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암에는 전설에서나 나올법한 우렁각시가 살고 있다. 우렁각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 도움의 일을 해주는 어떤 존재를 이르는 말’로 되어있다.

참앎·봄 이뤄야 진정한 선지식
오늘의 삶은 또 하나의 기적


그런데 사자암의 우렁각시는 밤사이 마당도 쓸어주고 끼니때마다 밥도 지어주는 부지런한 우렁각시다. 마당을 쓸어주는 우렁각시 이름은 세찬 바람이고 밥을 지어 주는 우렁각시는 쿠쿠 압력밥솥이다.

사자암에는 대중이 많이 모여 사는데 도반이자 스승이요, 착한 이웃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진돗개이자 고양이들이다.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서 햇살을 품에 담으며 꾸벅꾸벅 졸 때에도 곁에서 함께 조는 도반이며 사료를 잔뜩 그릇에 담아주어도 먹이 조절을 보여주는 스승이기 때문이다.

사자암의 숲이며 바위며 고목나무에 이르기까지 숲 사이로 날아다니는 산새며 들꽃에 이르기까지 가끔씩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 남는가를 내게 되물으며 무언(無言)의 설법을 들려주고 있다.

인도에 머물 때 종교적인 아름다운 체험을 한 후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다는 울림이 생명과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어도 여럿과 함께 있음이요, 여럿과 함께 하면서도 혼자만의 여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비우고 버리고 덜게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홀가분하게 비어 있음의 충만을 즐기고 있다.

꾸미고 덧칠하며 드러냄 없이, 속이고 감추며 모아둠 없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집착 없이 사는 삶이 평화로웠다. 고맙고 감사하며 미안해 얼굴 붉힐 줄 알지만 아닌 것은 끝가지 아닌 것으로 마무리 한다.

따르는 자가 줄어들고 사찰 경제가 땅바닥을 기고 있어도 방편을 앞세운 타협이나 구걸행위 비슷한 목탁 울림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대접받는 불교, 예우 받는 스님에서 서너 걸음 내려와 상대가 누구이던 맞절 문화로 평등성을 키워오지만 기관장들에겐 이유있는 매서운 회초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섬이던 오지이던 강의 요청이 있을 경우 마다하지 않으며, 한 차례이든 열 차례이든 강의비를 받지 않고 개운하게 법보시를 실천한다.

가끔씩 찾아와 법거량하는 구도자들이 부처님처럼 반갑고 끝장 토론장에서 진리의 세계에 대해 대화 나눌 때가 금싸라기처럼 소중하다. 가끔씩 지리산에 흩어져 사는 도반 스님들이 찾아오거나 찾아가 담소 나누는 일이 즐겁고 나들이 떠나는 설렘에 행복하다.

작년에도 지리산의 산신령인 도반 스님 한 분이 떠나갔지만, 떠날 준비로 비에 젖은 흙 담장처럼 스멀스멀 무너져 내리는 도반 스님들의 건강이 짠한 아픔으로 다가 온다. 머지않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훅, 불어 꺼져버리는 호롱불처럼 그저 그렇게 사라지면 좋으련만 향봉의 건강에도 이곳저곳에서 이상음이 들려오고 있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생명의 마감일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극히 당연한 징조들이 가슴을 싸하게 짓누르며 두어 방울의 눈물로 남는다.

글쎄 돌이켜보면 남는 것은 빈 손, 추억의 줄기뿐이지만 오늘의 삶이 그대로 또 하나의 기적이자 전설처럼 느껴진다. 인도와 네팔, 티베트에서 노숙자처럼 생활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차례 부활하는 일도 겪게 되지만 인도에서의 아름다운 체험, 깨달음의 기쁨은 향봉의 삶에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빛의 충만을 의미한다.

참 앎(知)과 참 봄(見)을 이루어야 진정한 의미의 선지식이며 누가 무엇을 물어도 막힘과 걸림이 없는, 좋은 스승, 착한 벗이 되는 것이다. 속이지도 속지도 않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사람은 모으고 챙기고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무엇을 물어도 머뭇거리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이름 석자 알리는 일에 집착하고 신도와 재산을 모으려하며 명예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는 조작된 선지식이요, 업덩이 중생일 따름이다.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속물근성에서 생각의 윤회를 거듭하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자, 창밖으로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머잖아 꽃피고 새가 노래하는 따스한 봄이 찾아오겠지만 앞으로 몇 차례나 싸락눈을 지켜볼지, 봄 마중의 꽃 나들이를 떠나게 될지 해질녘의 향봉에게 되묻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길고 짧은 것만 다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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