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휴 스님의 백담사 무문관 ‘是甚麼 日記’④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 입구. 한끼 음식 이외에는 모든 것을 차단한 채 수행하는 무문관은 치열한 정진의 끝이다. 갇힘 안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인(眞人)이 되는 길이다.
화두를 듣고 참구를 하다보면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계속 될 때도 있고 하루 종일 번뇌 망상에 시달릴 때가 있다.

이때마다 나는 〈임제록(臨濟錄)〉을 꺼내 읽는다. 첫째, 그의 일언일구에 정신이 번쩍 들고 메말라 있는 머리에서 맑은 영혼의 샘물이 솟는 신선함을 느낀다. 그는 화두를 통해 본질을 찾고 자아를 탐색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인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 인식의 변화가 나를 새롭게 일깨우게 한다.

정진 순일 못하면 〈임제록〉 읽어
임제 일언일구에 정신 번쩍 들어
파격의 禪語, 얽매임·안주에 경책
‘살불살조’, 극복해 나아가란 당부
살아있는 믿음은 틀에 갇히지 않아


그의 법어는 평범하거나 진부하지도 않고 아울러 상식적인데 머물러 있지도 않다. 구절마다 영혼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마치 몽둥이를 들고 영혼을 후려치는 것 같다.

그의 수행방법은 다른 선사들에 비해 거칠고 충격과 파격이 항상 뒤따르고 있어 잠시도 곁눈질을 허용치 않고 있다.

그는 기존의 가치에 얽매여 있는 것을 용납도 하지 않았고 모방과 흉내는 몽둥이로 후려 갈겨 버렸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나 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부처를 닮으려고 하거나 보살을 비롯한 일체 성자를 의존하는 무리에게는 영혼을 찢어지게 하는 천둥 같은 할(喝)과 주장자로 후려쳐서 눈을 열게 하고 귀를 번쩍 트이게 하였다.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 마치 옆구리에 비수를 들어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레와 같은 할(喝)소리가 쏟아질 것 같다.

누구나 모방과 기존의 가치의 틀에 갇히게 되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방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임제(臨濟)는 부처를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처는 내가 보기에는 한낮 냄새나는 존재요. 보살과 성인은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임제가 선(禪)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깨달음의 철학이다. 그는 보살과 성인을 가쇄(枷鎖)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이것은 사람을 결박하는 것들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부처에 집착하고 조사(祖師)의 가르침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는 귀가 번쩍 트이고 새로운 안목을 열게 하는 목소리이다.

수행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고 고정된 인식의 틀에서 갇혀 있을 때이다.

그는 자주적 부처가 되어야지 부처나 성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부처로서 최고의 목표로 삼지 말라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 씌우는 형틀과 같고 사람을 속박하는 물건들이다’라고 밝힌다. 그는 갇혀 있으면 나약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매순간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임제는 몸소 체험하고 자유스러워지는 방법을 깨닫고부터는 반드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제는 다른 선사들과 달리 먼저 반드시 진정견해(眞正見解)를 갖추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밝은 지혜와 안목을 갖추게 되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자유스럽다고 밝히고 있다.

〈임제어록〉을 보면 그는 진부하고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것을 과감히 도려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언어 하나하나가 도전적이고 파격적이다. 굳은살은 날카로운 비수로 잘라내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고 있다.

마조(馬祖)와 백장(百丈) 황벽(黃檗)시대에 반복적으로 등장된 평상심(平常心)이나 마음이 곧 부처란 구호를 쓰지 않고 마음(心)이니 불(佛)이라는 추상적인 명칭을 일도양단 하듯이 전부 불식하고 무위진인(無位眞人)혹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이란 말로 인간을 중요시 하는 선(禪)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존엄과 숭고한 인격을 갖춘 여래(如來)나 부처와 같이 이상적 인격이 지니고 있던 가치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찾고 깨닫고자 하는 것을 멀리서 구하지 않았다. 항상 자기 안을 살피고 성찰하면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을 깨닫고자 했다. ‘그대들이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내 앞에서 법문을 듣는 그대가 부처와 다르지 않다.’

