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산악인 엄홍길 대장

엄홍길에게 산은 인생 그 자체였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는 이제 산 아래 사람들의 삶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어느 덧 그의 모습은 산을 닮아 있었다.

히말라야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해발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 있다. 여기에 독립된 봉우리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역시 8000m가 넘는 두 개의 봉우리(얄룽캉, 로체샤르)가 더 있다. 산악인들은 이를 합해 히말라야 16좌라 부른다.

2007년 5월 로체샤르 등반으로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등반에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 그는 16좌 등반을 위해 22년 동안 38번 인간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했다. 성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번 실패하는 과정에서 10명의 가족과 같은 동료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기도 했다.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산 아래 사람들의 삶을 가꾸기 위한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엄홍길 휴먼재단’을 통한 ‘휴먼 도전기’이다.

그 일환인 네팔 사찰 복원을 위한 ‘한국의 작은 부처들’ 프로젝트 시작을 기해 2월 10일 서울 장충동 ‘엄홍길 휴먼재단’에서 그를 만났다. “돌아보니 산이 품을 내주어 내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란 말과 함께 “이젠 산 아래 사람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그의 미소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신 위한 히말라야 도전기
38번 도전 중 18번 실패
수차례 死線에서 돌아와
“정상 향해 욕심 내는 순간,
산은 가차없이 변한다”

사람을 위한 휴먼 등반기
동료 유가족 위해 재단 출범
네팔 오지 학교 건설도 매진
16좌 본 따 16곳 건립 서원
네팔 대지진 당시 구호 앞장

소년 엄홍길이 산에 미친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산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경남 고성에서 농사를 짓던 그의 아버지는 1963년 3살이던 그를 데리고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를 왔다. 도봉산 자락에 등산객을 위한 작은 매점을 했다. 집이 산 중턱이니 날마다 자연스럽게 산을 탔다. 곧 ‘날다람쥐’라고 부를 정도로 산을 잘 타게 됐다. 그는 중학생 때 도봉산 두꺼비 바위서 클라이밍 기초를 배우고 1980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설악산에 들어갔다. 전문 산악인이 되기로 해 대학에 미련은 없었다. 故정양근 선배가 대청봉 밑에서 산장을 운영했는데 일을 도우며 설악산을 탔다. 아무리 험준한 산도 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던 때였다.

Q: 엄홍길이 산에 미친 이유는 ?

“산은 저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또 살아갈 에너지와 지혜, 인생의 좌표를 제시해주는 멘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까지 평생을 함께 해온 동반자이기도 하죠. 어려서부터 힘들 때면 산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산에 가면 그 기운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산장 생활 동안 전국 산악인들과 인연을 맺은 그는, 비수기면 다른 산을 찾아 등반을 했다. 많은 산 정상에 오를수록 히말라야에 대한 꿈은 더 커져갔다.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바로 군대였다. 그는 해군특수전단(UDT)에 지원했고, 이는 산악인으로서 그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수영을 통한 폐활량과 근력은 이후 그의 히말라야 등반의 기반이 됐다. 1984년 9월 엄홍길은 제대를 하고 그해 연말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했다. 1년간 혹독한 훈련을 했고, 1985년 첫 도전이 있었다.

Q: 왜 히말라야인가?

“1977년 고등학교 1학년 때 故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어요.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방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서 태극기를 든 신문사진을 오려 붙이고 보고 또 보았죠. 그 날 이후로 온통 히말라야 빙벽을 올라가는 모습만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가 심했죠. 어머니는 절에 가서 무사귀환을 위한 기도를 하시곤 했죠. 이런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에 처음 히말라야 갈 때는 단순 업무라고 하기도 했어요.”

열망은 높았지만 그는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1985년 첫 히말라야 등정부터 이 가르침을 뼈저리게 배웠다. 경험부족과 기상변화로 실패한 이후 재도전한 이듬해, 중도에 동료 셰르파(티베트족 계열의 조산족 이름, 현재는 히말라야 등산에 없어서는 안될 등반 도우미 의미로 알려져 있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포기했다. 이 밖에 산에서 숱한 고난을 만났다. 1998년 안나푸르나에 네 번째 도전 할 때에는 빙벽에서 미끄러져 오른발이 180˚ 돌아갔다. 왼발의 힘만으로 겨우 하산했다. 그 휴유증으로 지금도 오른발에는 힘이 전해지지 않는다.

