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⑦

불안과 나는 별개라 생각
동일시 않도록 노력해야
소유자 아닌 관리인으로서
나만 옳다는 생각 버리자

내면 자각의 개별성 초월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前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탄핵인용’으로 결정되자 한편에서는 “촛불승리 만세”를 외치면서 ‘박 前대통령 구속과 적폐청산’에 주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말도 안 돼”라고 거세게 저항하며 헌재 선고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헌재의 결정으로 대통령 탄핵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모양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흥분상태에서 차기 대통령을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후보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안전하고 튼튼하게 이끌어갈 통합된 의식을 가졌는지 선택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정권교체, 정치교제라는 시대적 과제가 놓여있어서 현명한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 양방의 입장이 너무나 극명하여 쉽사리 통합으로 인한 안정이 올 것 같지는 않다.

명상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양편 모두 개인이 가진 에고(ego)가 집단의 에고로 발전하여 엄청난 파괴적 힘으로 대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자칫 개인은 물론 사회전체를 파멸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에고덩어리를 초월하여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초월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때로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난 잠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어야지’ 또는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 포기해야 되겠구나’ 같은 생각이 들 때, 나 자신의 욕망이나 성취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자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각이 개별성을 초월하여 개인적인 문제와 긴장과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동시에 그 사람 ‘너머에’ 있음으로 인해 ‘사적인 나’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심층의 나’는 그것을 초월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인식한다. 켄 윌버(2001)는 그의 저서 〈무경계〉에서 ‘초월적 나’란 자신의 사적인 마음, 몸, 감정, 생각, 느낌들로부터 초연한 자각의 창조적 중심이자 확장된 자각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에 있으면서 자신을 넘어선 이것을 ‘초월적 나’ ‘내가 아닌 나’라고 말했다.

그는 ‘초월적인 나’를 직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문장을 천천히 소리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암송해보자.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보이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보는 자가 아니다. 내 몸은 피곤하고 흥분하기도 하고, 아프거나 건강하기도 하고, 무겁거나 가볍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내면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몇 차례 암송한 다음,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나는 그 뒤에 남아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注視者)이다.” 이런 훈련을 끈기 있게 지속해 나가면 그 안에 담긴 이해가 공고해지고, 내적 정체감의 근본적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즉 내면의 자유로움, 가벼움, 해방감, 안정감을 직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된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다. 나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한다. 불안이 사라져가는 것을 단지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불안이 존재하든 안 하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자신을 혼란시키는 감정이나 생각, 기억, 경험이란 모두 자신이 배타적으로 동일시해왔던 것에 불과하다(싫어하면서도 함께함).

켄 윌버는 이럴 경우 그런 혼란의 궁극적인 해소는 단순히 그것들로부터의 ‘탈동일시(脫同一視)’라고 보았다. 그것들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은 말끔히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보이는 대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보는 자, 진정한 주체일 수 없다. 이런 탈동일시를 서서히 추구해 나가면, 지금까지 자신이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방어해왔던 나(자아)가 투명해지고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적인 나-나의 소망, 희망, 욕구, 상처 등-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생사가 달린 심각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하면, 어떤 상태를 주시하는 것은 이미 그 상태를 초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특정한 근심이나 걱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각색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순수하게 자각할 뿐이다.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주시자가 되어 대상을 관찰하는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잭 콘필드(1993)는 다음과 같이 갈등해결을 위한 안내를 했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기억하고 상상하며 생각하고 느껴봅니다. 어떤 상황이든 그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 장면, 그 때 있던 사람들, 괴로움,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다시 생생히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런 지점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기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 자기 행동은 어떤지, 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바라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마음속 문에 노크소리가 들린다고 상상해 봅시다. 몸을 움직여 문밖으로 나가봅니다. 그곳에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예수나 붓다, 성모마리아 혹은 우주의 위대한 여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그는 다정하게 당신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사는 게 참 힘들지요? 자, 우리 자리를 바꿉시다. 나에게 당신 몸을 빌려주세요.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줄게요. 내가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동안 당신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자기 몸을 붓다나 예수, 성모마리아에게 빌려주고, 투명해진 몸으로 그들을 따라 자신의 괴로움이 절정에 이른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그때와 같은 장면이 진행되도록 두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그냥 바라만 봅니다. 예수, 붓다, 성모마리아는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요. 침묵으로? 어떤 에너지로? 그들은 어떤 말을 할까? 그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그들의 몸 상태는? 그들의 대처방법을 지켜봅니다. 그들이 행하는 동안 줄곧 옆에서 관찰합니다. 그런 뒤 그들은 잠시 후 당신을 만나러 돌아옵니다. 그들은 가만히 당신의 몸을 돌려줍니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당신을 지극히 감미롭게 어루만지며 귀에다 몇 마디 충고의 말을 속삭입니다.

고통의 상황서 탈동일시
이러한 명상 과정에서 우리가 배운 비상한 지혜나 사랑 혹은 그 모든 것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 과정에서 나타난 성자들의 지혜는 바로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 안내에서처럼 나의 ‘진정한 보는 자-성자들의 지혜’가 고통이라는 상황과 탈동일시 한다면, 우리는 생활 속에서 자기초월이 가능할 수 있다.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하나, 우리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소유자에서 관리인으로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소유물에 지나치게 애착이 심한 경우에 이 방법을 사용한다. 실제로 나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다. 나의 삶 속에 있는 모든 ‘물건’들에 대해 나는 그저 ‘관리인’에 불과하며, 그것도 그 물건이 다른 누군가의 삶 속으로 넘어갈 때까지 뿐이다.

둘, 내가 옳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어떤 특정한 의견이나 입장을 고수할 때 사용한다. 만일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 그냥 순순히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의 관점이 그렇다는 점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혹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방을 존중해준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른 위치에서 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나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따라서 옳은 자는 아무도 없다. 옳고자 노력하며 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드는 일이 우리의 행복을 갉아먹는 적이다.

셋, 나 자신과 상황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행복이 타인들 행동의 결과에 좌우되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만 행복할 권리를 허용하겠다며 스스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만족한다. 행복은 선택이며 결정이지 남들에게 달린 것도 아니다.

넷,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해 본다. 지혜롭다고 여기며 존경하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그였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잠시 상상해 본다. 이렇게 하면 ‘나의 방식’을 고수하는, 정신으로 움켜쥔 손의 힘이 다소 풀릴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경우엔, 그들 같으면 어떻게 대응할지 물어본다. 이런 대화만으로도 나의 의식 안에서 초연한 관점이 투명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든 사람이든 집착하게 되면 그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관계와 나를 분리(탈동일시)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그것이 내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고 자유로울 수 있다. 나라고 하는 한 존재가 ‘안에’ 있는 동시에 ‘너머에’ 있음이 확고하다면 나를 초월해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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