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꽃 모임

▲ 40년간 수행과 자비실천을 해 온 연꽃모임 도반들이 2월 14일 함께 모여 환하게 웃고 있다. 매달 열리는 법회에서는 도반들의 웃음꽃이 핀다. 수줍게 연꽃을 들고 있지만 더 이상의 꽃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연꽃모임은… 1977년 1월 22일 창립됐다. 이후 사경, 기도 사찰 순례를 이어가며 다채로운 신행활동을 펼쳐왔고 보현봉사회와 장학회 운영으로 자비나눔을 실천했다. 올해 1월 창립 40주년을 맞은 연꽃모임은 방송 포교를 위해 2000만원을 기부하는가 하면, 장학금 후원을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 보살의 기도로 시작된 인연
1977년 대원성 보살 집서
점심 공양하며 기도 입재
‘기도 한번 해볼까’는 마음,
얼음물 꽝꽝 깨는 신심 발전


꾸준한 신행으로 삶 변화 이끌어
금강경 사경 후 1만권 법보시
〈천수경·금강경〉 6만권 배포
일타·고암 스님 지도법사로
스님 일화 모아‘일기’로 발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10일 후에는 시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연꽃이 되어 반조하는 도반들의 삶은 4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도반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세상을 맑히는 향기가 되어 지금도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다.

2월 14일 부산 초량동 연화선원 지장재일 법회로 모인 ‘부산 연꽃모임(회장 이대원성)’ 회원들은 평균 연령이 70대를 넘어섰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주는 세월의 덧없음이 그들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밝은 에너지는 세월을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이유를 모임에서 만난 도반에게서 찾았다. 도반이 주는 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했다. 혼자 겪는 아픔은 없었다. 삶의 무거움에 빠져들 틈도 없이 도반들을 만나면 따뜻한 웃음으로 자신이 채워졌다. 서로에게 연꽃이 되어 자신을 맑게 하는 그들을 사람들은 ‘연꽃모임’이라고 부른다.

▲ 이대원성 보살은 40년 전 이웃을 위한 축원 기도를 시작으로 연꽃 모임을 창립했다.

1977년 자비기도로 인연 시작
연꽃모임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77년 1월 22일이다. 현재 회장인 이대원성 보살이 100일 자비기도를 마친 날이었다. 이대원성 보살은 자신의 집에 젊은 어머니들 30여 명을 초대했다. 점심 비빔밥 공양을 초청받은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대원성 보살이 100일 동안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왔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왜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했단 말인가?’ 의구심이 들 때였다. 그들은 기도를 마친 이대원성 보살의 맑은 미소를 보았다고 했다.

“처음엔 불자가 아니었어요. 당시 대원성 보살이 한 말에 도반들과 함께 ‘기도를 해볼까’라고 시작했던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죠. 그 당시 대부분 회원들이 불자가 아니었어요. 편하게 밥도 같이 먹고 기도도 같이 하고 모임을 시작했던 것이 점점 마음이 깊어졌어요. 나중에는 법당에 가고 싶어 추운 겨울 꽝꽝 언 물을 깨 씻기도 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여기 도반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김정자(본심화ㆍ73)

연꽃모임이 자신의 일부와도 같다는 문영애(정인심ㆍ71) 씨는 눈물을 보이며 가장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반들이 손을 내밀어 줬다고 했다.

“유치원 학부모 덕분에 이 모임을 알게 됐어요. 저는 처음 무종교인이었어요. 신랑을 간암으로 일찍 여의고 혼자 어려운 세월을 견딜 수밖에 없었어요. 신랑을 먼저 보낸 후에는 마음이 상해서 모임에도 가기 싫더군요. 그때 도반들이 계속 찾아왔어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줬죠. 딸 아이 세 명을 혼자 키우는 것은 정말 녹록지 않았어요. 크고 작은 것부터 그리고 지난 딸아이 결혼식도 혼자서는 감당을 못했을 텐데 도반들이 가족처럼 정말 이끌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준 그 세월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가족보다 더 끈끈하고 깊은 정은 도반이라는 그 단어 외에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 법회에서 기도를 올리는 연꽃 모임 회원들. 가정 법회 뿐 아니라 정기적인 모임으로 신행 생활을 이어가며 도반과 함께 한 삶이 곧 성장의 시작이었음을 강조했다.

