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얻을 바가 없습니다

 

어저께도 오늘도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이 L.A. 먼 타국에 여러분이 오시고부터 이날까지 이끌고 온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끌어 오기에 노고가 얼마나 많으셨는지 말입니다.

밝은 것도 아니고 꺼진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대로 하는 것이 법이니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마다 다, 가정마다 크고 작게 뒤따르고 있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어떻게 타파하고 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정법을 가르쳐 주시고 핵심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강설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학식도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그 내면에서만이 나오는, 슬프면 슬픈 것대로 아프면 아픈 것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것대로 어떠한 고정됨이 없이 나오는 그 진실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다스려 가면서 아무리 고가 있다 할지라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내면에 맡겨 놓는 그 작업을 우리가 항상 해야만이, 용광로에 헌쇠든 뭐든 짧은 거 부서진 거, 모든 괴로운 것들을 거기다가 놔야만이 자동적으로 그 쇠는 재생돼서 나갈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자기 조국을 버리고 이 먼 타국에 오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가 꼭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조국도 타국도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어차피 여기서 사는 이상 멀다 가깝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끔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주어져야 될 것입니다.

나는 특히 여러분을 만나는 순간마다…, 모르겠습니다. 자꾸 아픔이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걸어야만 했고,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만 했고, 왜 이렇게 아파야만 했고, 이렇게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보면서 이렇게 길을 걷다가도 남이 볼까 무서워서 눈물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합니다. 네가 무엇이기에, 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이 길을 걸어야만 하느냐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강설을 듣고도 그것을 허세 삼아서 이론적으로 얘길 하고, 자신의 그 아픔은 감추어 놓고 바깥으로만 웃고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웃음도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집안의 걱정이나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죠. 그러나 그런 것을 이론적으로 듣고 강설을 들어서 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커버해 나가고 실천을 하고 내가 그 능력을 그대로 기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내면에서 나를 끌고 다니는 나의 주처에 있습니다. 본래자성불은 자기가 스스로 청정함을 알고, 본래자성불은 본래 자기가 여여함을 알고, 본래자성불은 자기가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알고, 본래자성불은 자기가 그대로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래자성불은 자기가 스스로 자유스러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어려운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한국에서의 일입니다. 근근이 살다가 남편이 없어지고 그랬는데 돈 조금 나온 거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이걸 없앨 수도 없고 자식들은 점점 자라서 학교에 가는데 어쩔 수가 없어서 증권에다 넣었다고 합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애들은 다섯씩이나 되고 엄마 혼자 어떻게 할 양으로 하는데 저게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내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남이 ‘이거를 팔아라. 이거를 사라.’ 이러는 소리를 듣지 말고 주인공에다 맡기고선 스스로 네가 사고 싶은 그거를 사고 남이 뭐라고 하더라도 듣지 마라. 사고 싶으면 사고, 팔고 싶을 때 얼른 팔아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돼서 애들하고 살 수 있게끔 17평짜리 아파트를 사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조금 가지고 어물전을 내는데, 그저 시장에서 쪼끄만 거 얻어 가지고라도 그거를 하라고 하면서 증권에 아예 손대지 말라고 그랬죠. 너무 겁이 나서요.

사람 사는 게 이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저 법당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방에 부처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또 여러분 안방뿐 아니라 저런 일터에도 여러분이 계시니까, 거기 계신 반면에 내가 마음을 ‘내면세계 깊숙이 나를 이끌어 가는 내 주처가 바로 여기 있구나. 감사하구나. 이렇게 일을 해서 먹고살게 했으니 감사하고 부모의 은혜로 이렇게 육신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길러 줬으니 감사하고 이렇게 이끌어 가니 감사하고, 또한 우리 식구를 이끌어 주는 것도 당신밖에 없어.’ 하고 깊은 속에 깊은 마음으로 그렇게 한생각을 해 놓고 그냥 부지런히 일을 하는 그 걸음걸이는 아마도 여러분의 가정에 빛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조그마한 거든지 큰 거든지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그런 모든 것을 커버하고 나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팔자 운명 때문에, 죄업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고 아예 체념하고 사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체념할 때가 아니라 실험하고 체험을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알뜰히 능력을 기르는 도리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 도리를 알아서 위로는 묵은 빚을 갚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서 우리가 실천을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백 마디 해 봐도 한 번 실천하는 것만은 못할 겁니다, 아마.

