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거를 자기 주처에 맡겨 놓을 때는 자동적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한 항아리 속에서, 이 항아리가 버스라면 그 버스가 어디를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종파를 나누고, 또 모든 한 생명, 그 마음 법, 움죽거리는 그 모든 것이 공생, 공용, 공체, 공식 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너 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불평 불만 이런 것을 조성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한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한의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어디 가나 항상 그 상황에 따라서, 거기의 환경에 따라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아량과 지혜를 가지고 한마음으로써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이란 값싼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이지 요새 사랑이라는 그 말 자체가 아주 난만해지고 있고 그것은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랑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생활 속에서 사람부터 되라고요. 그것은 무엇이냐. 한 가정에서 살아가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화목지 못하고, 대화가 없고, 자기 나름대로 사는 것은 바쁜 시대도 시대거니와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하게 행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우리는 50%의 보이는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50% 안 보이는 무의 세상도 있습니다.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가 100% 계합이 돼서 같이 합일한다면 우리는 정말 진짜 인간으로서 아마 자유인이 돼서 자유스럽게 활보할 겁니다. 또 한 가지 말을 하자면 의학적으로도 우리 두뇌는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재해 있는 의식 쪽을 한 번도 음미해 보지 않고 생각해 볼 여유도 두지 않고, 현재의식 쪽으로만 살다가 거기에서 급급하게 오고 가면서 결국은 거기에서 타파를 하고 거기에서 자기 소견으로 그대로 그냥 결정을 지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남을 이해하려고 생각도 안 하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견으로써 살지 말고 지견으로 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견 말입니다.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남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로 내 아픔과 같고 내 자리와 같고 내 몸과 같다면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편안하게 된다면 나도 편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를 가지고 ‘주여!’ 할 때, ‘하느님!’ 할 때, ‘부처님!’ 할 때 이런 때도, 때에 따라서 내 한 가정의 자식들과 부모를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 여러분 마음이 편안하자고 하는 것이지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첫째, 기도드리는 사람 마음이 괴롭고 볼 수가 없으니까, 가슴이 아프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아픈 마음과 같이, 진짜 사대 성인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성모마리아든 또는 알라신교든 가톨릭교든 기독교든 막론해 놓고 여러분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그 마음, 그 마음 자체가 바로 종교입니다. 그리고 불(佛)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했고 말씀을 교(敎)라고 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풀 한 포기도 종교 아닌 게 없고, 풀 한 포기도 생명 없는 게 없기 때문에 불교가 아닌 것이 없고, 우리는 불교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나의 ‘내 님’이 없는 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님’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 마음속의 내 님이신 것입니다.

나를 먼저 알아야 남을 알 수가 있고,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태초요, 이 세상에 움죽거리는 것이 화두고 그것으로 인해서 모두가, 상대성 원리가 생기고 세계가 생기고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모두 내 가정에서부터, 나부터 알아야 되고 주처가 나한테 있다는 걸 알고 믿어야 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허무한 게 아닙니다. 이 색신도 없다면 보이지 않으니 무효입니다.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니 무효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의 근본만 있다면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또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구성돼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니 모두가 이것은 공했다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이 제일 나중에 나왔습니다. 왠가? 미생물에서부터 쫓기고 쫓으면서 경험하면서 진화돼서 인간까지 이렇게 출현이 됐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끌고 오고 지금도 끌고 가는 자기 운전수를 믿지 못하고, 그 운전수로 인해서 기름을 넣고 또는 그 차를 끌고 다니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자기 차도 되고 오븐도 됩니다. 불교에서는 시자도 되고, 예수교에서는 종도 됩니다. 심부름꾼이죠. 그런데도 자기가 자기라는 거죠. 자기 없는 자기가 진짜 자기겠죠. 그렇기 때문에 주처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그렇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불교라고 그런 게 따로 있고 기독교라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마음이 없고는 모든 종교도 없고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이죠. 모두가 한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활을 심성과학이라고 해도 되고 심성천체물리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왠 줄 아십니까? 어떠한 물질이라도 지수화풍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컵도 지수화풍이 아니고는 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흙과 물을 개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구워서 여기 이렇게 컵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컵이라고 출현을 했는데 컵이라고 출현을 했기 때문에 여기 물이 담긴 거죠. 또는 커피도 담길 수 있고요, 여러 가지 담길 수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지견으로 쓴다면 바다도 될 것이요, 또는 접시도 될 것이요, 사발도 될 것입니다. 용도에 따라서 모든 마음을 그렇게 넓게 낼 수가 있는 그런 그릇이 된다면, 여러분은 나누고 쪼개고 네가 그르니 내가 옳으니, 이게 정법이니 사법이니, 이게 귀신이니 이게 선신이니 하고 싸우진 않을 겁니다. 이 마음으로 마음이 싸울 때 남하고도 싸울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기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종교인들은, 종교인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전부 세상 살아나가는 이 생활이 그대로 종교며 그대로 진리며 그대로 법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탈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우리가 이탈할 수 없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짤막하게 한마디 해 드리죠.