신행 통한 삶의 변화 이끌어

지금도 그들은 서로의 법명 만을 부른다. 법명 외엔 원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불교가 맺어준 인연 속에 그들은 더욱 더 든든하다. 그래서 그들은 연꽃모임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신행을 꼽았다. 그들은 매달 법회와 기도를 위해 모였고 각자 집에서 사경과 개인 기도를 잊지 않았다.

첫 모임의 발단이 가정불단을 만들고 매일 기도했던 대원성 보살의 원력이었기에 대원성 보살의 집을 중심으로 회원들은 모였다.

신행이야기와 스님들의 수행 이야기, 부처님 경전, 공부법, 기도법 그리고 일상적인 문제의 해답까지 얻는 장소로 대원성 보살의 집은 회향됐다. 그리고 각자의 집에서 회원들은 실천했다. 사경을 쉬지 않고 했으며, 기도도 잊지 않았다. 신행은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됐다.

“사경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글 〈금강경〉을 사경한 권수가 62권에 이르러요. 부처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돼 수많은 시간 저를 보호하고 이끌어 줬다고 믿어요. 가장 좋은 것은 가정에서 부부 간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없어지고 평안해졌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부부가 함께 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정도현(연화심ㆍ73)

수행을 통해 생활의 지혜를 얻었다는 정도현 씨는 사실 건강이 좋지 않아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도현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믿음으로 병마를 이겨낸다는 것은 고통이 없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참된 도리를 실천할 때 얻는 평안이라고 설명했다.

“백혈병이었어요.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절망감에 어찌 할 바를 몰랐을 때 부처님께 의지를 했어요. 단순히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보다 힘든 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저보다 힘든 분들을 위해 마음을 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더군요. 그래서 아픈 와중에도 주변을 힘들지 않게 제가 돌아볼 수 있었어요. 부처님 말씀은 실천을 했을 때 지혜를 발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완쾌되어 부처님께 더욱 더 감사드립니다.”

회원들의 공부를 위해 시작된 금강경 사경은 더욱 발전했다. 이들은 〈금강경〉을 사경한 ‘금강경한글사경집’ 1만권을 부산불교와 전국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시했으며 〈천수경ㆍ금강경〉도 6만권을 배포했다.

▲ 연꽃 모임의 지도법사였던 고암 스님과 함께.

또 연꽃모임은 스님들과의 인연도 쌓아갔다. 일타 스님과 고암 스님이 이들 모임의 지도법사가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운허 스님, 법정 스님, 지관 스님, 혜인 스님의 가르침도 받았다. 큰스님들과의 일화를 책으로 엮어 이 대원성 보살은 〈바라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바라밀 일기〉에는 큰 스님들의 다정한 필체로 적혀 있는 편지글과 일화들이 담겨있었다.

대원성 보살은 “연꽃모임을 창립한 후 법정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송광사에 버스를 대절해 갔다. 그 후 스님은 우리의 안부를 ‘버스 두 대분은 잘 있어?’라고 물으셨다”며 “함께 불일암 오솔길에 앉아 야단법석도 열었다. 스님을 자유롭게 친견하는 행복은 정말 컸다”고 회고했다.

지난 2월 19일에도 연꽃모임 회원들은 제주 약천사를 다녀왔다. 2016년 6월 입적한 회주 혜인 스님을 기리는 약천사 리틀붇다어린이합창단 제7회 정기공연 ‘혼저 돌아홉서예-혜인 큰스님 이야기’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대원성 보살은 추억을 회고하며 혜인 스님 친필을 꺼냈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적힌 글씨에는 혜인 스님의 따뜻하고 다정한 성품이 드러났다.

대원성 보살은 “스님과의 인연은 저희 모든 연꽃모임 회원들이 신심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모습 그 자체만으로 살아 있는 법문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고, 승가에 대한 존경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 연꽃 모임은 신행 활동 뿐 아니라 나눔 활동에도 앞장섰다. 사진은 보현봉사회 1주년 장면이다.

신행 불심, 자비나눔으로 번져
20년간 재활원 봉사 및 교도소 위문
스님 및 저소득가정 아이 장학 지원
사회 일원 성장한 아이들보며 보람

공덕은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로소 시작돼


연꽃모임 회원들은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고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함께 하니 가능한 일들이 넘쳤다. 연꽃모임은 자비실천의 원력을 세웠고 의지를 다졌다.

