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경과 마음

<아미타경>에서는 ‘물과 새와 나무숲이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 한다’라고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운암 선사의 이 말을 듣고, 순간 견처(見處)가 열린 동산 선사는 그 감흥을 게송으로 나타냈습니다.

정말 신통 하구나 정말 신통해
무정(無情)의 설법은 불가사의 하다네
귀로 들으면 끝내 알기 어렵고
눈으로 들어야만 알 수 있으니

돌이나 나무인 무정이 설법하고 그 설법을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다는 것은 돌과 나무, 눈, 귀 등 일체가 한 마음이므로 눈이 들을 수 있고, 귀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15년 EBS에서 ‘감각’이란 제목의 방송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모든 모습을 우리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눈이 최초로 본 대상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본 대상을 처음 본 대상과 조합하여 뇌가 스스로 대상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상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뇌가 조합해 놓은 모양 즉, 내가 보고 싶은 모양을 본다는 것입니다.

눈에 붕대를 감아서 눈과 대상을 5일 정도 완전히 차단하였을 경우, 뇌 뒷부분에 있는 시신경과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도 뇌의 앞부분에 있는 소리 신경과 해마로 이동합니다. 소리에 의존해 대상을 보게 됩니다. 즉, 눈이 없으면 대상도 없고 뇌의 시신경도 없어지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팡이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소리를 발생시켜, 대상에 반사되는 소리를 듣고 대상의 크기를 귀로 감지하는 것입니다.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러 대상을 조합하여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 즉 반복적인 행위인 습관의 업보(業報)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상이 깨끗하고 더럽고, 예쁘고 밉고, 크고 작은 것이 아닌 것을 내가 분별하는 망념으로 그와 같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하면 즉견여래(卽見如來)이니라. 무릇 있는 모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일체는 분별이 없어 본래 공적하고, 본래 청정하며, 본래 열반이고, 본래 해탈이며, 본래 구족하고, 본래 부처인데 우리들의 6근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망념에 막혀서 참모습의 이 마음을 못 보는 것입니다.
눈에 붕대를 감아서 눈과 대상을 완전히 차단하였을 경우, 시신경과 해마가 소리신경과 해마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시신경과 소리신경이 한 마음으로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 공유,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님이 지팡이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소리를 발생시켜 소리가 대상에 반사되는 것을 듣고 대상의 크기를 귀로 볼 수 있는 것은, 6근과 6진이 한 마음이므로 귀가 듣고, 보고, 냄새 맡으며, 맛을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5근도 이와 다르지 않는 까닭은 마음이 듣고, 듣는 것이 마음이며, 마음을 듣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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