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꿈을 꿨든지 좋게만 생각하면 좋아질 것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여) 스님,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연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가족이라든가 부부 인연이라는 게 불교에서는 중요한 인연인데 요즘에는 사실 가정에서도 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또 불행한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부부가 그 인연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또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는지요.

큰스님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불교라는 그 뜻을 몰라서 그렇습니다만 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저 풀 한 포기도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니만큼 한 가정에 이렇게 살 때에 만날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이렇게 희생했어.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망했어. 저 사람이 저렇게 하니 내가 화가 안 나?’ 하고서 남의 탓을 하고 남의 원망을 하고 이렇게 되니까 가정 파괴가 되고 그렇습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 하나가 내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부드럽게 얘기해 주고 부드럽게 행할 수 있다면 어느 땐가 그 작업이 순조롭게 될 때 그 가정은 그 마음이…, 이 전력이 똑같은 거와 같이 광력도 똑같고 자력도 똑같고 통신력도 똑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만큼 내가 그 마음을 먹는 데에 상대방도 바로 그 마음이 동시에 자꾸자꾸 거기 가서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전력이 똑같이, 한 집의 전구는 제각각인데 전력은 다 똑같습니다. 저기 가스통이 하난데 이 가스 쓰는 거는 다 그 한 통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 통에서만, 나만 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가정을 정말이지 부드럽게 이끌어 갈 수 있고 사랑의 대상이 되고 거기에선 화목이 깃듭니다.

서울에 김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남편이 별이 셋이나 되고 아주 우쭐대고 살 사람인데도 겸손합니다. 근데 그렇게 다니려니까 서로 떨어지는 일이 많죠. 남편이 들어오면 하도 본 체를 안 하고 그러니까 자기를 은근히 배신해서 그런 줄 알고 말입니다, 만날 싸웠습니다. 그래서 얻어터지고 말입니다. 가정이 그냥 파괴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거길 왔습니다. 그래서 그 법을 가르쳐 줬죠. 그랬더니 얼마 안 가서 “여보!” 하고 남편이 말입니다, 전자에 안 하던 짓을 하더란 얘깁니다. 남편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부드럽게 “여보, 피곤해서 어떡해요?” 하면서 오히려 위안을 해 주니까 자꾸자꾸 시간만 나면 따뜻한 보금자리로 들어오려고 하는 그 마음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식들 땜에 급한 일이 있어서 ‘여보 어디 있어? 당신 어디 있어?’ 하면 그냥 그 생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가 온답니다. 이렇게 우리가 통신이 잘되고, 우리가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부처님의 법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화목하려면 마음에 달렸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세요. 부드럽게 말해 주고요. 그럼 됩니다.