그러니 오늘은 질문, 토론하고 그렇게 나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질문자1(남) 한마음선원을 통해서 여러 가지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가 다 ‘없다, 없다’로 많이 들어가는데 그 중에서도 한마음은 있다고 봐야 됩니까, 없다고 봐야 됩니까?

큰스님 어저께도 말씀드렸지만 한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우주 전체 삼라대천세계, 우리 사바세계가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아까도 얘기했고 어저께도 얘기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그릇에 담겨서 찰나에, 여러분이 아파서 거기 내면에 ‘아이고, 이거 아픈 것도 당신밖에 낫게 해 줄 수 없어.’ 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바로 거기서 약사가 생기고 또 거기서 관세음이 생기고 지장이 생기고 칠성이 생기고 용신이 생기고 지신이 생기고 법신이 생기고 모두 그러기 때문에, 한군데에 그렇게 일체 만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유스럽게 들이고 내고 응해 주시기 때문에 한 그릇의 한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되겠습니까?

질문자1(남) 그러면 제가 질문드린 거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 있다는 것으로 판단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큰스님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찰나에 생각을 하고 이렇게 하면 있는 것이 되고, 또 그게 떨어지면…. 함이 없이 하니까, 함이 없이 돌아가니까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것이더냐?” 하고 물으니깐 물통 있는 것을 차고 빙그르르 돌아서 어느 스님이 나가시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동작과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마음에 의해서 움죽거리는 말, 생각이 다 항상 밝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저 불이 항상 밝아 있다면 없다는, 꺼진다는 언어도 붙지 않을 것이고 켜진다는 언어도 붙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십니까? 여러분은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항상 밝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여러분이 하시면 그게 법이라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그냥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 바로 보현신이 되고 화신이라는 거죠, 바꿔지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항시 자가발전소와 같아서 여러분이 불을 켜려면 켜고 말려면 말고, 그거뿐입니다. 켜진다, 꺼진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다. 켜지는 것도 아니고 꺼지는 것도 아니다. 단 네가 켜고 끄고 그럴 뿐이다 이런 거죠. 이해가 됩니까?

