서 계율을 지키면서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것을 아마 철두철명하게 하셔야 될 겁니다. 그것도 참선이니까요. 어느 거 하나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똥도 옆으로 누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고, 똑바로 누면 쏙 똥이 들어가니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죠. ‘무슨 계율을 지키랬으니까 난 똥을 올바로 눠야겠다.’ 이럽니까? 똥 눌 때도 그냥 저절로 ‘아, 한데다 누면 안 되지. 삐뚤어지면 저기 묻으니까.’ 그리고 ‘가래침을 뱉으면 이거 모두 더러우니까.’ 이렇게 스스로서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우리가 교양이나 교육이나 또는 상식이나 이런 걸 가지고 그대로 이렇게 계율을 지키고 나가는데, 그래서 인간 자체가 첨단을 넘고도 남음이 있다고 봅니다. 이건 벌써 그 재력을 아주 충만하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앉아서 이 우주를 그냥 굴릴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한 굴릴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계율 그런 것은 거기에 포함해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질문 스님, 똑같은 정도의 죄를 짓고도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은 아주 가책에 못 이겨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죄는 좀 지었기로서니 그게 뭐 그토록 가책 받을 바 있느냐.’ 하고 이 정도로 일해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왜 그렇게 나누어지게 되는지요?

답변 그게 두 가지가 다 글러요. 두 가지가 다 나쁘다고요. 가책을 받지 않을 일이라면 그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거든. 그거는 그저 가서 사과를 하고 이러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가책 받을 일, 그건 아예 그렇게 하려면 하질 말아야 되겠지요. 또 ‘그까짓 걸 뭘 그래? 가책을 뭘 받아?’ 이러고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것이 자기 앞에 돌아오게끔 돼 있죠.

그러니 우리가 그 가책을 받는다 한다면 양심이라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다음에 그런 짓을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괴로워서. 그렇지만 ‘그까짓 걸 뭘 가책을 받아?’ 이럴 때는 그 사람은 능히 그런 일을 더 저지르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한 거를 회개하기 이전에 잘못하질 않는다면 회개도 할 것이 없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는 어떤 때는 혹시나 잘못되는 일로 갈까 두려운 얘기가 있습니다. ‘야, 모든 거를 주인공에 맡겨 놔라.’ 이럴 때 ‘야, 그럼 나쁜 도둑질을 하고도 맡겨 놓으면 되느냐?’ 이렇게 생각할까 봐 말입니다. 그래서 아주 짚고 넘어가는 말이 있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상식과 도의, 의리, 도덕을 갖추어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서 부모에게 묵은 빚을 갚으며 자식들에게 햇빛을 주면서 이렇게 나가는 이 중도의 참,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간의 참마음이 우리 인간들을 조성해 내지 않았나.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만약에 “그런 것 저런 것을, 도둑질을 해도 거기다 맡기면 되겠군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 말 자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니까 아예 대꾸할 건덕지도 없는 거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부처님의 마음 자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 마음부터 헤아려야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우주 만물만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될 때에는 참, 우리가 부처님이라는 그 뼈다귀 없는 뼈다귀를 세세생생에 우려먹어도 그것은 없어지질 않습니다. 젖 같은 그 물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영원토록 간직하게 하고 끄달리지 않게 하는 보배예요. 우려도 우려도 줄지도 않고, 갖다 부어도 부어도 늘지도 않고 항상…. 세상에 그런 보배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겉으로라도 부처님 하나만 모셔 놨다 하면 밥은 굶지 않으니 도대체 그 보배는 어떻게 생긴 보배기에 그렇게 좋단 말인가. 거죽 모습으로 생긴 것도 갖다 놓기만 하면 먹고 살게 해 주는데 하물며 모습 아닌 그 보배는 얼마나 윤택할 것이냐는 얘기예요. 영원토록 말이에요. 아니, 가고 오고 그런 것도 없이 말이에요.