우리는 무한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한의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소크라테스도 너부터 알라고 했습니다.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라. 아리스토텔레스도 말입니다, 어떠한 병이라도, 옮기는 병이라도 들어가서 다 고쳐서 살렸습니다. 그건 물질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리 약을 써도 되지 않는 그런 병 증세도 한생각이면 그렇게 건졌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여러분이 여러분 몸뚱이 하나 끌고 가지 못한대서야 어찌 이 세상에 났다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종교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아프면 여러분이 의사가 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여러분이 괴로우면 그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하나의 마음 속에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나툰다. 성모마리아를 구하면 성모마리아로 응해 주시고, ‘주여!’ 한다면 예수로 응해 주시고, 부처님 찾는 사람에겐 부처님으로 응해 주시고, 산신을 찾는 사람에겐 산신으로 응해 주고, 약사를 원한다면 약사로 응해 주고 천차만별로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털구멍을 통해서 우리네 마음속에, 이 몸속에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 생명의 의식 자체는 인으로 인해서 과가 돼서 같이 선업 악업이 뭉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도 하나의 혹성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넓게 쓰면, 이 지배인이 넓게 쓰면 직원들도 넓게 쓸 거고 지배인이 좁게 쓰면 직원들도 좁게 쓸 겁니다. 그러니 내 한마음에 달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한번 실험을 해 보세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실험을 해 보지 않고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두지 않는다면 항상 노예로서 맹종하면서 목탁이나 치고 밥이나 내려 먹고 남이 가져오는 땀방울을 가지고 이리저리 편안하게 살려고 노력할 겁니다. 뼈다귀까지 우려먹으면서,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주여!’ 하면서도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내 영혼을 구원받으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 나도 그런 생활을 해 봤거든요. 왜? 내가 잘못한 거는 내 양심이 더 잘 알아. 내가 알기 때문에 이 세포 하나하나가, 의식 하나하나가 다 잘 알아. 그렇기 때문에 우주간 법계에서도 알아. 왜? 우주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거든. 모두가 생활하는 것은 전부 가설이 돼 있는 거거든. 이러니 여러분이 한 치라도 속일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거짓을 하고 살겠습니까, 자기가 아는 것을.

이 도리를 만약에 아시려고 든다면 이런 이론 하나가 아니라 진실을, 우리 생활 속에서 진실을 좀 들으셔야 합니다. 물질이 전부 지수화풍입니다.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이 전력도 끌어 쓰고 모두 쓰죠. 여기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이나 통신력이나 공기를 우리가 가지고 감사한 줄도 모르고 그냥 지금 쓰고 있습니다. 이래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주처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님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그 법신도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부처도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게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에요. 이것이 삼위일체로 같이 돌아가는 것이 주인공입니다. 공했다 이거야. 어떤 것을 나라고 할 수 없으니 공했다. “모두가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하신 말씀과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던 모든 게 그렇습니다. 이게 마음 내는 것도 생명이 있어야 내죠, 네? 영원한 주처는 자기한테 있습니다. 주처가 있으니까 생각을 낼 수 있는 거죠. 그게 법이에요. 우리가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로 다 돌아갈 수 있는 거, 그리고 기독교니 불교니 다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소견으로써 가르고 가르고…. 또 한 가지 얘기할까요? 우리 이 지구가 지금 (컵을 짚으시며) 이거 하나라면 여기에 다 타고 지금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생명체들은 지금 여러분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래서 이 몸을 벗어나야 하며 지구를 벗어나야 하며,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면 이거를 굴릴 수가 없고 내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내 몸을 가지고 마음대로 굴릴 수가 없다는 얘기죠.

