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과 무정의 불성

지난날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바둑대결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공지능에 대해 불교계에서도 ‘인공지능 로봇에게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깨달을 수 있는가’란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인공지능 로봇 등 과학기술 발전이 우리들에게 가져 올 고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먼저 인공지능에 불성의 여부와 깨달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중생에는 유정중생, 무정중생, 무색중생(無色衆生)이 있으며, 유정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정이 있는 중생을 말하고, 무정중생은 산, 강, 나무, 돌 등 정이 없는 중생이며, 무색중생은 물질이 없고 생각만 있는 중생을 말합니다. 무색중생에서 무색(무색)이란, 물질이 본래 없거나 물질이 없어져서 무색이 아니고, 물질이 ‘있다’고 하는 우리들의 분별의 생각이 공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무색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사람인가? 다른 것이 아닌 이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을 불성, 에너지, 마음이라고 하며, 또한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 어떤 분별도 없습니다.
불성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이 한 마음이고,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일체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성을 알고자 한다면 ‘불성이 있다, 없다’하는 분별을 여의는 것이 불성이고, 우리들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한다면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을 수 없다’하는 망념을 여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깨닫는 성품이 있는 것이 유정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유정은 깨달을 수 있고 무정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정물인 사람과 무정물인 나무는 무엇이 다른가? 그 차이는 유정인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분별망념을 일으키고, 무정인 나무는 분별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회 선사가 말한 유정의 깨닫는 성품이란, 미혹하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고 미혹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단 것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고, 망념을 일으키므로 망념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째서 분별망념을 일으키고, 미혹하며, 고통에 떨어지는가?

항하사와 같은 분별의 이분법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바르게 보아서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으면, 분별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고통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깨끗하다’는 생각이 있을 때 우리들은 ‘깨끗하다는 생각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생각은 스스로 생기거나 있을 수 없고, 오직 더러운 생각으로 인하여 생기거나 있을 수 있으며, 더러운 생각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마음은 본래부터 함께하며 인연에 의해서 어울린다’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마음이 없으면 깨끗한 마음도 없습니다.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마음은 스스로 있지 못하고 대상으로 인하여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 진공, 없는 것도 아닌 묘유가 됩니다. 서로 융통하여 깨끗하고 더러운 마음은 서로 같은 뜻, 즉 한마음이므로 서로 생기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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