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휴 스님의 백담사 무문관 ‘是甚麼 일기’ ③

설악산 백담사 백담계곡의 설경. 골짜기에 펼쳐진 풍경은 숨김없이 실상의 묘용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은 무정의 설법을 하고 개울의 물소리는 깨달음의 법음이다.
부처·조사의 틀에 갇히지 말라
탐구의 목적은 본질을 찾는데 있고 그 본질의 탐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려면 자기 자신이 사유의 틀 속에 갇혀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특히 선방(禪房)에 앉아 정진을 하는 사람들은 조사(祖師)의 어록에서 자유스러워져야 하고 부처와 조사에 얽매여 있는지 반문해 보아야한다. 선(禪)은 모방이 아니고 창조이고 마음의 바탕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직관적 증득하는 행위이다.

禪은 모방이 아닌 창조의 수행
부처·조사의 틀에 갇혀선 안돼
자주적 부처로서 ‘原音’ 찾아야
마음을 조복받은 적이 있었는가


만약 부처와 조사를 닮으려고 한다면 덕산(德山)의 방을 피하기 어렵고, 임제의 할(喝)에 영혼이 찢기고 말 것이다. 누구나 한 가지의 일에 몰두하고 반복하면 습관이 이루어지고 그 습관은 중독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신적 행위는 인간의 뇌리에 축적되고 DNA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선적(禪的)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틀에 갇혀 있게 되면 선(禪)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여기서 누구라고 밝히기 어렵지만 이름이 알려진 선사들의 법문을 듣고 실망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담아내는 일기일경(一機一境)도 그렇고, 그 내용은 중국 선사들의 깨달음의 일화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너무 상식적이고 모방의 차원을 넘어 서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 선사들이 이룩한 깨달음의 가치의 틀 속에 안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격외적(格外的) 상상력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를 좀 더 큰 대승적 자아로 확대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자기의 원음(原音)이 없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중국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깨달음의 틀 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부처로서 자기의 목소리를 갖고 가풍을 갖는 일이다. 살아있는 믿음은 어떤 틀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주적 부처가 되어야지 기존의 부처와 조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선종이 만들어 놓은 가치의 틀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머물러 있으면 정체되고 침체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기존의 가치를 버리게 된다. 자기의 틀을 깨트리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엇인가 집착해 있는, 한군데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백장 선사가 일찍이 ‘부처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한량을 뛰어넘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눈 밝은 운수(雲水)일수록 전통이나 인습에 얽매여있거나 안주(安住)하지 않고 그것을 박차고 일어났다. 습관으로 만들어진 안정과 편안함속에는 정체와 타성이 뒤따른다. 우리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려면 오랫동안 익혀왔던 습관을 버려야한다.

중국의 ‘선(禪)’은 인도에서 전래된 명상 중심의 ‘선나(禪那)’와 다르다. 단순히 생각을 고요하게 하고 마음을 맑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본질을 탐구하거나 실상을 자각하는 행위로 변화하였다. 중국인들의 상상력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좁은 자아(自我)에 갇혀 있지 않고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대승적 자아로 확대시켰고 불타중심의 신앙에서 인간중심의 신앙으로 탈바꿈하였다.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선(禪)의 핵심을 바탕으로 중국 선(禪)이 발전한 것이다. 마음을 탐구하고 견성(見性)의 가치를 보편화시킨 사람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이다. 마음을 부처로 파악하고 선의 돌쩌귀로 깨달은 혜능은 누구보다 견성(見性)을 강조하였다. 그는 마음보다 자성(自性)에 경도되는 입장을 보였다.

그의 <단경(壇經)>에는 ‘보리자성(菩提自性)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시오. 성불해 마칠 것이요’라고 밝히고 있다.

혜능(慧能)은 자성(自性)을 왕(王)이라고 생각하였고 마음을 그 나라의 신하(臣下)쯤 생각하였다. 그러나 혜능의 위대함은 마음과 자성을 분리하는데 있지 않고 견성(見性)을 성불(成佛)이라고 깨달은 데 있다.
그는 <단경(壇經)>을 통해 ‘이 본성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자성 가운데서 지을지언정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이 자성이 그대로 부처이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으로 인해 중국의 선종(禪宗)은 혁명적 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밖에서 찾고 구하던 사람들에게 자기 안을 성찰하고 탐구하는 인식의 틀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뒷날 혜능의 <단경(壇經)>에는 중국인들의 생명의 지혜가 담겨있고 개인적 해탈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평가하였다.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반드시 진통을 치르는 과정이 있다.