삿갓 쓰고 주장자 들고 바리때 하나 들고
한 발로 이 땅을 딛고 목마를 때 물 마시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질문자3(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상식이 부족해서 그런데 삼재라는 것이 불교에서 나온 건지, 그리고 또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면 삼재가 있는 동안에 불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큰스님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는 삼재팔난이라든가 전자부터 유래돼서 내려오던 무슨 이런 것이 많이 붙습니다. 어느 달은 어떻고 어느 해는 어떻고 갑자을축 뭐, 이러고 합니다. 그러나 그걸 무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이 공부 하는 데는 삼재팔난이고 무슨 새달에 어떻고 훗달에 어떻고 손이 있고 발이 있고, 하하하, 이사 가는데 무슨 못을 잘못 박으면 안 되고, 동쪽이 언짢고 서쪽이 좋고…. 이런 거는 몽땅 놔 버리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권리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 우주의, 즉 말하자면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그것에 매달려서 그렇게 끄달려야 되겠습니까? 삼재에 끄달리고 뭐, 어디를 가면, 뭐라고 그러더라? 손이 있다나? 무슨 손이 있는지…. 그건 관습에 의해서 우리가 지어서 우리가 고통을 오히려 받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요새 책들도 많이 나오고 그러는데 업이 있으면 이렇고, 무슨 죄업이 있어서 이렇고, 영계에서 이렇게 해서 그 업으로 오간지옥이 있고 화탕지옥이 있고 이렇게 하는 거, 그런 거를 다 그냥 놔 버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말입니다. 금강경에도 잘 보십시오. 화엄경에도 있지만 금강경에도 있고, 금강경이 축소된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모든 것을 놔 버리세요. 한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은 한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이성계가 이렇게 했죠. 석 달 열흘을 산에 가서 공미를 올리면서 빌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되던 날 꿈을 꾸니까 자기가 밥해 놓은 데에 구렁이가 서리서리 얹혀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꿈을 깨고서 보니까 머리카락이 서리서리 있거든요. 할 수 없이 풀을 발라서 머리를 싹 그냥 창호지로다 바르고 석 달 열흘을 또 했습니다. 근데 마지막 날 꿈을 꾸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꾸었거든요. 아, 쳐다보니깐 그냥 까마귀가 까욱까욱하고 날아가고 또 내려다보니까 그냥 하얗게 눈이 왔는데 꽃이 활짝 피었던 게 그냥 와르르르르 져서 떨어지거든요. 또 들어와서 이렇게 안을 보니까 면경 있던 것이 와르르르 깨져서 그냥 산산조각이 나더랍니다. 그리고 하도 놀라서 바깥을 쳐다보니까 자기 대문간에 허수아비 목을 턱 매달아서 디릉디릉하고 있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석 달 열흘을 머리를 싸매고 그렇게 했는데 글쎄 그렇게 꿈을 꿨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지금도 아마 그런 게 우르르 깨지고 그냥 허수아비가 달려 있고 그러면 아마 좋지 않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 꿈을 자기가 해석할 수가 없어.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떡 그릇에도 엎드러져야 한다’ 하는 그런 말이죠. 남을 우습게 알지 말고. 그래서 가다가 가다가 해몽을 하려고 누구를 찾아가는데 아, 떡 장수 노인네가 한 분 떡 앉아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은 말을 할 수가 없고 떡을 하나 사서 먹으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이러한 꿈을 꿨는데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흥, 그것은 저 무학 대사나 대답해 줄 수 있지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소.” 하거든요. 그래서 돌아서는데 그 떡 장수 할머니는 없어져 버렸어요. “아하! 요게 무학 대사로구나.” 요러고선, 무학 대사가 화해서 그 할머니로 들어가서 그 할머니가 이제 그렇게 했던 거죠.

그래서 무학 대사를 찾아서 가니까 무학 대사는 이렇게 대답을 해 줬습니다. 까마귀가 울고 간 것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안에 들어갈 것이고, ‘가옥가옥’ 아닙니까? 그러니 청와대 안에 집이 생긴다 이거죠. 또 색경이 깨진 것은 와르르르 깨져서 소리가 왕창 나니 모든 백성이 그 소리가 왁짝왁짝 나게 우러러 얘기해 줄 것이다. 또 꽃이 피었다 와르르 진 것은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었으니 바로 나라의 국록을 먹을 것이다. 허수아비가 매달린 것은 바로 모든 백성이 쳐다볼 것이다. 우러러 쳐다본다는 뜻이다. 이래서 무학 대사가 길을 인도해서 그 꿈 해석을 해 주면서 아주 뒤바꾼 거죠, 그냥. 그러니 무학 대사의 능력도 알아볼 만하죠? 그러니 우리의 그 뒤바꾸는 그 마음 능력에 달려 있는 겁니다. 나는 깨치질 못했으니까 뭘 어떻고 저떻고, 이 이유는 거기에 붙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유 때문에 그만 길을 못 가는 겁니다.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은지 말입니다. 그래서 무학 대사가 길을 인도해서 이성계가 인군 노릇을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여러분도 죽는 꿈을 꿨든지 살 꿈을 꿨든지 피를 흘리는 꿈을 꿨든지, 어떠한 꿈을 꿨든지 좋게만 생각하면 좋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타당하게 자기 앞에 있던 것이 아주 좋게, 이것이 해결 나려고 이런 꿈이 꾸어졌다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든지, 또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렇게 꿈을 꿨다, 또 승진을 하려고 이런 꿈을 꿨다, 하여튼 어떤 거든지 좋게만 생각하셔야지 만약에 그것이 나쁘다 좋다는 이론이 있으면 나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쁜 것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팔자 운명은 어디 누가 갖다 줍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갖다 주는 것이죠.

