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첫 전령 납월홍매- 순천 금둔사

내 눈까지 붉게 물드네
봄의 첫 전령 납월홍매

순천 금둔사

금둔사 홍매를 ‘납월매(납월홍매)’라 부른다. 납월은 음력 섣달을 달리 부르는 말로 금둔사 매화가 엄동설한을 견디고 세상에 나툼을 뜻한다. 1월 말 경부터 꽃망울을 터트리는 금둔사 납월홍매는 봄의 전령이다. 금둔사 석등 위로 불빛 대신 납월홍매가 환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다.

언제부턴가 햇살이 가까워지고 훈풍이 코내음을 자극하더니, 마침내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려온다. 봄이다. 봄이 또 온다. 따뜻한 이름으로 지은 이름, 봄. 우리가 추운 눈을 감는 사이 따뜻한 바람으로 길을 내고, 그 달라진 길에 꽃을 피우며 한 발 한 발 다가온 봄. 그래서 우리는 그 계절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온다”고 했고, 그 ‘온다’는 그렇게 길을 가진 ‘온다’였다.

봄 길은 꽃길이다. 겨울을 지나온 동백을 비롯해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와 이름 없이 피는 꽃들까지. 꽃길이 시작됐다. 봄이다. 십 획도 안 되는 ‘봄’이라는 글자 한 자에 모두는 설레고,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는 꽃 한 송이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집집마다 창문이 넓어지고 창밖의 하루는 길어졌다. 그 긴 하루가 멀었던 세상을 가까이 부르고, 거리가 벌어졌던 너와 내가 또 한 번 깊어간다.

그렇게 바뀐 세상은 축제를 시작한다. 양산 원동매화축제를 비롯해 구례 산수유 꽃축제, 여수의 진달래축제, 서천 동백꽃축제, 해남 땅끝매화축제 등 전국은 꽃을 즐기며 잔치를 연다. 하지만 올해는 아쉽게도 지역적 특수상황으로 인해 취소된 행사도 있다니 미리 살필 일이다.

남쪽 땅 순천의 조그만 도량에도 꽃이 한창이다. 홍매화, 청매화, 설매화 등 매화나무 많은 금둔사다. 가지마다 촌음을 아껴가며 저마다 꽃잎을 뿜어낸다. 산새들도 발맞춰 축제를 시작했다. 달라진 나뭇가지를 찾아 산새들이 분주하다. 꽃잎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가 또 한 번 세상을 바꾼다. 세상은 그렇게 꽃과 새들이 바꾸고 있었다.

봄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기나 긴 겨울 끝에 오는 것을 보면, 먼 길을 돌아 오는 듯하다. 그 먼 곳서 길을 헤매지 않고 어김없이 찾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땅 어딘가에 봄길을 밝히는 등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이곳 남도 땅이리라. 남해를 지척에 둔 순천. 그 끝 자락 금전산 기슭의 도량이 첫 봄 전령 납월홍매가 피는 금둔사다.

꽃길의 길목 봄길의 등대… 청매, 백매 등 3월 절정

꽃소식 가장 먼저 알리는 납월홍매
일주문을 지나자 하얀 매화 한 그루가 먼저 객을 반긴다. 홍매, 청매, 백매 등 도량은 매화천지다. 도량 뒤 숲도 꽃들로 채워지고 숲에선 산새들이 야단법석이다. 붉은 꽃잎 너머선 붉은 노래가, 흰 꽃잎 너머선 흰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봄을 새들도 아는 듯하다. 봄은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설레게 한다. 봄 햇살 속에 서있는 석등 위로 홍매화가 가득하고, 법당 지붕 위로는 백매화가 구름 같다.

봄을 알리는 꽃소식의 선봉은 매화일 것이다. 잎도 내기 전에 꽃부터 밀어내는 매화는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 꽃 중 하나다. ‘화괴(花魁ㆍ꽃 중의 으뜸)’로도 불리는 매화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달리 명명한다. 일찍 핀다고 해서 ‘조매(早梅)’, 추울 때 열려서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해서 ‘설중매(雪中梅)’로 부른다. 그리고 빛깔에 따라 홍매, 백매, 청매 등으로 나뉜다.

