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묘적암에서 대승사 가는 길

진평왕 때 하늘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불암.
1341년, 한 청년이 출가한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부처도 생로병사의 의문을 풀기 위해 출가했다. ‘혜근’이라는 이름을 얻어 고려 땅에 태어난 청년도 그런 이유로 출가했다. 혜근은 머리를 깎기로 작정했다. 스님이 되어 본격적으로 죽음을 탐구하러 떠날 요량이었다. 혜근은 고향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를 떠났다.

하늘서 떨어진 바위 ‘사불암’
인근 사찰 건립의 기원돼
나옹 선사 발자취 따라 탐방

언덕길 끝, 대승사 초입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열었다. 그리고는 위성지도를 펼쳐 혜근이 21살 때 스님이 되려고 찾아간 사불산 묘적암(妙寂庵)을 내려다 보았다. 묘적암은 대승사 가는 길과 Y자로 갈라진 길에 있었다. 묘적암으로 가는 길에 윤필암이 있었다. 윤필암까지는 대형버스도 다닐 만큼 길이 넓었지만, 묘적암 가는 길은 그 절반으로 폭이 줄었다.

묘적암 앞에 이르자 ‘초하루나 보름 외에는 외부인사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쓴 팻말이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내가 외부인사인지 내부인사인지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나옹 선사는 죽음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묘적암을 찾았다.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덕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묘적암에 이르는 먼 길을 걸은 나옹 선사는 그때까지 외부인사였을까? 묘적암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내부인사가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궁금하게 여긴 죽음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세계였을까?

나는 반쯤 열린 문을 밀고 내부로 들어갔다. 죽음이 내부에 연결돼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당에 내려앉은 새하얀 햇빛이 외려 어둡고 축축했다. 암자에 아무도 없는지 이방인의 등장에도 기척이 없었다. 일묵여뢰(一默如雷. 침묵은 우뢰와 같다)란 현판 하나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불암에서 내려다 본 윤필암 전경. 윤필암에는 사불전이라는 전각이 있어 일대가 사불암과 연관된 영역임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 지역 산의 이름도 동서남북 각각 부처가 있다는 사불산이다.
그때였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인고?”

방문이 돌연 열리면서 어두운 안채에서 누가 물었다.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군요.”

내가 대답했다. 아니었다. 내가 짐짓 나옹 선사를 흉내 낸 것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앉아있는 사람은 700여 년 전의 요연 선사(了然禪師)였다.

암자 주인이 외출했다는 표시인지 묘적암 현판 아래 방문 고리에 밀짚모자가 걸려 있었다. 등을 돌려 공덕산, 혹은 사불산이라고도 부르는 앞산을 올려다보자 한눈에 사불암(四佛岩)이 들어왔다. 신라 진평왕 때, 하늘에서 붉은 비단에 싸여 내려왔다는 커다란 바위덩어리. 바위는 네모졌는데, 그 한 면마다 불상이 돋음새김으로 새겨졌다. 나옹과 요연선사는 앞마당에서 사불암을 올려다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묘적암을 나온 우리 발걸음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다. 우리의 목적지는 사불암이었다. 그곳에서 시산제를 지내기로 하고 묘적암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 시산제 제물이 든 배낭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직 2월인데도 불어오는 바람에 봄기운이 푸릇하게 묻어왔다.

다시 윤필암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마애석불여래좌상이 그런 우리를 보고 빙긋 웃었다. 고려 때 마애불로 보이는데 보존 상태가 좋았다.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불상을 새긴 바위가 앞으로 약간 기울어진 데다 얼굴 위에 갓바위가 달려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머리 양쪽에 연꽃이 도깨비 뿔처럼 돋아났는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상이었다.

윤필암은 의상 스님의 이복동생인 윤필이 머물렀대서 지은 이름이다. 윤필암에도 사불전이란 전각이 있어 사불암을 올려다보게 했다. 일대가 사불암과 연관된 영역임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셈이었다. 우리가 시산제를 지내러 이곳까지 내려온 까닭도 사불암에 깃든 신비와 영험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사불암을 거쳐 쌍연봉과 대승봉을 지나 옛고개 안부에서 대승사로 내려오는 것으로 순례 일정을 짰으나, 아무래도 그 중심은 사불암이었다.

윤필암에서 대승사로 건너가는 경계에 사불암으로 가는 화살표가 있었다. 아래서 올려다볼 땐 제법 멀었는데, 거기서 불과 30분 만에 사불암에 도착했다.

사불암을 올려다보는 윤필암 사불전
흔들바위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바위였다. 그 옆에, 바위를 뚫고 구불구불 자라난 몇 그루 소나무가 있어, 얼핏 도가적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사각형도 아니고 둥글지도 않은, 다소 뭉툭한 기둥처럼 생긴 바위가 더 큰 바위 위에 올라앉은 형상이었다. 도반들이 가까이 다가가면서 찬탄을 쏟아냈지만, 한 달 전 답사에서 이미 사면바위를 친견한 나는 그 뒷전에서 다소 여유롭게 서 있었다. 도반들이 이내 돗자리를 깔고 떡시루와 삼색나물, 과일을 내려놓았다. 시산제 상차림으로 부산스러운데 제주(祭主)인 나는 막상 사불암 생각에만 한눈을 팔았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라고 했다. 신라 진평왕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바위에 새겨진 사방여래불을 관찰했다. 왕은 곧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아 바위 곁에 절을 세우도록 하명하고 절 이름을 대승사라고 지었다. 왕은 또한 〈법화경〉을 외는 망명비구(亡名比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를 불러다 사면석불에 조석으로 공양을 올리고 향화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 그 스님이 죽어 장사를 지냈더니 무덤 위에 홀연히 연꽃이 피었다.

어디까지나 하늘에서 내려온 바위다. 바위에 새긴 불상도 하늘에 사는 누군가가 조각한 것이다. 땅 위에 사는 석공이 우연히 발견한 흔들바위에 불상을 새겨 넣었으리라 추측하면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

사불암을 기려 진평왕이 세운 대승사
학자들은 추측한다. 모두 불상으로 동쪽과 서쪽은 좌상, 남쪽과 북쪽은 입상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또 추측한다. 서쪽에 아마타불, 동쪽에 약사여래불,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인 사면불(四面佛)일 거라고.
그러나 내 눈엔 약사여래좌상이라는 동쪽 불상만 어렴풋할 뿐, 나머진 형체를 쉬이 알아보기 어려웠다. 새 같기도 하고, 거북이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라도 찾아내려고 바위를 계속해서 눈으로 더듬는데 어디선가 요연 선사와 나옹선사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인고?”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군요.”

바로 그때 아! 묘적암 스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진리의 바다를 보려면 무상과 무아를 알아야 한다. 무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부처님만의 설법이다.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거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고정된 실체가 없어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바로 그것! 그 순간, 내 앞에 서 있는 사불암이 거대한 모래기둥으로 변해 오뉴월 땡볕 아래 바스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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