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3월이다. 해빙의 계절이고 설렘의 달이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의 달이다. 내가 사는 의왕시 백운고등학교 담벼락에 “헌 남학생 교복 구합니다. 175cm”라는 큰 쪽지종이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3월은 입학의 계절이기도 하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새로운 공부를 하고자 하니 이 얼마나 찬란한 달인가? 그런데 누가 3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초봄, 3월은 학교 입학의 계절
신입생에겐 잔인한 3월로 변모

대학 OT선 ‘군기잡기’ 판 치고
유치원 입학은 로또 당첨 같아
초등생들은 선행학습에 멍들어

학벌주의로 공교육 목적이 상실
세상 변하는데 우린 ‘학벌’ 갇혀
신나고 재미난 학교, 못 만드나

축복받아야 할 입학의 계절에 황당하고 우울한 소식이 지면을 장식한다. 대학 신입생에서부터 유치원 입학에 이르기까지. 이를 종합해 보면 마치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점의 집하장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일부 대학의 신입생 강압적 군기 잡기(이를 똥군기로 표현한다)와 성희롱이 매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군대 문화에서 이식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는 의견도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입대하여 서부전선 GOP사단에서 3년간 사병생활을 한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신병이 오면 장기 자랑을 하게하고, 여동생이 있느냐는 장난기 어린 질문으로 새 식구를 받아 들였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요즘 세대에서 폭력적 집단주의 의례가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권위적 서열 문화, 약자에 대한 갑질 문화, 조폭적 공동체 의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당한 신입생 군기 잡기와 성희롱 사건은 바로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조 신임관료에 대한 신고식과 유생의 성균관 입학 신고식이 잔혹할 정도로 유별났나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붕당 정치의 폐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연구가 있다. 혹독한 신고식이 같은 패거리를 만드는 첫 관문의 의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은 그렇다 치고 유치원은 어떤가? 유치원도 명문이 있어 그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손녀의 유치원 입학 추첨에 직접 참여하여 당첨되어 길길이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는데 자초지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4번째 시도만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치원 교복 값과 교재비 등 입학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친구는 당분간 궁핍하게 지낼게 뻔하다. 유치원부터 이러니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할까?

초등학교 입학도 만만치 않다. 우리 시절에는 모두가 얼떨결에 초등학교 교정에 ‘나란히 니란히’ 하면서 섰는데, 요즘에는 입학하기도 전에 선행학습을 위해 여러 학원을 배회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어떤 선행학습이 필요한지 궁금할 뿐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러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되새김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에 비해 행복도가 매우 낮은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제일 큰 원인은 ‘학벌주의’의 병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학벌주의로 인해 교육의 내재적 목적은 사라졌고, 교육의 주체는 도구화되었고, 공교육의 교육과정은 길을 잃었다. 이제 입학은 학벌이라는 트랙을 달리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이 못된 학벌주의는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에서 생성된 경쟁적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그만큼 험하게 사납게 살아왔다. 제4차 산업혁명이니 하면서 교육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학벌주의의 액자에 갇혀있다.

불가에서 중생(衆生)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중생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타자가 나와 함께 있고, 내가 타자와 함께하는 삶이 바로 중생이다. 신나고 재미나는 학교에서 어린 중생이 한껏 춤을 추어야 하는데. 입학의 계절에 사나운 경쟁의 트랙에 들어선 어린 중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다.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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