전 삼재를 모르거든요. 허허허. 전 모든 걸 몰라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편리하죠. 여러분은 모두 너무 아는 게 많아서 아마 복잡하실 겁니다. 하하하…. 나같이 바보처럼, 길을 걸어도 바보 같아서 저 꽃을 보고도 싱긋이 웃고 그저 서로 주고받고 그냥 편안하게 삽니다.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질문자4(여) 스님,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인공에 놓는다는 것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좋게 마음을 놓지만, 혹시 나쁜 일이 생길 때는 그 나쁜 일이 생긴 순간에 놓아야 되는데 거기에 생각이 붙어 가지고 이왕이면 저한테 좋은 마음으로 되는 원을 하고 함께 놓습니다. 괜찮습니까?

큰스님 음, 그렇게 길게 갈 것도 없죠.

질문자4(여) 글쎄 말입니다.

큰스님 나쁜 것이 돌아올 때는 ‘허허, 좋은 것이 돌아오는 것도 여기고 나쁜 것이 돌아오는 것도 여기니까, 그것이 또 좋게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은 거기밖에 없다.’ 하고 놨을 때 그것이 그냥 갑자기 돌아가죠.

질문자4(여) 그러니까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면으로 생각하면서 원을 놓고….

큰스님 믿어라 이거죠.

질문자4(여) 믿고 놓으면 되는 거죠?

큰스님 믿지 못하면 그렇게 바꿔서 놓을 수가 없거든요. 바꿔서 맡길 수가 없거든. 믿으니까 맡겨 놓을 수 있지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거기다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해가 안 가십니까?

질문자5(여) 감사합니다.  <영원한 나를 찾아서>의 스님 말씀 가운데요,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는데 4차원의 사람들에게는 실험적으로 부려질 수도 있다’고 하신 말씀이 적혀 있었어요. 저의 생각에는 이 말씀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신경 기도 주문에 보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대목에 속한다고 느껴지는데요, 그렇다면 저희들에게 도움을 주는 보호령이라든가 어떤 그 지도령들도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 영혼들은 어느 차원에 존재하고 있고 또 그 차원도 한 개인의 의식 수준에 따라서….

큰스님 이거 봐! 인제 그거 알아듣겠어. 그런데 보통 지금 우리가 3차원에서 산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4차원이다 하는 건 바로 일심이 굳어졌을 때의 얘기야. 구체적으로 내가 발견했을 때, 3차원이 한데 합쳐져서 일심으로 굳어졌을 때, 그럼 4차원이 바로 무심이 돼 버려. 4차원이 일심이 돼 버리고 무심이 돼 버려. 그 뜻을 모르겠지? 그렇다면 ‘나를 악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가 아니야, 그때는. 그대로 행하면서 악을 범하지 않아. 악이 있더라도 자비로서 그 악의, 즉 영혼을 자기가 여기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내가 바로 그 속에 들어가도 두드러지지 않아. 그리고 꺼내도 줄지 않고. 영식이기 때문이지. 그러니깐 그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둘이 아닌 도리를 자꾸 배우는 때야, 무의식중에 자꾸. 그럴 때 무슨 ‘나를 악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이런 게 들어가? 거긴 그런 언어가 붙지도 않아. 벌써 무심으로 수만 개의 영식이라도 나한테 넣을 수 있고, 내가 수만 개로 돼 가지고 주장자를, 즉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로 돼 가지고 분자를 만들어서 그 속에다가 수만 개를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빼도 줄지 않아. 이런 땐데 어떻게 ‘나를 악에 빠트리지 않게 하소서.’ 이런 말이 거기 들어가느냐 이 소리지.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뜻은, 부처님이 아니라 깨달은 분이지. 즉 말하자면 깨달은 분이 가르치시는 그 뜻은 그렇게 맵자해. 주렁주렁 달리지 않았다 이 소리야. 그러니까 가다가도 “삿갓 쓰고 주장자 들고 바리때 하나 들고 한 발로 이 땅을 딛고 목마를 때 물 마시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한 뜻이 무엇인가 이거야. 아주 맵자해.

