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고시위원장

당나라 현종 때 사공산(司空山) 무상사(無相寺)에 본정(本淨)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한 번은 왕이 중사(中使)인 양광정(楊光庭)을 산으로 보내 산춘등(常春藤)을 캐어 오게 했다. 양광정이 산에 와 지나는 길에 절에 들려 본정 선사를 뵙게 됐다. 그가 절을 하고 물었다.

“제가 도를 사모한지 모래입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 자비로써 가르쳐 주십시오.”

본정 선사가 대답했다.

“천하 선종의 석학(碩學)들이 모두 장안으로 모이니 천사(天使)께서는 조정으로 돌아가시면 물을 수 있을 것이오. 나(貧道)는 산수에 의지할 뿐 마음을 쓰는 바가 없소.”

광정이 더욱 간절하게 다시 절을 하였다.

“나에게 절을 하지 마시오. 천사는 부처를 구하는거요, 아니면 도를 구하는거요?”
“제가 우매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부처와 도는 어떻게 다릅니까?”
“만약 부처를 구하고 싶다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만약 도를 알고 싶다면 무심(無心)이 곧 도라오.”
“어찌하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까?”
“부처는 마음으로 인하여 깨닫고, 마음은 부처로서 드러나는 것이니, 만약 무심을 깨달으면 부처도 있지 않다오.”
“어찌하여 무심이 곧 도입니까?”
“도는 본래 마음이 없어서 무심을 도라 하니 만약 무심을 요달하면 무심이 곧 도라오.”

광정이 가르침을 받고 절을 하고 나갔다.

대궐에 돌아온 뒤 광정이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광정에게 본정 선사를 불러들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선사가 장안에 이르자 백련사에 머물라는 조칙을 내렸고, 이듬해 선교 양가의 명승과 석학들을 내도량으로 부처의 법을 선양(宣揚)하게 하였다.

그때 원(遠) 선사라는 이가 큰 소리로 본정 선사에게 말했다.

“이제 황제 앞에서 종지를 비교하고 헤아리고 있으니 마땅히 곧바로 묻고 곧바로 대답해야지 번거롭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선사가 보는 바로는 무엇을 도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무심이 도입니다.”

‘원 선사가 다시 말했다.

“도는 마음을 인하여 있거늘 어찌 무심을 도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도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마음을 인하여 도라 이름 하오. 마음이란 이름이 만약 있는 것이라면 도는 헛되지 않을 것이지만, 마음을 궁구하면 본래 있지 않은 것이거늘 도가 무엇을 의지하여 이루어지리오. 두 가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임시로 세운 이름일 뿐이요.”

“선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음을 보는 것이 도입니까?”

“산승에게는 몸과 마음이 본래 도라오.”

“아까는 무심이 도라 하시더니 이제는 몸과 마음이 본래 도라 하시니, 어찌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까?”
“무심이 도라면 마음이 없어질 때 도도 없어지는 것이니, 마음과 도가 하나와 같기 때문에 무심이 도라 하였고, 몸과 마음이 본래 도라 함은 도도 본래 몸과 마음이니, 몸과 마음이 본래 공했으므로 도 역시 근원을 궁구하면 있지 않은 것이오.”

“선사의 몸을 보건대 몹시 왜소한 데도 이런 이치를 아시는군요.”

“대덕은 다만 나의 모습 만을 볼 뿐 나의 모습 없음은 보지 못하는구려. 모습을 보는 것은 대덕의 소견일 뿐이요. 경에 말하기를 ‘무릇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닌 줄을 보면 즉시 그 도를 깨닫는다’고 하였으니 모습을 진실이라 여긴다면 겁이 다하도록 도를 깨닫지는 못할 것이오.”

“이제 바라건대 선사께서는 모습 위에서 모습 없음을 설해 주십시오.”

“〈정명경〉에 말하기를 4대(四大)에 주재자가 없고 몸 또한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이라는 소견도 없어야 도와 더불어 상응한다 하였는데 대덕이 만약 4대에 주재자가 있다고 여기면 이는 내가 있음이요, 만약 나라는 소견이 있으면 겁이 다하여도 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이상과 같은 대화가 〈전등록〉 5권에 수록돼 있다. 부처를 구하지 말고 도를 구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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