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연종 제13조 인광대사(印光大師)

 

“현생에 틀림없이 생사고를 벗어날 수 있고, 아승지겁의 수행을 거치지 않고도 친히 법신(法身)을 증득할 수 있으니, 이 정토법문은 여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법문이며, 실로 일체중생이 닦아 지니는 모든 행법 가운데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긴요한 도문(道門)이다. 왜냐하면 정토법문은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 인광대사 법어록


염불법문 수행법 체계화
양계초, ‘문자삼매’로 칭송
정토종 제 1도량 창건하고
13대 조사로 추존되다

견성해도 업습 제거해야 윤회 벗어나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는 정토법문의 이익과 수행자가 전적으로 자력에만 의지하는 일반적인 법문의 이익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중생이라도 십념(十念)의 지극한 염불로 윤회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인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고, 이미 등각(等覺) 보살의 경지에 오른 성인도 10가지 큰 행원(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을 극락정토로 회향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참선과 정토는 근본 이치 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윤회를 벗어날 확률은 참선이 염불을 따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참선은 확철대오 하고 보림(保任)을 잘 하여 완전히 증득하지 않으면 생사윤회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종과 교종의 이론과 실참에 두루 통달하고 염불삼매를 증득해 대세지 보살의 화신으로까지 존중 받은 인광(印光: 1861~1940) 대사는 견성(見性)한 도인들조차 윤회를 벗어나기 어려운 수행 현실을 지적하며, 자력(自力)과 더불어 불력(佛力)이 하나된 정토수행을 널리 권장하였다.

염불인은 신·원·행만 갖춰도 윤회 벗어나
인광 대사는 참선인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으며,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예로 부터 확철대오 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인광대사 법어록
 
인광 대사는 이는 오직 자력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으로 보았다. 반면, 정토수행은 ‘아미타불과 정토에 대한 믿음(信)과 왕생 발원(願), 염불행(行)’의 3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인 보처(補處) 보살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증득하여 다시는 육도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단, 중생구제를 위한 원력소생은 제외)

정토수행 체계화·대중화에 기여한 ‘문자삼매’
청말 민국 초기에 중국이 극도로 혼란하고 불법이 극심하게 쇠퇴한 상황에서, 인광 대사는 얕고 낮은 가르침이라고 깔보던 염불법문을 이처럼 선(禪)과 쌍벽을 이루는 심오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이고 대중적인 수행법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덕으로 훗날 정토종(蓮宗) 제13대 조사로 추존된 대사는 평생 출가 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고, 재가 신도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는데, 한결같이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일단 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했다.

대사의 법문은 양계초(梁啓超)가 ‘문자삼매(文字三昧)’로 칭송할 정도로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되었다. 선종과 정토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용서거사 ‘정토문’ 보고 염불에 귀의
중화민국 29년(1862년)에 태어난 스님은 중국 섬서성 합양(?陽) 사람이며, 속성은 조씨(趙氏), 이름은 성량(聖量), 자는 인광(印光), 별호는 상참괴승(常?愧僧: 항상 부끄러운 중)이다.

젊은 시절, 유학을 공부하면서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여 불교를 배척하다가 눈이 실명되자, 곧 철저히 반성하며 불전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참회하고 기도하는 지극 정성으로 눈병이 치유되는 가피를 입었다.
21세에 종남산에 들어가 연화동사(蓮華洞寺)의 도순(道純) 장로에게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고, 1882년 호북성의 죽계 연화사(竹溪 蓮華寺)에 머물다가 오래지 않아 섬서성 흥안 쌍계사(興安 雙溪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용서 거사(龍舒居士)가 지은 정토문(淨土文)을 보고는 생사를 해탈하여 속히 불도를 성취하려면 염불법 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알고부터 항상 염불을 했다. 26세에 정토도량인 홍라산 자복사(資福寺)에 들어가 정토수행을 하면서 경전을 보시고는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6년 간의 용맹정진으로 염불삼매 증득
그 후 다시 법우사라는 절에 가 6년간 문을 닫고 불철주야 염불을 하여 마침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크게 증득하였다. 염불을 한결같이 지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마음과 부처님의 명호가 서로 합치되어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염불삼매이다.