“찬 서리 고운 자태 / 사방을 비추어 / 뜰 가 앞선 봄을 / 섣달에 차지했네”

신라 시인 최광유가 금둔사 홍매화에 붙인 ‘납월매’라는 시 구절이다. 이렇듯 금둔사 홍매를 ‘납월매(납월홍매)’라 부르는데, 납월은 음력 섣달을 달리 부르는 말로 금둔사 매화가 엄동설한을 견디고 세상에 나툼을 뜻한다. 매화 중에서도 홍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데, 금둔사 납월매가 그 이름처럼 홍매 중에선 세상 속으로 가장 빨리 나온다. 금전산이 북쪽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고, 도량 앞은 탁 트여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다. 금둔사 납월매는 이르면 양력 1월 말 경부터 꽃망울을 터트려 3월까지 핀다. 그렇게 홍매가 먼저 봄을 시작해 3월 초 절정에 이르면 청매와 백매 등이 뒤따르며 금둔사 봄은 절정을 이룬다. 잡화엄식(雜華嚴飾), 그야말로 화엄법계가 따로 없다.

금둔사 납월매는 본래 낙안읍성서 자라던 매화나무가 고령으로 고사하자 그 자목 혹은 가지를 옮겨 심었다. 금둔사에는 대웅전 옆과 계곡, 산신각 뒤편 등에 납월매 여섯 그루를 비롯해 청매, 백매 등 한국 토종매화 100여 그루가 있다.

봄소식 제일 먼저 알리는 남도 땅 금둔사에 매화가 한창이다. 도량을 장엄한 매화 꽃잎 너머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금둔사에는 대웅전 옆과 계곡, 산신각 뒤편 등에 납월매 여섯 그루를 비롯해 청매, 백매 등 한국 토종매화 100여 그루가 있다.

다시 천 년을 잇는 불사
선종가람 금둔사는 도로변서 가깝다. 포장도로를 버리고 산기슭에 발 디디면 얼마 안 가서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현대에 지었지만 소박한 적석의 석벽과 석벽 사이에 놓인 일주문이 고풍스럽다. 일주문을 지나 작은 개울을 돌다리로 건너면 도량이다.

금둔사는 백제 위덕왕 때인 55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10여 명의 승려를 길러낸 담혜 스님이 귀국해 583년에 창건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인 682년에 의상 스님이 중창하면서 산내에 금강암을 짓고 주석했다. 당나라 남전보원선사의 법을 받고 825년에 돌아와 신라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개창한 철감국사가 그의 제자인 징효 스님과 함께 중창했고, 삼층석탑(보물 제945호)과 석불입상(보물 제946호)을 조성했다. 또한 동림선원을 열어 육조의 선풍을 심었다.

백제 담혜 스님 창건한 천년고찰… 1983년 지허 스님 새롭게 복원 중창
도량에 매화나무 100여 그루 가득, 경내 전통차 역사 품은 차밭 ‘눈길’
금둔사 세월의 무게 일러준 3층 석탑과 석불입상 현재도 면면히 보존

고려 말 때인 1385년에 고봉 스님이 중창한 뒤 산내에 수정암을 짓고 주석했다. 스님은 후에 송광사 16번 째 국사가 된다. 그 후 금둔사는 세상서 사라진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도량은 전소되고 18세기 후반에 폐찰됐다. 절터는 논밭으로 변했고 선풍의 법향은 옛일이 되었다. 1983년 선암사 칠전선원의 지허 스님이 도량이었던 논밭을 매입하여 대웅전을 비롯해 태고선원 등 10여 동의 당우를 올리는 복원 불사를 하면서 금둔사는 다시 천 년의 법을 잇게 됐다.

“우리 절은 반농반선(半農半禪)합니다. 절에 일이 있어 오신 분은 손전화 ~로 연락 바랍니다. 이 절의 작업장은 절 가까운 뒷산이나 좀 떨어진 차밭입니다.”

태고선원 문 앞에 걸린 알림판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조주 스님의 <선문염송> 일구가 이어진다. “우주 생기기 전에 이 성품이 있었고 이 우주 멸망한 뒤에도 이 성품은 멸망하지 않느니라.”

지허 스님은 금둔사 중창 전 선암사서도 선과 차를 한 자리에서 닦았다. 그래서 ‘지허’라는 이름 뒤엔 ‘차(茶)’가 따라붙는다. 스님은 묵어버린 차밭을 손수 가꾸고 법제(法製)를 재현해 사중과 사세를 이롭게 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만연한 일본 녹차문화를 안타깝게 여겨 우리 고유의 차문화 복원과 보급에 힘써왔다.

금둔사지 3층 석탑(보물 제945호).