도봉산 일대에서 자란 그는 아시아 최초로, 아울러 인류 역사상 8번째로 히말라야 8000m 14좌에 완등했고, 위성봉 얄룽캉과 로체샤르를 완등하며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했다. 엄홍길은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정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이 정상을 잠시 빌려주는 것일 뿐 사람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자신이 산에 올라간 것도 산이 자신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이자 국민생활체육회 이사, 조계종 산악회장 등으로 있다.

Q: 실패해서 산을 내려올 때 어땠는가? 실망감도 컸을 텐데…

“물론 실망도 했지요. 하지만 성공만 계속 됐다면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그 실패를 통해 간절함을 확인하고, 또 순응에 대해 알게 됐지요. 실패를 거울 삼아 순응하는 법을 배운 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저를 만든건 열 여덟 번의 실패입니다.”

그는 산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순간, 인자하게 보이던 산은 무서운 사신(死神)으로 변한다고 했다. 산 앞에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는 그는 마치 산을 오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과도 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만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며 앞만 보고 갈 때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지 못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산에서의 성찰은 엄홍길을 산 아래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히말라야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내일의 행복을 위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사람’을 인생의 17좌로 정했다.

Q: 이젠 마음을 내려놓은 것 같은데?

“애초에 세웠던 목표가 16좌이고 여기까지 산이 허락해 줬으니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아야죠.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진즉에 사단이 났겠죠. 산에서도 하산이 중요합니다. 정상이란 목표를 보고 전진 한 뒤 방종한 마음이 사고를 불러오죠. 한번은 도저히 하산을 못하는 상황에도 처했어요. 하산길에 ‘살아서 내려가게만 해주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하고 빌었어요. 그런 마음에 한발 한발 디디다 보니 캠프가 보이더군요.”

그의 뇌리 속에는 함께 등반하다 죽은 동료들의 유가족들이 망연자실하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산에 오르기를 잠시 멈춘 그는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을 통해 유가족들을 비롯해 셰르파 가족과 네팔 사람들을 위한 나눔실천에 나섰다. 16좌를 본 따 네팔에 열여섯개의 학교를 지어주는 휴먼스쿨 프로젝트도 활발히 진행했다.


내 人生은 나눔과 회향의 山으로 향한다

엄홍길 대장이 팡보체 휴먼스쿨에서 네팔 아이들과 밝게 웃고 있다.

불교 사원 복원에도 앞장
히말라야 마을 사원 붕괴
‘한국의 작은부처들’ 시작
사원 복원 위해 모연 나서

“룸비니서 부처님이 저에게
또 다른 목표 준 것이라 생각”

Q: 처음 학교를 지은 곳이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실족한 셰르파의 고향이다.

“팡보체는 에베레스트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입니다. 처음 사고로 잃은 동료의 고향이지요. 그는 당시 결혼한지 3개월 밖에 안됐었습니다. 그쪽에 무언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보이니 특히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부모들처럼 포터와 셰르파로 사는게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었죠. 바로 학교였습니다. 현지인들이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고지대에 학교를 짓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도했습니다.”

엄홍길 휴먼재단은 현재 11곳에 휴먼 스쿨을 준공했다. 기공된 곳은 총 15곳으로 조만간 16곳이 완공될 예정이다. 그가 16좌 완등을 선물한 히말라야에 16개의 휴먼스쿨을 짓기로 한 것은 히말라야 산과 약속했기 때문이다. 학교 뿐만 아니라 기숙사와 의료시설 등 부대시설 완비까지 일은 ‘산’처럼 많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고산병 등으로 고생하는 현지인과 산악인을 위해 3450m 높이에 오지 병원을 건립하고, 2015년 강진으로 인해 무너진 사찰 재건과 이재민 등을 위한 피해 복구 지원 사업, 셰르파 유가족 자녀를 대상으로 한 장학금 사업 등에 전력투구하며 민간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Q: 네팔 대지진 당시에는 대한적십자 긴급구호대로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갔다.

“네팔은 저에게 정말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곳인데 나몰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진 당시 학교가 현지인들의 피난처가 됐고, ‘네팔에 학교짓기를 잘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들 사이에 구호활동을 하는 건 위험하지만, 뭐… 제가 한 일 중 위험하지 않은게 있었겠습니까.”

