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의 작용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삼계는 각자 근기에 따른 업보의 세계이고, 분별망념의 세계이므로 허깨비 같은 세계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허깨비를 위한 법문이기 때문에 팔만사천 방편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진리의 법을 말한 바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으로 내가 말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말한다는 것은, 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름이 설법이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법이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닌 ‘진공’이고, ‘이름이 설법이다’는 없는 것도 아닌 묘유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금강(金剛)은 금강석으로 다이아몬드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금속물질 중에 가장 강한 면과 희소성에 그 가치가 있겠지만, 다이아몬드 본체에는 아무런 색깔을 띄고 있지 않아서, 파란색의 대상을 만나면 파랗게 되고 노란색의 대상을 만나면 노랗게 되어, 자신의 고정된 색을 띄고 있는 다른 보석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 자체 만으로는 마음일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대상과 관계 지워질 때에만 마음일 수 있으며, 대상 또한 그 자체 만으로는 대상일 수 없으며 대상과 관계 지워질 때에만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대상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다이아몬드의 금강을 마니주(摩尼珠)라고 하며, 선문(禪門)에서는 심성(心性)의 비유어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금강은 우리들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이 동요 중에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노래가 있는데,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여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의 눈과 그 눈에 가득히 비친 파란빛과 하얀빛, 산과 들, 나무와 집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으면 있는 것이 아닌 진공이 마음입니다. 파란빛과 하얀빛, 산과 들, 나무와 집이 밝고 뚜렷하여 없는 것도 아닌 묘한 작용이 마음입니다.

반야(般若)는, 공(空) 또는 지혜를 이르며 지식과 구별됩니다. 지혜는 우주와 인생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고, 지식은 반복된 습관으로 있음과 없음과 같은 모든 분별을 구하는 망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과 극히 미세하게 아는 두 가지 어리석음을 끊으신 것입니다.

마음이 본체이고 지혜는 작용이며, 우주는 본체이고 우주의 일체 존재는 작용이며, 낱낱의 존재가 우주이고 우주가 낱낱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본체가 작용이고 작용이 본체로, 체와 용이 둘이 아니고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을 구하는 지식은 체와 용을 둘로 나누고, 낱낱의 존재와 우주가 서로 다르다고 하며, 우주와 티끌을 둘로 보고 있습니다.

우주의 진실과 작용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다만 부작용을 일으킨 우리들이 그 부작용의 과보로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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