질문자1(남)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큰스님 어렵긴 뭐가 어렵습니까? 여러분이 사시지 도대체 딴 사람이 살아 줍니까? 아니, 저 불이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아이, 저게 다 여러분이 만들어서 켜고 끄고 그러는 거지 누가 만들어 줍니까? 또 여러분이 생명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내고 움죽거리고 말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때에 말을 하는 것을 밝다고 하고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고정됨이 없이 항상 하기 때문에 그렇게 “밝은 것도 아니고 꺼진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대로 하는 것이 법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그러면 다시 거기에 대해서 ‘쓰면 있는 거고 안 쓰면 없는 거고’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큰스님 하하하…. 그 양면을 다 그냥 놓으세요. 내가 그냥 목마르면 마실 수 있고, 내가 자고 싶으면, 그냥 잘 때 되면 자는 거고, 일할 때 되면 일하고, 부지런히 뛰어야겠다 하면 뛰는 거고, 오늘은 쉬어야겠다 하면 쉬는 거고 이게 그대로 자연스럽게 여여하게 그냥 실상이며 법입니다. 그러니 그 이유를 붙일 게 뭐 있겠습니까? 있다 없다를 왜 붙입니까? 가뜩이나 살기에 귀찮은 일도 너무 많은데 있다 없다를 왜 붙입니까? 그냥 하면 되지. 허허허….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이게 처음에 그냥 아무것도 바탕이 없이 듣기만 해서 이해가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스님네들이 왜 20년, 30년씩 이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 아니, 지금 60년이 된 노승이 그것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런다면 여러분은 행복하시죠, 뭐. 살림하는 거나 우리 중노릇하는 거나 공부하는 거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딱 있겠죠. 여러분이 머리 깎은 걸 보고 중이라고 하고 머리 안 깎고 그냥 평복 입은 걸 가지고 그냥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하하…. 중 따로 있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중 옷을 입고 중이 된 겁니다. 왜? 모두 중으로 봐야 여러분을 건질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게 방편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우리 중들이 생각할 때는 ‘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이 순색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바로 우리가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이 “색도 공이요 곧 공도 색이니라.” 하는 그 뜻이 바로, 몰락 놔 버린 자체의 근본이 바로 순색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고 여기 자리도 옹색하고 모두가 생각에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이성계가 아무 뜻도 없이 떡을 파는 노인네 앞에 가서 떡 그릇에 그냥 엎드러진 거와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순수하게 안다 모른다를 떠나서 내가 모두를 얻으려면 이 우주 천하의 모든 것을, 만약에 하나도 가질 게 없다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이 주먹 안에 꼭 들어갈 겁니다.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얻을 바가 없습니다.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가 찌꺼기가 남아서 다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땅 놓으십시오. 몽땅 맡기시고 사십시오. 그저 여러분이 들이고 내고 살고 있는 자체, 자기까지 더불어 같이 이끌어 가는 주인공 자체가, 운전수가 차를 끌고 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다면 어느 땐가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빛이 나고 스스로, 참으로 지혜가 생기고 물리가 터져서 하늘을 보고 한번 울고 땅을 치고 한번 울어야 하는 그런 인간의 삶의 그 뜻을 알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아무리 모른다 하고 무식하다 할지라도 진실은 막지 못합니다. 내 힘닿는 대로는 여러분을 둘로 보지 않고 모를 때 내 모습으로 알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으로써 맞이하면서 이렇게 아마 서로 종종 만날 겁니다. 또 질문 없으십니까? 조그마한 거라도 좋습니다. 조그마한 거 큰 거 따로 없으니까요.
여러분이 이해 안 가는 걸 내가 이럭하는 건 곧바로 들어가는 길을 인도하고 싶어섭니다. 만약에 이걸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빙글빙글 돌려서 강의로써 무슨 옛날 얘기를 한다거나 옛날 역사를 얘기한다거나 스님네들의, 조사들의 업적을 얘기한다거나 이건 모두가 그림의 떡입니다. 모르든 알든, 작든 크든 내가 알고 내가 알아야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질문자1(남) 다른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육신을 쓰고 지금 살고 있는데 육신을 쓰고 살고 있는 그 기간이 상당히 제한이 돼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신을 쓰고 살고 있는 그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이 넓고 물리가 터졌으면 바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살 것이고, 또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콩깍지와 같이 우리의 삶은 그렇게 익어서, 살다 보면 그 콩이 또 심어져서 또 나오고 그러니까 얼마나 가치가 있는 여러분입니까, 네? 아주 그건 조그맣게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수박 얘기도 했고 콩 얘기도 했습니다. 콩이 안 익었으면 깍지를, 강제로 그 껍데기를 벗기느라고, 속껍데기도 붙어서 애를 쓰니까, 그건 아파서 병이 들어서 몇 년 앓다가 껍데기가 벗겨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콩깍지가 잘 익었으면 콩은 또 심어서 또 나오고 또 심어서 또 나오기 때문에 아주 좋은 일이죠. 그러니까 영원한 거죠.

우리 삶은, 우리 이 몸뚱이는 그저 내가 아닙니다. 몸뚱이는 옷과 같은 겁니다. 우리가 옷이 더러우면 벗어서 빨아서 다시 깨끗한 걸로 입고 또 유행이 된 거 있으면 다시 옷을 만들어서 입습니다. 만들어 입는 그 과정입니다.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몸뚱이를, 그림을 잘 그려 가지고 자유스럽게 또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깨달아서 부처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못났든 잘났든 전부 나 아님이 없는데 뭐 때문에 그 육신을 또 가지고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저 우리가 안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세계를 보듯이, 어느 안방에 앉아서 전파를 보내서 지구를 그냥 몇 바퀴를 돌고 전부 알듯이 부처님의 그 깨달음은…, 안방에 앉아서 그렇게 해서 다 처리들을 해요. 모두 여러분이 깨달으면 마찬가지죠. 그런데 아니, 육신이 왜 영원한 게 아닙니까? 육신도 영원한 겁니다. 옷을 벗어서 다시 지어서 입은 거뿐입니다. 시대가 바꿔지는 대로 우리가 살아나가듯이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또 태어나기도 하고 잘못하면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죠. 그걸 윤회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윤회가 아니라 화해서 낮게 떨어지든 위로 올라가든 그건 진화돼서 자꾸 돌아간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옷을 벗고 바꾸는데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도 우리 한마음에 있는 거죠.