그러니까 달마 대사는 아이, 약을 먹여서 죽였는데도 그 산소 안에 짚신 한 짝을 놓고 짚신 한 짝은 주장자에다 턱 짊어지고선 터억 보였단 말이야. 그 뜻이 무엇인가? 하나는 무의 세계에 있고 하나는 유의 세계에 있고, 둘이 아닌 짚세기가 허, 두 짝인데, 발 하나는 무의 세계의 발이고 하나는 유의 세계의 발이니 그저 항상 둘이 아니게 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대인이다 이 소리지.

그러니 4차원에 이를 때에는 바로 무심, 그 도리를 그대로 증득하고 그대로 알 수 있을 때고, 5차원이 된다 이럴 때는 이 모두를 둘이 아니게 할 때, 그때에 바로 육식을 마음대로, 육식이다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그 의식을 말해. 그거를 다 수용하고 내가 나갈 수 있을 때 바로 그것은 7차원에 이르러서 육식은 다 없어. 7차원에 그냥 한데 포함이 된 거야. ‘하나’ 하면 하난데 ‘둘’ 해도 하나가 돼 버려요. 어때요? 여기서 ‘만 불’ 하는데 ‘십만 불’ 하니까 그냥 만 불이 없어지고요, 십만 불 하나로 돼 버렸죠. 예, 십만 불 하나로 돼 버렸는데 뭐 만 불이 거기 붙느냐 이거죠. 십만 불 불렀는데 무슨 만 불이 거기 붙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둘이 아니다 이거야. 만 불 부를 때도 하나요, 십만 불 부를 때도 하나다 이거야.

그러니깐 그 씀씀이에, 모두 천차만별로 쓸 씀씀이에 의해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스스로서 들이고 내는 만법의 진리는, 그거는 7차원의 보배를 얻을 때 이 모두가 천국이고 모두가 보배로다. 보배 아닌 게 없으니 어떻게 천당 지옥을 따로따로 찾으랴. 내 마음이 구족하면 전부 구족하고 전부 천당이고, 내 마음이 구족하지 못하면 전부 남을 원망만 하고 이 세상 살 수 없고, 이 세상이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두 잘못하고 뭐 정치도 잘못하고 뭣도 잘못하고 그래 가지고 그냥 일어나고 모두 그래서 저희 집도 태워 버리고 이러는 수가 많죠. 우리 집도 반쪽으로 나누어져 가지고선, 집 하나 사 가지고는 반쪽씩 나누어 가지고 살거든요, 우리가 지금. 하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마저 태워 버리려고 그러는 수가 많거든요.
역사를 볼 때 우리가 조선 오백 년뿐만 아니라 수없이 나오면서 얼마나 우리 민족이 탄압을 받고 얼마나…. 아이고,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어요. 그것도 여러분이 정치를 하면서 백성을 이끌어 가면서 그렇게 눈을 좀 뜨게 해 주고 귀를 좀 뜨게 해 주고 좀 더 믿어 주고 좀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쳤더라면, 이 역사가 이렇게 오지도 않았거니와 우리가 일본 치하에서 그렇게 생체로 연구를 하게끔 만들어 주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 아픔을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러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런 생각으로 좀 뒤를 돌아다볼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갖지는 않고 꼭 남의 관습에 의해서 살아오는 그런 것만 습을 가지고선 만날 그냥, 주장질을 하고 그렇게 해서 그냥 풍지박산이 돼 가지곤 여기 몇 명 모인 분들도 다정하게 좀 한마음이 돼서 뭉치지 않고…. 배알도 없습니까? 어째 배알이 없습니까? 일본은 그래도 배알이 있어서, 그래도 뭐 건덕지라도 딱 해 놓고는, ‘흥! 너희가 아무리 주를 많이 가졌어도 내가 은행이든지 주든지 차든지 그냥 뭐든지 그냥 다 집어삼켜 보겠다.’ 그래도 요런 야망이라도 가졌는데 우린 야망도 없어. 하루하루 그냥, 그냥그냥 헐렝이야, 헐렝이.