연꽃모임이 중심이 되자 회원 아닌 사람들도 함께 동참했다. 1994년 연꽃모임은 ‘보현봉사회’를 조직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자비나눔을 실천하자는 말에 회원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보현봉사회는 20년 동안 천마재활원 및 교도소 위문, 종립학교 무료급식 지원, 노숙자쉼터 보현의집 봉사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봉사를 통한 삶의 변화는 회원들을 더욱 성숙하게 이끌었다.

김원옥(무삼화ㆍ72) 씨는 연꽃모임 회원 중 40년 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은 이였다. 그녀도 연꽃모임 전에는 불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처음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는 두렵기까지 했다고 했다.

“당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교도소라는 장소에 발을 들여 놓기가 두려웠어요. 하지만 가서 보고 난 뒤 생각의 틀이 많이 바뀌는 계기가 됐습니다. 재활원에 들어갈 때는 이런 곳을 왜 오자고 했느냐며 불만이 생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손을 잡고, 또 그들의 옷을 세탁하며 참된 감사와 만족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법회를 통한 가르침과 실천을 통한 깨달음은 저를 성장시켰고 그래서 5남매를 키우는 쉽지 않은 가정사도 지혜롭게 잘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서은진(환희행ㆍ73) 씨는 “부처님 말씀과 도반들로 인해 하심을 알게 됐다”며 “지금은 불교를 수화로 전하는 일도 하고 병원에서 봉사를 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는다. 모든 인연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연꽃모임의 활동은 이뿐 만이 아니다. 대원성 보살은 ‘사람이 보배다’는 뜻을 강조했고 무엇보다 인재불사에 앞장섰다. 군법당 후원금을 정기적으로 보내고 1990년 ‘연꽃 장학회’를 조직해 승가 장학금과 저소득 가정 학생들을 위한 학자금을 후원했다.

“당시 아들 친구가 군대에 갔는데 불자 손들어 봐라해서 손을 들었더니 덥석 법사를 시키더라고 합니다. 그곳이 당시 파주였는데 아들의 말만 듣고 파주로 주소만 가진 채 찾아갔어요. 눈에 보인 현장은 너무나 열악하고 청년들은 와서 부처님 말씀 하나 못듣고 졸고 있더군요. 그래서 같이 모시고 간 거해 스님께 간절히 부탁하고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대원성 보살

인재불사를 강조한 대원성 보살과 함께 군법당 소식을 들은 회원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함께 뛰어 들었다. 군법당 뿐 아니라 어려운 학생들과 스님들을 위한 장학 사업도 20년 동안 진행됐다.

“당시 스님 가운데 유독 영어가 어렵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학원비를 드려서 도움을 드렸어요. 그렇게 승가에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없는 가정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어려움 살림 때문에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했죠.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그집 자녀 중 한 명이 서울대 의대를 갔고 한 명은 서울대 치의대를 가서 지금은 대학교수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당당히 활동을 잘 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결과는 믿고 잘 따라준 회원님들의 은덕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원력을 물었다. 그러자 대원행 보살은 423명의 이름이 적힌 책자를 보여줬다. 매일 새벽 예불마다 축원을 올리는 이들이라고 했다. 인연을 묻자 ‘내생(來生)장학회’에 후원해준 분들이라고 했다. 이는 스님들의 공부를 위한 장학후원회였다.

“인재가 보배입니다. 사실 연꽃 모임도 그렇게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지요. 단지 옆에 사는 분들을 보며 기도하고 축원하고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시작점이 된 것이니까요. 자비의 마음으로 남이 잘 되길 바라는 것 그것이 축원입니다. 그것이 행동이 되면 장학금도 되고 봉사도 되죠. 공덕은 바로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축원 기도가 가장 행복하다는 대원성 보살이다. 그리고 축원기도도 법정 스님이 일러주신 이 말씀처럼 회향되길 바란다고 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 밑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조차 없네’ 이 말씀은 법정 스님께서 저희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저희 연꽃이 질 때 이렇게 지길 바랍니다. 흔적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회향되길 바랍니다.”

연꽃모임 회원들은 대부분 70세를 넘었다. 연꽃모임 창립 후 40년의 시간은 인생의 절반보다 더 길다. 부처님은 도반이 수행의 전부라고 하셨다. 연꽃모임 회원들의 삶을 돌이켜 보며 연꽃과 같은 삶으로 자신을 이끌어 준 도반들이 인생의 전부였다.
▲ 연꽃 모임 회원들이 1978년 제등행진에 참여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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