예를 들어서 아주 구태의연한 얘기지만 맷돌을 굴리는 데 심봉이 아래 위 꿰어지지 않는다면 절대로 맷돌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기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라도 작업을 하시려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시고 마음을 넓게 지견으로 쓰시면서 생활 속에서도 모든 것을 용광로에다가, 내 가슴속의 용광로에다가 놓는 작업을 하셔야 합니다. 제일 최초에 용광로에다가 작업을 하는데 모든 것은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주처에서 나온 거니까 ‘주처에서 다 알아서, 거기서밖엔 해결할 수 없다’ 하고 거기다가 일임하고 놨을 때, 그 작업만 한다면 그 쇠는 저절로 생산이 돼서 나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출현하죠. 그런데 내가 그것 걱정까지 하는 거예요. 요것만, 그저 용광로에 놓는 것만 놨으면 좋겠는데 저기 생산돼 나가는 것까지 걱정을 하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여러분이 걱정을 많이 하고 사시는지, 나는 기가 막히죠. 또 그거는 제쳐 놔 두고요, 그렇다 합시다. 우리가 그러면 이런 말로 할까요? 미국이니 말입니다.

이 불가에서는 오신통이 있다고 합니다. 오신통은 뭘 가지고 말하느냐. 지금 여기 시쳇말로 합시다, 그럼.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자력이나 통신력, 광력 이 모두가 여기에 대두돼 있다고 했죠. 그런데 그게 대두돼 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큰 모든 세상에, 우주 전체에 입력이 될 수 있는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돼 있다 이 얘깁니다. 여러분은 지구의 주인이에요. 그러니 그것이 자동적으로 돼 있는가 하면 거기에 그 모두가 붙어 돌아갑니다. 팩스가 붙어 있는 것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육신통이라고 합니다. 컴퓨터는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 지금 말로 한다면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천이통이라는 건 무얼 가지고 말하느냐. 이것은 바로 천체무전통신기를 말하죠. 그리고 또 천안통이라는 것은 천체망원경을 말하죠. 그런데 이거는 그냥 육안으로 보는 망원경이 아닙니다. 이거는 심안으로 보는 망원경이죠. 천체 보고 탐험을 할 수 있는, 빛보다도 더 빠른 그러한 탐험을 할 수 있는 거죠. 여러분한테 그러한 모든 시스템이 다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될 겁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 나와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를 듣지도 못할 겁니다. 종교인이라고 어떻게 말을 합니까. 예?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의 도리와 인간의 그 무한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리가 몰라야 합니까. 모르라고 써 붙이기라도 했나요? 그러나 사람은 벌써 물질적으로 욕심이 많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거 이것 때문에 가리지 않는 겁니다. 가리지 않고 한번 여유 있게 50%의 무의 세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한 번도 갖질 않아요. 진짜로 사랑하려면 그런 거를 알아야 진짜로 사랑할 수 있고 진짜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는데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위로는 길러 주시고 낳아 주시고 가르쳐 주신 조상들의 묵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영원토록 끄달림이 없이 돌아가면서 그 새 자루의 새 뿌리를 도와서 촉촉하게 해서 가지와 이파리가 싱싱하도록 영원히 도와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텐데 잠시 잠깐 쉬었다 가는 길에 그렇게 우리가 여유 있게 좀 살아 볼 수는 없는지요.

우리 인간은 한 철입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죠. 그러면 그 낙엽을 딛고 가면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 인간의 몸뚱이도 가을이 되면 이렇게 낙엽과 같은 것을…. 그렇다고 해서 그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하면서 ‘그 가지는 발발 떨면서 추운 겨울을 나면서도 인내 있게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리건만 인간은 여유가 없이 방방 뛰고, 춥다고 방방 뛰다가 그냥 병이 들고 더 쉽사리 가게 되고,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나.’ 그러면서 나도 한 점의 눈물이 가슴속에서 흐르곤 하죠.