 

주인공은 어디에 있나요

질문 마음공부 하는 저희들이 관할 때에 주로 가슴 쪽에다 그 마음을 응시하고서 그쪽에 주인공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마음을 내는 분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생각을 낸다 하면 머리 쪽 그쪽으로 해서 무슨 흰, 아주 밝은 광채 같은 그 느낌이 들면서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그곳을 의식하면서 관하는데요, 주인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관해야 하나요? 물론 큰스님께서도 가슴을 이렇게 지적하시면서 법문 중에 관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주인공이라는 건 어디 특별히 있는 게 아닌 줄은 압니다만 거기에 대해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거 봐요. 우리가 지금 말을 하죠. 말을 수없이 바꿔서 말을 해도 그 말 나오는 데는 지적을 할 수가 없죠. 말을 하기는 하는데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지 지적은 못하죠. 지적을 못하죠? 못하는데 이렇게 모든 에너지가 이렇게 한 그릇이 모여 있으니까 이 가운데서 그냥 그 에너지 소리가 하려면 나오고 안 하려면 막히고 그러죠. 그러니깐 이 모습이 있으니까 이 모습에서 공생으로써 공용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제일이냐 내가 제일이냐…, 뱀이 가다가 ‘머리가 제일이냐 꽁지가 제일이냐’ 이러고 싸우지 않도록 돼 있는 거예요. 이게 몸체가 돼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이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이건 현실도 공했으니까 공한 대로 네가 결정하고, 그것이 바로 공심의 법이다 이거죠. 그러니깐 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팔도 아니고 다리도 아니고, 모든 게 아닌 그것 때문에 되는 거예요. 아닌 것 때문에. 아닌 것 때문에요.

그래서 이런 말을 했죠. “부처님은 어디서 찾습니까?” 그러니깐 “귀신 방귀씨는 심었느냐.” 이러거든요. 그래서 아는 사람은 “예. 심긴 했는데 기르는 걸 어떻게 길러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아, 그거 뭐 어려우냐. 귀신 방귀씨를 심었으면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말고 덜 먹이지도 말고 그걸 잘 아구창 나지 않게 먹이면 되지.” 이런 게 우리가 지금 관하는 겁니다. 자기 앞에 닥치는 대로거든요. 그걸 ‘내가 잘한다’ 이러고선 과용을 하지 말고 그냥 남한테 해롭게 하지 말고 하는 거, 남을 이익하게 하는 거, 그래서 나도 남을 이익하게 했으니까 좋은 거죠. 좋은 마음이죠. 남이 이익하고 잘되는 거 보면 참 좋죠. 안되는 거 보면 참 심장이 좋지 않고요. 그러니깐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것이 이 물 한 모금 먹는데 이거를 누가 먹었다고 할 수 있나 이겁니다. ‘이거 누가 먹었다고 할 수 있나’가 바로 그 에너집니다.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자불이라고 부르고 불성이라고 불러요. 그것은 이름 없는 이름이다 이겁니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질문 저희들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진리이자 사는 거라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그걸 좀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그것은 이 마음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는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왜냐하면 엊그저께 이런 일이 있었죠. 어떤 사람이 소를 많이 끌고 갔습니다. 그 크고 어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도살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럴 때 나는 그 소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고 나도 울었습니다. 울었는데 금방 그 소는 소의 모든 무명을 벗고, 내가 그 의식을 내 가슴에다 모두 안아 주니까 내가 돼 버렸습니다. 내가 돼 버리고 그 소는 간데 온데가 없었습니다. 그랬으니 한 찰나에 바로 이 사람이, 못난 이 사람이 된 거죠. 그래서 나는 그 어진 눈을 보고서 참 그렇게…, 그렇게 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네 고기는 남의 약이 되지마는 네 마음은 바로 내 마음이니 네 몸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이 돼 줘라. 그리고 네 마음은 내가 되면 되지 않겠니.’ 이렇게 해 놓고는 거기서 한 바퀴 굴려서 또 내놓고 ‘너는 그렇게 어질고 착한 것이 어쩌다가 소 옷을 입어서 남들이 그렇게 부리고 때리고 채찍으로 치게끔 돼 있니?’ 하고 불쌍히 생각했습니다마는, 나도 그 소와 둘이 아닌 까닭에 언제나 각각 보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애기를 못 낳는다고 왔어요. 그걸 한번 생각을 해 봤는데요, 열 달이 되니까 아주 아들을 떡두꺼비같이 어질게 낳았거든요. 그러니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 건지는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신다면, 바로 과거는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가지 않았으니까 없을 테고, 현실은 자꾸 돌아가니까 그저 한마음이죠. 그저 자꾸 돌아가니까 공했느니라 한 겁니다. 그냥 아주 없어서 공한 게 아니라 자꾸 돌아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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