그대가 부처인 걸
혜능 이전에 마음을 탐구하는 수행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달마로부터 4조 도신(道信)선사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인식하였지만, 그 표현 방법이 달랐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이 부족하였다. 특히 우리는 4조 도신(道信)과 우두법융(牛頭法融)의 일화를 상기 할 필요가 있다.

도신선사가 처음 우두선사를 만났을 때 ‘우두’는 깊은 산중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다. 초근목과로 주린 창자를 달래면서 하루 종일 앉아서 마음을 찾고 있었다. 도신은 우두에게 “무엇을 찾고 구하려고 앉아 있는가”하고 물었다. “마음을 찾고 보려고 한다”고 우두는 솔직히 대답하였다.

이 때 도신은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인가”라고 물었다. “마음을 보려고 하는자는 누구이고 찾고 있는 그 마음은 어떤 물건인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마음 하나를 가지고 주객(主客)으로 나누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 물음에 ‘우두’는 깨달음을 열었다.

마음을 부처라고 깨달음의 틀을 완성시킨 분은 마조(馬祖)선사이다.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선언한 분도 마조(馬祖)이다.

마조(馬祖)는 위대한 교육자이고 선(禪)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눈 밝은 선지식이었다. 그의 일언일구(一言一句)에 의해 기존의 가치는 무너지고 완고한 인식의 틀은 깨어져버렸다. 그를 천하(天下)사람을 답살(踏殺)하는 망아지라고 중국 선종은 평가하였다.

혜능(慧能)을 거쳐 법맥을 이어 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아래에서 천하 사람을 답살하는 망아지가 나왔으니, 바로 그가 마조(馬祖)라고 극찬을 하였다. 그리고 마조로부터 선맥(禪脈)을 이어 받은 분이 백장(百丈)선사인데 백장의 슬하에서 훗날 선종을 이끌어 갈 거목(巨木)들이 배출되었다.

황벽(黃檗)과 위산(僞山)이 백장(百丈)선사의 제자들이다. 특히 황벽은 가장 위대한 선사라고 평가받는 임제(臨濟)라는 걸출한 제자를 두는 행운을 갖고 있다.

마조가 만들어 낸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치는 그 당시 부처를 찾고 깨닫고자 하는 참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진폭의 울림은 깊고 넓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곧 부처란 가치의 틀 속에 갇혀 안주하고 집착하는 병폐가 심해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마조는 ‘그것은’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고 부정해버렸다.

정신의 집중도 반복되면 집착으로 변할 때가 있다. 마조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고 부정해 버린 것이다.

마조 선사의 위대함은 마음을 부처라고 선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禪)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데 있다. 그리고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권위를 걷어내고 인간 속에서 성스러움을 찾고 있는 데에서 마조(馬祖)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경전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되풀이 되는 이상적인 인격(人格)인 부처나 여래(如來)보다는 바로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을 조사(祖師)라고 했고 미완(未完)의 여래(如來)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니 여래장(如來藏), 진여자성(眞如自性)이란 추상적 언어를 평상심(平常心)으로 바꾸어 선(禪)을 생활의 종교로 정착시키고 있다.

마조가 말한 평상심이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쓰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그러나 마조가 말한 평상심은 철학적 해석을 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다. 다만 물들지 말라. 무엇을 물들임이라 하는가. 생사심(生死心)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모두가 물들임이다. 그러면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평상심이다.

마조가 말한 평상심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 쓰고 있는 평상심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시비에 물들지 않고 조작하지 않고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쓰기란 어렵다. 일생동안 쓰는 마음이지만 마음은 경계에 따라 흔들리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마음을 조복(調伏)받은 것이 몇 번이나 될까. 그리고 마조가 말한 평상심으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강원도 고성 영은암 회주
오랫동안 선방(禪房)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공부를 한 사람이 그동안 갈고 닦은 지혜로 마음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고 닦는 마음이 인격으로 이어진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마음만큼 풍족한 것도 없다. 그런데 그 마음을 사랑과 자비를 담아 쓰기가 어렵고 미운 사람에게 화해와 용서로 사랑스럽게 쓰기도 어렵다.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것 가운데 빨리 변하고 변덕을 부리는 것이 생각과 마음이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조(馬祖)는 평상심을 철학적으로 해 놓고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스스로 알고 깨닫는 것이 자기인줄 모르고 밖을 향해 찾는다.’

그러나 백장(百丈)선사는 “스스로 알고 깨닫는데 집착하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라고 말한 후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지말라. 부처는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장의 제자 황벽(黃檗)선사는 ‘부처와 중생은 오직 한 마음일 뿐 그 어떤 진리도 없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이다’라고 마조가 말한 마음이 곧 부처임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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