“부처님! 부처님! 나는 죄를 지은 게 없는데 이 세상에 나와서 왜 이렇게 고통이 많습니까?” 하니까 “얘야, 그런 말 마라. 네가 지금 과거를 못 봤걸랑 지금 너 사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너를 한번 생각해 봐라. 그러면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잘 알 수가 있느니라.” 그러니 누구 탓할 게 없지. 우리 사무실에 컴퓨터를 다섯 대나 여섯 대나 놓고 씁니다. 하도 일이 많으니까요. 지원도 많고 여러 군데 이렇게 연구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런데 컴퓨터에다 입력을 해 놓은 것만이 나오지 입력 안 해 놓은 거는 안 나옵디다. 하하. 그래서 그거를 보고 ‘아! 그렇지. 모두 각자 자기네들이 지어 놓지 않은 게 어디서 나오겠느냐.’ 이거죠. 안 나와. 몰라. 나도 이러한 업력을 지었기에 이렇게 하고 앉았을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이게 좋았기에 그랬겠지, 응? 그러니까 ‘야! 중노릇하기가 이렇게 나날이 갈수록 어려울 줄이야 미처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많지요. 질문하실 거 또 있습니까?

질문자2(여) 스님, 책에 보면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혹성에도 존재하고 있다면 믿겠는가?”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저 개인으로서는 그 글귀를 읽고 참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한 점은 스님께선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 저희들하고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저희들과 같이 계시면서도 다른 장소라든가 혹은 또 다른 혹성에서도 함께 존재하고 계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래요. 우리가 지금 모습은 이렇게 앉아 있어도 이것도 환상일진댄 만약에 미국에서 배우들이 공연을 하는데 그 공연하고 있는 것을 한국에서도 또 봅니다. 어떻습니까? 그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만 개라도,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내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줄지도 않고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 부처님 법이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하시고요. 또 나도 그렇게 한다 이런 거는 말 낸 적은 없지만 그렇게 한마디 해 봤습니다. 그건 왜냐 하면 야, 미국에 있어도 한국에서 “스님! 지금 하혈이 심한데 이거를 좀 단절시켜 주십시오.”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걸 어떻게 해야 내가 또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서울을 가야 할 텐데, 바다도 있고 뭐 비행기도 타야 하고 그러는데, 내가 쫓아가야 될 텐데, 몸은 하난데 말입니다. 그럼 거기를 어떻게 해야 가겠습니까?

신도1(남) 주인공한테 맡겨요. (대중 웃음)

큰스님 으응, 그건 공부하는 과정이고 어떡해야 거길 갈 수 있겠나? 그것은 한 찰나야. 찰나야. 그저 그거 방편으로 “알았어.” 이러면 그만이지, 거기에 덧붙일 게 뭐 있습니까? 그거를 여러분이 알려면 공부 열심히 하셔야죠.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걸 보시려면요.

신도2(여) 방법은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겠네요.

큰스님 예! 그러면 ‘아하! 저이가 저러는구나.’ 하고 알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느 스님이 이랬대요. 도반들끼리 공부를 하는데요, 아, 가만히 보니깐 공부를 해 가지고 구름을 타고 가서는 계집질을 노냥 하거든. 구름을 타고 가 가지곤 꼭 그러거든.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자기 몸뚱이는 거기 놔두고요, 허수아비로, 자기가 가서 연애 거는 거죠. 아, 그러니 글쎄, 얼마나 괘씸하냐 말이야. 그래서 하루는 사형이 하나 있다가 ‘요놈의 새끼!’ 하고는 그냥 구름 타고 가는 걸 탁 막아 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려 달라고, 형님한테 살려 달라고 하니까, 다시 그 짓을 또 한다면 넌 가만 안 두리라고 이렇게 하니까 그때서야 ‘아하!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구나.’ 그러고선 그 짓을 안 하더래요. 하하하….

그랬다는 셈으로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 그 사람들의 위치에 올라서야 알지 아니, 소학교 학생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중학교 학생이나 고등학교 학생이나 대학원 학생의 그 과정을 어떻게 압니까? 거기까지 올라와야 알죠. 그러니 부지런히 올라와 보세요. 손잡고 가 보게, 한번. 하하하….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3월 10일 L.A.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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