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 스님의 깨달음 찾는 〈금강경〉

무념의 법
153억 년 전 하나의 티끌이 폭발하여 이루어진 우주는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으니 있다고 하는 것이지, 지금 보고 있지 않으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보는 것과 안 보는 것과는 무관하게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보존의 법칙에서 나무 한 토막을 불에 태웠을 때, 나무토막이 타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모양만 열로 바뀐 것입니다. 나무토막이 열이고, 열이 나무토막이며, 나무토막과 열이 에너지이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 좋아하고 싫어하는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된 모양이고 참된 마음입니다.

언어와 문자로 전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진공의 마음자리를 부처님께서는 삼처(三處)에서 전하셨고, 역대 조사들도 오직 이 마음자리를 비유(比喩)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1,700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이 화두 가운데 공부인들에게 널리 실참 되는 것이 ‘이뭣고’와 무자(無字) 화두입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육조 혜능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혜능 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데서 왔느냐?” “숭산에서 왔습니다.”

혜능 선사가 또 물었습니다. “시십마(是什?), 습마물(什?物)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이렇게 온 물건이 무엇이냐?”

이에 대답을 못한 남악 회양 선사는 8년 동안 부단한 수행을 거친 뒤 혜능 선사에게 말했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닦고 증득할 것이 있는가?”
“닦고 증득할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오염할 수는 없습니다.”

혜능 선사의 이뭣고는, 한 생각 일으키지 않아서 있는 것이 아닌 진공의 이 마음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이 마음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기 때문에 또한 오염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한 물건도 있을 수 없는 청정한 진공 가운데서 없는 것도 아닌 항하사와 같은 묘용이 있습니다. 그래고 “닦고 증득할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라고 회양 선사가 대답한 것입니다. 석두 선사에게 도착한 오예 스님은 큰 절을 올리고 선사의 곁에 섰습니다. 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강서에서 왔습니다” “공부는 어디에서 했는가?”

순간 오예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옷깃을 뿌리며 돌아섰습니다. 법당 문을 막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여보게!”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몸을 돌리자 석두 선사가 손바닥을 세워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오예 스님은 순간 크게 깨달았습니다.

석두 선사의 ‘이뭣고’는, 선사의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분별의 생각이 끊어진 진공의 마음자리를 안 것입니다. 오예 스님은 순간 일체가 구족하여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이 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과 조사 스님들의 천칠백 공안은 이 마음자리를 가리키고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 그리고 생각으로는 이 마음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어와 문자는 생각으로, 생각은 언어와 문자로 서로 대상으로 인하여 있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오직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끊어진 무념(無念)이 되어야 합니다.

무념이란, 삿된 생각이 없음이요 바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삿된 생각은 있음과 없음, 좋아함과 싫어함, 선과 악, 생과 사 등 분별의 이분법을 생각하는 것이 삿된 생각이고, 바른 생각은 이와 같은 삿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