임제는 인간을 그대로 부처로 파악하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마음이니 불성(佛性)이라는 명칭을 사용치 않고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라고 선언하고 있다. 〈임제어록〉에서 가장 돋보이는 구절은 다음 구절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고 가고 머무는 것을 마치 옷을 벗었다 입듯이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당장 법문을 듣는 그대 자신을 알라. 그는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이 팔팔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수만 가지로 응용하지만 응용하는 틀에는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을 찾으면 점점 멀어지고 구하면 어긋난다.’

수행인이 추구하는 개인적 해탈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 해탈의 자유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고 있는 자기 자신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법문을 듣고 깨닫고 있는 그 마음 그것을 옛 선사들은 한 물건이라고 표현했고 본래 면목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임제는 그런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 자신을 살피라. 그것은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이 팔팔하게 살아 움직인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찾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구하려고 하면 어긋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임제는 그대들의 한 생각 한 마음이 결박을 이루기도하고 결박을 풀기도 한다고 수행자가 참구를 하면서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팔팔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그것은 때로는 법계를 관통하기도하고 항상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삼계에 자유자재 한다.

임제는 인간 그대로 부처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와 조사(祖師)란 이상적 인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와 조사란 그들을 존경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밝히고 나서 ‘부처란 단지 이름뿐이다. 불시명구(佛是名句)’라고 부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임제의 서슬 푸른 직관과 안목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가장 돋보이고 있다. 격렬하고 살벌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읽는 사람의 막혀 있던 가슴을 뻥 뚫리게 하고 있다. 그리고 충격과 신선함이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하고 있다.

‘깨달음의 견해를 터득하려면 부처와 조사에도 집착하지 말고 보살과 성인(聖人)에게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 자주적 부처를 방해하는 것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끄달리지 말고 극복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성자를 만나도 죽여라.’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의미는 죽이라는 살생의 의미가 아니라 극복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처와 조사 그리고 성자라도 극복 하라는 의미이다.

그는 찾고 깨닫고자 하는 시선을 자기 내면을 집중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몸 안에 부처가 직립해 있음을 깨우쳐 주고 정진을 통해 몸 안에 내재하고 있는 부처를 증득해야 한다고 그의 어록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임제선사의 어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부처란 단지 이름뿐이고 불시명구(佛是名句) 부처와 조사란 말은 존경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임제는 자기면목을 드려내기 위해 불타(佛陀)나 보살에 의존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부처를 냄새나는 존재라고 폄하하고 보살과 성자를 목에 씌우는 형틀이요 손발에 채우는 형틀이라고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속박하고 결박하는 것이라고 서슬 푸른 직관을 드려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위진인(無位眞人)을 깨닫기 위해서는 부처를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의존함을 버려야 하고 올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성인이나 조사들의 말에 현혹되거나 끄달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현혹되고 끄달리는 것을 ‘인혹(人惑)’이라 하고 상대방에 맞추어 변해가고 모방하는 것을 ‘의변(依?)’이라고 체험적 깨달음의 인식을 드려내고 있다. 그리고 소리와 명구(名구)를 모두 의변(依?)이라고 밝히면서 의변이나 인혹으로 인해 선(禪)의 창조적인 행위가 방해 받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정의(淸淨依), 무생(無生), 열반(涅盤) 등의 표현이 임제의 눈에는 소리와 명구에 불과했으며 의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다.

조주(趙州)선사도 일찍이 보리(菩提), 열반(涅槃), 진여자성(眞如自性) 등은 모두 몸을 편안히 하는 의복에 불과하고 번뇌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임제의 어록은 깊은 통찰력과 직관이 담겨 있지만 논리적이지 않고 문장이 유려하지도 않다. 미사어구도 없다. 투박하고 거친 표현들이 군데군데 있는가 하면 구절마다 영적(靈的)기품이 담겨있다.

강원도 고성 영은암 회주
다른 선사들의 어록에서 볼 수 있는 경전의 인용도 그리 많지 않고 독창적인 자기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이 돋보이고 있다.

그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표현 외는 마음이 부처니 평상심이 그대로 진리란 말을 진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부처를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수만 가지로 응용하는 무위진인을 깨달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기존의 가치에 얽매이거나 거기에 갇히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렇다. 자주적 부처는 그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 입구. 한끼 음식 이외에는 모든 것을 차단한 채 수행하는 무문관은 치열한 정진의 끝이다. 갇힘 안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인(眞人)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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