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道紀行’- 불탑신앙 원조 산치대탑

산치 대탑의 전경. 거대함과 단순미에 매료된다. 또한 앞에 있는 문과 안에 새겨진 부조는 매우 세밀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탑은 왜 세우는가. 공들여 어렵게 세운 탑. 그렇다면 탑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공든 탑 무너지랴.’ 하지만 이런 속담의 허약함을 지적하게 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실제 도처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탑은 굳이 나무, 흙, 돌, 철 등으로 쌓은 건조물만 의미하지 않는다. 거창하게는 세상 만사, 그 모든 것을 말한다. 성주괴공이라고 무너지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

아쇼카 시대 대표작 산치대탑
거대함과 단순미 조화돼 ‘눈길’
사방문 부조엔 부처 조각 없어
비어 있음에도 비어 있지 않아

한번 세워진 것은 시차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주의 철칙이다. 무너지면서 일어서는 것, 그게 사람살이의 길이다. 일어서기 위해 무너진다? 나는 실크로드의 폐사지를 돌면서 폐허의 아름다움을 듬뿍 안기도 했다. 폐사지를 복원이라는 명분 아래 억지로 재건하기보다 텅 빈 채로 방기하는 것도 아름답다. 빈 절터에 바람만 출입하는 풍광의 상징성, 이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폐허는 폐허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절터 기행의 묘미가 있다. 폐허로 향하는 길.

스투파는 무엇인가. 붓다가 열반에 들자 시신을 화장하니 사리가 나왔다. 사리를 봉안할 건축적 가구물(架構物)이 절실해졌다. 산스크리트의 스투파는 탑파(塔婆)로 음사(音寫)되다가, 오늘날처럼 간략하게 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탑은 붓다의 무덤이라고 거칠게 개념 정리할 수 있다. 스님의 무덤은 한동안 부도(浮屠)라고 불리다가 붓다의 불탑(佛塔)과 비교하여 승탑(僧塔)이라고 부른다. 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건축이다. 하지만 전세계의 탑을 헤아릴 수 있다면, 아마 수십만 기가 넘을 것이다.

여기서 사리신앙의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붓다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와 말씀의 법신사리. 세상의 많고도 많은 탑은 다라니 같은 법신사리를 봉안하기 때문에 숫자와 무관하게 건립할 수 있다.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건립된 진신사리탑 다섯 군데는 일반적으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부른다. 통도사 등 오늘날 기도처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 명당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탑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증거이리라. 하기야 우리의 경우, 가람의 중심에 탑을 두고 있지 않은가. 원래 별도의 공간에 ‘무덤’을 두었던 것, 하지만 신앙의 중심으로 격상되면서 탑은 사찰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리는 붓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들면서 사리를 남겨주었다. 사리는 육신의 결정체, 아니 법신의 상징, 더나가 불교의 상징으로 발전되었다. 인도의 초기 탑은 원래 8군데였다. 사리분쟁이라는 말도 나왔다. 아쇼카 왕은 8만4천 곳으로 확대하여 스투파를 건립했다. 인도에서 8만4천이란 숫자는 물론 많다는 의미의 상징어다.

아쇼카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스투파를 인도 전역에 세워야 했을까. 그는 불교를 숭상했지만 통치정책 일환으로 불교를, 그것도 불탑 건립을 활용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이는 불탑신앙의 본격적 출발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도 전국에 불교의 교세가 안착되었다는 반증이다. 이제 탑은 불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탑은 신앙의 주요 대상으로 부상되었다.

“스투파는 정교한 의식에 따라 방위가 설정되었고, 전체와 각 부분의 크기도 정확한 비례 체계에 따라 설계되었다. 이 때문에 스투파는 피라미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학적으로 완벽한 비례를 갖춘 건축적 형태와 매스(mass)를 갖추게 되었다. 스투파의 부동성은 불사리 봉안이라는 그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자 고정된 우주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스투파와 거기에 달린 여러 가지 구조물들은 사리 봉안으로 서아시아의 우주관에서 발원한 정교한 상징적 의미들을 지니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처럼 스투파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건축적 형상화라고 할만하다.”- 벤자민 로울랜드의 〈인도미술사〉 中

스투파는 우주의 건축적 형상화라, 대단한 의미 부여이다. 이 이상 무슨 수식이 필요할까. 나는 이런 말을 가슴에 담고 산치로 갔다. 거기 인도 탑의 상징과 같은 산치대탑이 있다.

산치대탑은 아쇼카 시대의 대표적 산물이다. 기원전 1세기 작품이다. 압도적 규모의 거대함과 더불어 단순미의 극치를 자랑한다. 어디 가서 이렇듯 훌륭한 건축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존 인도 미술품 가운데 최절정의 수준에서 평가해야할 명품이 아닌가 여겨진다.