인광 대사는 그의 문집에서 염불삼매를 얻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일러주고 있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만 갖추었으면, 반드시 뜻과 마음을 다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의 성호를 붙잡아 지켜야 하오.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옷 입거나 똥오줌을 싸거나, 어느 때건 이 성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오. 그래서 반드시 온 마음이 부처이고 모든 부처가 곧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도록 해야(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하오. 만약 염불이 지극해지고 감정이 잊혀지면, 마음이 텅 비면서 부처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현생에 염불삼매를 몸소 증득하고, 임종에 가서는 극락정토의 상상품(上上品)의 연화에 왕생하게 될 것이오. 이것이 염불수행의 지극한 경지라오.” -인광 대사 가언록

이렇게 하여 생전에 염불삼매를 증득하면, 이 업보의 몸뚱이가 다할 때 곧바로 극락의 상품연화에 오르기를 발원해야 한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대사(大事)로 삼지만 정토종에서는 일단 윤회를 벗어나 서방정토에 왕생(往生)하는 것을 일대사로 삼는다. 깨달음을 얻고도 왕생하지 못하는 사람은 100명 가운데 90명이나 되지만, 왕생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만명 중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문서포교로 ‘상참괴승(常?愧僧)’ 별호 알려져
인광 대사는 염불삼매를 증득한 뒤 중생을 교화하리란 원(願)을 세우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토법문을 설해, 스님의 인연으로 염불하는 자가 무려 이십만 명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사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불학총보(佛學叢報)〉에 기고하면서부터다. 이때 ‘상참괴승(常?愧僧)’이라고 서명하였는데, 그 이름이 중국 전역에 널리 퍼졌다. 대사는 평생 정토를 널리 선양하면서 주지직을 맡지 않고 권속을 두지 않고 대좌(大座)에 오르지 않는 3대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러면서 명리에 담박하고 철저한 근검으로 항상 사람들에게 진실한 수행만을 가르쳤다.

세수 70에도 오현 보은사(吳縣 報恩寺)에서 문을 닫고 정진하다가 그 후에 비로소 대중법문을 펼쳤다. 아울러 보타·청량·아미·구화산 4대 명산지(名山誌)를 편찬하고, 오현에 영암산사(靈岩山寺)를 건립하여 진달(眞達) 화상으로 하여금 그 직무를 맡게 하니, 그로부터 정토종의 제1 도량이 되었다.

왕생 후 사리 1000여 과 나와 신심 일으켜
대사는 1940년 11월 4일, 세수 80에 묘진(妙眞) 스님에게 영암산사 주지직을 맡기며 정토법문의 선양을 당부한 후, 물을 가져오라 하여 세수하고는 앉아서 염불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문득 일어나며, “아미타부처님께서 왕림하셨다”며 대중에게 염불하라 이르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염불하며 왕생극락했다. 다비한 후에는 무려 1000여 과(顆)에 달하는 오색 사리의 꽃과 구슬이 나와 염불에 대한 신심을 더욱 크게 자아냈다.

대사는 일생 동안 청정한 계행과 염불과 선(禪)을 아우르는 고준한 법문을 했다. 이에 감화를 받은 이가 많아서, 민국 이래로 정토종의 제1 존숙(尊宿)으로 추앙됐다. 인광 대사의 문초(文?)와 전집(全集)이 세상에 널리 전해져 중화권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역서가 출간된 상태다.

수십년 이상 선방에서 화두를 들었건만, 한 발짝도 진보가 없는 이들은 필히 인광 대사의 법문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오탁악세의 시대흐름에 법등은 날로 희미해지고 선지식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수행자가 왜 성도문(聖道門: 자력수행)이 아닌 이행문(易行門: 불력수행)을 선택해야 하는지, 인광 대사는 수많은 편지설법을 통해 오늘도 후학들을 일깨우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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