이렇게 해 가지고야 우리 한민족이 어떻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얼마나 저거 한 줄 아십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놈의 거 서로 그냥 찢고 뺏고, 내가 잘났느니 네가 잘났느니 하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이라면 부모가 아무리 잘못한다 하더라도 자식을 죽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어 주는 겁니다. 믿어 주고 믿어 주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이 이렇게 믿어 주는데, 안 한다 하는 사람도 나중에는 ‘아이고, 우리 국민이 나를 이렇게, 이렇게 믿어 주는데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는 회개를 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여기 L.A.의 많은 인구들이 한마음으로 당친다면, 큰일을 치를 때는 너무 말이 많을 테니까 셋으로 나누어서 한마음으로 당쳐서, 세 단계가 한마음으로 그냥 또 이렇게 당쳐서 큰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나라에도, 정부에도 그 빛을 또는 믿음을 얻을 수 있고…. 어디 가든지 자기 할 탓이지, 어디 가서 머슴을 살아도 자기 할 탓이지 왜 주인을 나무랍니까? 꾀나 살살 피우고 그런다면 그거 믿어집니까? 우리 중노릇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꾀나 살살 피우고 자기를 아끼고 그런다면 신임이 안 갑니다. ‘저 사람은 저러려니….’ 이렇게 그냥 신임이 안 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조그마한 일이든 뭐든 진정으로 버리고 할 때, 그게 끈질기게 나가면 끝에 가서는 ‘아!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됩니다. 스님네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외국에 와서 한 달이 넘게 돌아치다 보면 어떤 땐 참 넋을 잃고 저 먼 산을 보고, 그것도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나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뭘 잘못하고 이런 탓이 없이 나 스스로 그냥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이 좀 더, 여기 몇 분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을 그렇게 내신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한마음으로 뭉치되 인구가 많으니까 셋으로 나누어서 이럭해서 당쳐진다면…, 우리가 큰 몫을 한번 하고야 가지, 그냥 갈 순 없지 않습니까? 그냥 어떻게 갑니까, 이 세상에 나왔다가. 어떻게 그냥 갑니까? 아무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길이지만 그래도 가고 오는 길에 그대로 갈 수는 없죠. 뭔가 우리는 영원한 길에 한 번이라도 ‘이게 영원한 길이로구나. 이게 영원히 할 수 있는 길이로구나. 영원히 우리가 지워지지 않는 일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이게 자비고 사랑이로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되고 한데 떨어트리지 않을 겁니다.

나는요, 여기서뿐만 아니라 나보다 훌륭한 분이 있다면 다 가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무슨 뭐, 꼬리표 붙여 놨습니까? 중이 여기만 이렇게 해서 지원을 내라는 꼬리표 붙여 놓지 않았습니다. L.A.의 어떠한 절이라도 핵심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그런 분들이 그저 많이 나셔서 여러분을 이끌어 주고 이럴 수 있는 이 한마음이 된다면 나야 뭐, 여기서 오늘 가도 되고 내일 가도 됩니다. 난 이런 데 착 없어요. 정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스님네들이 잘못 가르쳐서 내가 여기 왔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또. 단 하나, 여기 몇 분이라도 핵심적인 이 도리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 한인 단체가 구족하게 빛이 있을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꼭 말입니다, 여기 L.A.에서 한 가지 꼭 하실 게 있습니다, 한인으로서. 꼭이요! 그렇다면 미움도 절망도 또는 무시도 당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역사적으로도. 우리 선생님 같은 분들이 다 나서서 젊은이들을 이끌어 가면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3월 10일 L.A.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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