“차 맛을 잘 표현하는 말에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와 참선은 한 가지 맛이라는 뜻입니다. 선(禪)은 곧 사려수(思慮修)라 해 사고와 명상은 물론 수행을 함께 닦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중략> 지혜로운 삶과 선다일여의 지고한 수행으로 대오에 이르러 대자대비로 만덕을 베품에 자유자재해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조금도 걸림이 없이 일체중생이 한 생명도 빠짐없이 모두 부처를 이루어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고 지허 스님은 금둔사 홈페이지에 적고 있다. 지허 스님은 금둔사에서도 차밭을 일군다. 금둔사에는 옛날 야생차밭이 조금 남아있고, 1996년부터 지허 스님이 일주문서 선암사쪽 300m 지점의 길 아래 조성한 차밭이 있다. 금둔사차는 제 3창건주인 철감국사와 징효 스님에 의해 심어지고 가꾸어진 역사적인 차밭에서 시작됐다. 철감국사는 ‘끽다거’ 화두로 유명한 조주 스님과 함께 남전 스님에게 차와 선을 전수받았다.

봄바람이 매화향기를 실어 나르고 금전산 기슭엔 옛일이라 불리던 법향이 다시 피어 흐른다. 선원의 방이 어두운 것을 보니 지허 스님은 아마도 반농의 자리에 계신 듯하다.

금둔사의 흔적…석탑과 석불
대부분의 폐사들이 그렇듯 금둔사 역시 사찰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는 기록과 송광사 사적에 “송광사 제 16국사인 고봉 스님이 남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태조 4년(1395) 금둔사에서 하룻밤 머물고 이튿날 송광사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을 뿐 창건과 폐사에 관련해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창건과 중창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올 뿐이다. 문자로 읽을 수 있는 금둔사의 흔적이 많지 않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흔적이 도량 한 쪽에 남아있다.

금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945호)과 금둔사지 석불비상(보물 제946호)이 그것이다. 일주문에서 개울을 건너기 전 산기슭으로 오르면 돌계단 끝에 석탑과 불상이 있다. 석탑과 석불은 같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등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는 기록의 근거가 여기서 출발한다.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도굴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해 다시 세웠다.

석탑 뒤편의 석불비상은 연화대좌 위에 놓인 장방형의 길쭉한 비석 앞면에 부조 형식으로 부처의 모습을 드러낸 독특한 모습이다. 석불의 머리 위쪽에는 큼직한 빗돌지붕을 얹고 있어 외형으로만 보면 비석의 형태를 더 많이 닮았다.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처님을 모신 것처럼 보인다. ‘비상’이라는 이름의 이유가 있었다.

때론 문자대신 남아있는 흔적들이 더 확실한 기록이 되어줄 때가 있다. 문자처럼 모든 것을 다 밝혀주지는 못하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는 든든함으로 옛날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잊힐 수도 있었던 절터 하나가 그렇게 다시 세월을 잇고 있으니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석탑과 석불을 뒤로 하고 서면 매화꽃으로 장엄한 금둔사 도량이 눈을 호사스럽게 한다. 어디선가 봄바람은 불어오고, 꽃잎은 하염없이 흔들린다. 봄이다. 꽃잎 터져 나오는 봄이다. 봄바람 불어오는 봄이다. 지금 이 시간, 어디에 서든 서있는 곳은 모두 화엄이고 절정이다. 봄이 오는 꽃길로 나아가 봄의 한 가운데 서볼 일이다. 셔터를 무심하게 눌러대도 그 자체가 그림이다.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이다. 이번 주 매화꽃 흐드러진 금둔사 마당으로 당장 달려가자. 1년을 인내할 근기가 없다면 말이다. 춘삼월 이만한 상춘을 만나기 녹록치 않다.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짧다. 순간이고 찰나다. 혹여 다시 가람 사라지면 법자리 걸을 수 없고, 꽃잎이 지면 봄은 또 속절없이 간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1983년도에 지허 스님이 새롭게 중창불사한 금둔사 대웅전 전경.

교통·먹거리·숙박

△가는 길

자가운전=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IC, 호남고속도로 승주 IC 이용, 금산 삼거리서 좌회전 7㎞ 진행하면 절 이정표가 나온다.

대중교통=순천버스터미널 하차, 순천→낙안(63번) 시내버스 / 순천→벌교읍→낙안 군내버스

 

△볼거리

선암사=061-754-9117 / 승주읍 선암사길 450

낙안읍성=061-749-8831 / 낙안면 충민길 30

조계산 도립공원=061-749-8802 / 승주읍 승주괴목1길 11

 

△먹거리

수정산장=061-755-4916 / 닭복음탕, 백숙

녹수식당=061-754-6504 / 백반정식, 꼬막한정식

오금산장=061-755-5583 / 백숙. 삼계탕

고향보리밥=061-754-3914 / 보리밥쌈밥, 정식

 

△숙박

낙안민속자연휴양림=061-754-4400

풀밸리펜션=061-6611-2080

비송펜션=010-7581-5522

참살이민박=010-7174-4389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