산치대탑의 구조는 단순하다. 원형 복발형태의 탑신과 정상부에 사각 형태와 수직의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발우를 엎어놓은 형태여서 복발(覆鉢)이라 불리는 것. 그렇다면 이는 ‘밥그릇’이 아닌가. 밥그릇은 생명 유지의 대표적 물건이다.

대탑을 멀리서 보면 꼭 아가씨의 젖가슴처럼 보이기도 한다. 좀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속인의 눈에는 그렇게도 보인다. 그것도 꼭지까지 있는 유방. 그건 그렇고 원래 인도에서는 이를 ‘알’ 또는 ‘자궁’이라고 불렀다. 유방과 같은 돔을 알 혹은 자궁이라고 불렀다는 사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밥그릇’과 ‘자궁’, 이 모든 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 아닌가. 고대사회의 상징 코드를 읽게 한다. 상륜부는 사각형 안에 기다란 찰주와 더불어 원형의 산개(傘蓋)로 이루어졌다. 상륜부는 바로 ‘세계의 중심 축’, 바로 수미산을 의미한다. 탑의 꼭대기를 장식한 일산(日傘)들, 이는 존엄의 표시이다. 아무튼 산치대탑은 구조적 안정감과 단순한 형태미 그리고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절묘하게 압축한 걸작이다.

산치대탑의 조형적 하이라이트는 동서남북 사방의 문에 새긴 부조이다. 다양한 소재와 사실적 묘사,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원조와 같다. 복발형의 단순한 탑신과 비교하여 석조 대문의 부조 작품은 보석과 같다. 본생담과 붓다의 일생 등 다양한 이야기의 형상화는 마치 야외 미술관과 같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조각공원이라는 사실인가.

세계 도처에서 몰려 온 나그네의 발길을 오래 묶어두는 곳은 특히 동문이다. 문 난간쯤에 아름다운 여체가 나무줄기를 잡고 매달려 있다. 속된 표현으로 풍만한 모습은 관능적일만큼 교태스럽다. 세상에 이런 여체상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늘씬한 몸에 까치발의 동세 표현, 게다가 성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고대 인도인은 어떻게 여체를 이렇듯 사실적으로, 그것도 육감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이 아가씨(?)의 이름은 약시, 힌두의 여신이다. 풍요의 여신. 바로 풍요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약시를 조각한 작가의 조형의지를 이해할만하다. 약시는 나무의 신부로 알려졌고, 곧 생명의 나무가 아닌가. 생명은 창조의 신과 연결된다. 나는 산치대탑에서, 한국과 같은 사찰이 아닌, 단순 스투파에서, 많은 상념에 빠져야 했다. 파격의 깨달음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2000년 전 인도인이 건네주는.

부조 가운데는 붓다의 모습을 새긴 곳이 있다. 아니다. 새기지 않았지만 새겼다. 바로 동양미술사에서 말하는 ‘무불상 시대’의 징표이다. 기원전후 1세기쯤에 이르러서야 불상 즉 깨달은 이의 존상을 본격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앞서 500년간은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지고지존(至高至尊)을 어떻게 형상화할까. 그것은 불경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산치대탑의 붓다 일생 이야기에 붓다의 실제 모습은 새기지 않았다. 빈 공간이거나 법륜, 보리수 같은 상징물로 대체했다.

보리수 아래의 비어 있는 불단, 그 아래에 경배를 올리고 있는 불제자들, 하지만 불단은 비어 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 상(相)의 있음과 없음의 같음, 이런 교훈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무불상시대의 여백은 울림을 크게 만들어 준다. 나는 산치대탑을 돌면서, 이 걸작 중의 걸작을 음미하면서, 지나온 발걸음을 생각했다.

초기의 불교교단은 무엇 때문에 붓다를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조선왕조시대의 왕실용 의궤도가 생각났다. 국가적 커다란 행사가 있으면 도화서 화원은 행사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간직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속 사진사 역할이다.

의궤도 속 행사장면의 중심에 임금 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주인공인 임금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냥 용상 정도만 표현되어 있지 막상 그 의자에 앉은 임금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냥 비어 있는 공간이다. 지극존엄의 존재는 감히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조선왕조 기록화 속의 군왕 그리지 않기, 이 광경과 무불상시대의 인도 부조가 겹쳐졌다. 하기야 길을 길이라고 부르면 길이 아니라고 했다. 붓다도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일렀다. 붓다의 모습이 새겨져 있건 아니건, 이 또한 무슨 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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