Q: 네팔 사람들에게서는 무엇을 보았나?

“네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불교적인 영향이 크지만 첫째는 욕심이 없고, 둘째는 현재에 만족하며 살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적습니다. 국가적인 대재난을 당했는데 모두 원망없이 덤덤히 자기 자리서 자신의 일을 하더군요. ‘누굴 탓하고 원망하겠느냐, 자연재해인데…’ 이런 마음이 비쳤습니다. 가령 구호물품을 배급할 때에도 긴 줄을 섰다가 자신의 앞에서 물품이 동이 나도 흔히 있는 ‘왜 나는 안주느냐’ 등 다툼 하나 없었습니다. 작은 하나라도 서로 원망하고 다투는 우리네 모습이 비쳤어요.”

그는 올해부터 네팔 지역 사찰을 복원하는 사업도 전개 중이다. 이름하여 ‘한국의 작은 부처들’ 프로젝트다. 첫 번째로 에베레스트 쿰부 팍팅(2800m)에 위치한 ‘드락토르 도르제 포트랑’(Draktod Dorje Phodrang) 사원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활동에 2월 5일 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이 신도들의 마음을 모아 기금 20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엄홍길 대장은 ‘한국의 작은 부처를’ 프로젝트를 통해 네팔 지역 사찰 복원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Q: 사찰 복원을 위한 프로젝트를 소개해달라.

“학교 건립으로 바쁘게 네팔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어요. 혹시 사찰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것을 아느냐는 현지 동료의 말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었습니다. 쿰부 팍팅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해발 2800m 지대의 마을입니다. 여기에는 16세기에 지은 사원이 있는데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상태입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가 동료들과 봤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팡보체와 타메 등 4000m가 넘는 지역에도 사찰 2곳이 있지만 이 곳이 피해가 가장 심했습니다. 무너지기 직전에 각목을 대어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사채에 스님들이 있지 못하고 다른 곳에 기거하는 상황입니다. 사원을 해체분해 해야 하는 상황이죠.”

Q: ‘한국의 작은 부처들’ 의미는 무엇인가?
“2015년 룸비니에 10번째 휴먼스쿨을 지었거든요. 그때 룸비니에서 부처님이 ‘학교 짓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사찰도 하나 지어봐라’하고 새해 목표를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로젝트를 막 시작한 단계라 아직 모인 기금이 없지만 불자들이 힘을 모아준다면 가능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큰 단체 뿐만 아니라 한국불자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사찰 재건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한국의 작은 부처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네팔 사원복원에 나선 엄홍길은 지금도 한달에 서너번은 산과 마주한다. 조계종 산악회 회장으로 불자들을 산으로 이끌기도 하고 ‘DMZ평화통일 대장정’ 등 산과 관련된 다양한 나눔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이 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국내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산행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엄홍길은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 정신을 잃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도전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인간 언어 중 가장 아름다운 말로 꼽는 단어는 ‘도전’과 ‘나눔’이다.

Q: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아직은 정착되지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된 것이 4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경제 성장을 이루고 발전한 데는 많은 국가들의 도움이 있었지요. 나눔과 기부는 또 다른 나눔과 기부로 이어집니다. 팡보체에서 우연히 만난 다리를 저는 아가씨의 수술을 한국까지 와서 성공적으로 해줄 수 있던 것도 네팔에서, 한국에서 손을 내미는 인연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간호학교 수업을 마친 뒤 팡보체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작은 나눔과 도움이 우리 사회에 확산됐으면 합니다.”

Q: 끝으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왜 그토록 산에 올라야 했을까.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공약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안지켜도 그만인 약속이지만 제 자신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 정도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각오를 다지는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젊은 친구들이 인생의 목표와 꿈을 향해 힘차고 멋지고 아름답게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변을 항상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히말라야와 약속했다는 네팔 내 16개 학교 건립 꿈도 어느덧 9부 능선에 도달했다. 그러던 찰나 또 다른 능선이 나타났다. 혹시 이 능선 넘어 또 다른 꿈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이미 그는 나눔과 실천의 정상을 향해, 휴먼재단이란 베이스캠프를 뒤로 다시금 나섰다. 덕분에 엄홍길의 피부는 여전히 까맣게 그을려 있다.
후원 : 한국의 작은부처들 프로젝트 (우리은행 1006-380-118848: 엄홍길 휴먼재단)  (02)736-8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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