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의 의미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 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 위대성 걸식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 이백 오십 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진지 드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를 들으시고 사위성에 들어 가시와 차례로 밥을 비시었다. 그리고 절로 돌아오셔서 진지 잡수시고는 가사와 바리를 거두시고 발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아란존자가 물었습니다. “경전의 첫머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이때 부처님께서 “여시아문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시(如是)는 이와 같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라는 것인가?

사람들은 서로 만날 때 대체로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과 내가 건강하고 편안하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사입니다. 부처님의 여시는 우리들의 안부 인사와 모양은 같을 수 있으나 그 뜻은 다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음, 있음과 없음, 생과 사, 좋아하고 싫어함 등 티끌 수와 같은 분별의 이분법이 추호도 서로 다르지 않고, 바른 마음과 분별망념이 조금도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라는 참으로 평등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나의 티끌과 다르지 않고, 우주와 다르지 않으며. 허공과 다르지 않고, 지혜와 자비, 공덕과 다르지 않고, 우주의 별들을 생성하고 거두어들이는 화이트홀, 블랙홀과 다르지 않으므로 언어와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완전한 충만(充滿)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를 들으시며, 사위성으로 들어가시고, 걸식을 하시고, 공양을 하시며,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시어 자리에 앉으시는 일체의 생각과 행위가 마음이며, 마음이 일체의 생각과 행위로서 서로 다르지 않고 여여(如如)하십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여시(如是)는 이와 같이 항상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머물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여 분별의 망념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은 가사를 입을 때는 가사에 대해서, 바리를 들을 때는 바리에 대해서, 사위성에 들어갈 때는 사위성과 걷는 것에 대해서, 걸식을 할 때와 공양을 할 때는 많고 적음과 맛에 대해서, 발을 씻고 자리를 편 후 자리에 앉을 때에는 깨끗하고 더러우며, 힘들고 편안함에 대해서 집착하여 일체의 생각과 행위에 나다 너다, 있다 없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티끌과 같은 분별망념을 일으킵니다.

한 생각 삿된 분별망념이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한 생각 삿된 분별망념이 꺼지는 것이 사(死)입니다. 우리들이 태여 나고 죽는 것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우리들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위를 하시지마는, 분별심을 여읜 여부에 따라 그 차이는 하늘과 땅으로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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