제가 이 승복을 입은 거,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이거는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닌 그 자체 속에서 그대로 인간은 여여한 것이니라. 그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이니라. 목마르면 냉장고 문 열고 그냥 마시는 것이지 이유가 거기 붙지 않느니라.” 한 겁니다, 이게. 이 표상입니다. 이유가 붙지 않는,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니라. 이것은 악도 아니요 선도 아닌 그 가운데에서 너는 자유스럽게, 자유스럽게 네 마음 내는 대로 이루어지느니라. 이것은 ‘생활이 그대로 과학이니라’ 하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한번 실험도 안 해 보고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해. 나는 종이기 때문에 못해. 나는 하느님이 될 수 없어.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어.’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나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나도 아홉 살부터 부모를 두고도 그렇게 혼자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마는 그렇게 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오면서도 왜 내가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내가 고독하기 때문에 아빠를 내 가슴속에서 붙들고 나갔고 아빠라고 가슴속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를 믿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믿을 게 없으니까요. 나는 내 마음속에서 내 아빠를 부르짖고 찾았을 뿐이지, 엎드러져도 ‘아빠!’ 또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서 쓰러져도 ‘아빠!’ ‘죽는 것 사는 것도 당신밖엔 없어.’ 하고 아빠라는 그 이름 하나로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랑이다 뭐다 하고 바깥으로만 끄달렸지 남의 아픔을 몰라. 또 도와준다 도와준다 하고 물질로만 도와주는 것은 큰 게 아니야.

옛날에 어떤 중이 바리때를 들고 공양을 얻어먹으러 나가니까 어느 집에서 뜨물 한 그릇을 폭폭 끓여서 식구가 다 먹고 한 그릇을 남겨 놨더랍니다. 스님이 오시면 드리려고요. 그래서 그거 한 그릇을 얻어먹고 어떻게나 불쌍했던지 지게를 지고 가서 나무 한 짐을 잔뜩 해 가지고는 내려오다 보니까 자기 은사가 거기 있으면서 “그건 뭘 하려고 그렇게 나무 한 짐을 꼬박꼬박 지고 내려가느냐?” 하고 묻더랍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바리때를 들고 공양을 얻으러 가니까 이렇게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어서 나무라도 한 짐 해다 주려고 이렇게 해 옵니다.” 하니까 그 지겟작대기를 뺏어 가지곤 그냥 다리를 몹시 때리면서 “이놈아! 사랑이라는 거, 자비라는 건 그런 게 사랑, 자비가 아니니라. 그리고 그런 것을 도와준다고 하느냐. 그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니라.” 하고서 작대기로 한층 치더랍니다. 그러니까 나뭇짐째 사람째 그냥 디글디글 굴러서 딱 떨어지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무릎을 만지면서 한번 생각했답니다. ‘옳지! 이 나뭇짐은 한 짐 져다 주면 때 버리면 그뿐인 것을 내가 참 생각을 잘못했구나.’ 하고선 그때서야 그렇게 아픈데도 “스님!” 하고 소릴 지르면서 주먹을 벌컥 내밀면서 “스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울더랍니다. 그 우는 소리가 우주 법계에 두루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해부터 마름을 얻게 됐고 좋은 귀인이 모두 나서서 그 집이 그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자가 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사람은 부자가 됐어도 가난한 사람을, 지금으로 치면 그 동네 일판뿐만 아니라 어디고 가는 대로 그걸 가지고 도와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 얘기한 거 있죠. 오신통이라는 것은 모든 게 시스템이 돼 있으니까 내가 한번 생각할 때, 예를 들어서 모든 거를 자기 주처에 맡겨 놓을 때는 자동적입니다. 왜냐? 이 숙명통이라는 것은 컴퓨터와 같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바로 거기에 입력이 다 돼 있는 것입니다. 입력이 돼 있어서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입력이 돼 있으니까 그대로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여러분은 “왜 나는 나쁜 짓도 안 했는데 내 팔자가 이래? 운명이 이래?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돼?” 이런 한탄 하실 일 없어요. 왜? 자기가 만들어 놓은 거니까. 그래서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려라. 남을 원망하기 이전에 자기 탓으로 돌려라.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한테 맡겨 놓고, ‘거기서 잘못된 거니까 거기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하고 믿을 때에 비로소 지금 현재에 입력이 들어가니까 앞서 입력이 없어진다 이 소리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생활이 과학적이면서도 그렇게 광대무변한 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모든 게…. 한생각이 빛보다 더 빨라. 여러분, 여기 앉아 계시면서 다른 데 좀 가 보십시오. 집 좀 가 보십시오. 갔다 오실 수 있겠죠? 마음이라는 건 내놓을 수 없으면서도 그렇게 무한의 능력을 가졌다고요. 체가 없는 마음은 어디라도 이 지구 바깥의 꼭대기, 우주까지도 탐험할 수가 있다고요. 여러분 집에 지금 가서 어디 뭐가 놓이고 뭐가 놓였다 하는 거를 한번 보고 와 보세요. 그와 같은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값싼 게 아닙니다. 여러분한테는 아주 보배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0년 4월 24일 샌프란시스코 미야코호텔 초청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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