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道紀行- 초전법륜의 녹야원

붓다의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의 전경. 멀리 다메크 대탑이 보인다. 다메크 대답은 미완성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오늘날 유적지는 사원 지구와 승원 지구 그리고 다메크 스투파의 3군데로 구획되어 나그네를 맞는다.
깨달음을 찾아 걸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길. 깨달은 다음에도 계속 걸었다. 길은 항상 머나먼 길. 길은 멀어야 길다웠다. 붓다는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를 떠났다. 평생 안주(安住)라는 말과 거리를 두었다. 고행 끝에 몸은 늙어 노쇠했다. 보드가야 부근 우루벨라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길, 중간에 어머니의 강인 갠지스를 건너야 했다. 직선거리로 200km 정도. 일주일동안 걸식하며 맨발로 가는 길. 붓다는 왜 바라나시로 갔을까. 스승을 버리고 떠난 제자 다섯 비구를 위해서였다. 중생의 부처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깨닫고도 걸었다. 그것도 맨발로. 녹야원이라 불렀다. 초전법륜의 거룩한 땅이다.

“수행자들이여. 괴로움이라고 하는 진리(苦諦)가 있다.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늙는 것도 괴로움이며, 병을 앓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안타까움도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우리의 인생 전부가 괴로움이다.”

정말 고해(苦海)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괴로움의 집적이 아니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물론 역설적 표현이다.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살아볼 가치가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지옥이 있기 때문에 극락이 있다. 상대적 개념이다. 고해를 사랑하면 인생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녹야원에서 내린 첫 설법은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와 더불어 팔정도(八正道)이다. 물론 모두 부분에서 강조한 것은 중도(中道)였고, 그리고 팔정도로 이어졌다.

다섯 비구를 위해 길 떠난 붓다
걸어 도착한 녹야원서 첫 전법
18세기 홍수로 현재 유구만 남아
‘사슴의 왕’이란 語原가진 녹야원
수많은 주춧돌은 상념을 낳는다

중도사상이란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에서 강조했듯,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이다. 그래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부처나 마구니를 함께 다 버려야 합니다. 부처와 마구니가 서로 옳다고 싸우면 양변에 집착했기 때문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중도사상은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인 것이다. 중도는 해탈로 가는 직행 길이란 말인가. 중도! 붓다께서 처음으로 설파한 사상. 바로 불교사상의 첫 번째 키워드는 중도. 중도를 말씀하신 사르나트를 거닌다.

녹야원(鹿野苑)이라고 번역한 사르나트. 바라나시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이다. 오늘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 가면 힌두교들의 성지답게 이색풍경을 볼 수 있다. 강의 상류에는 시체 화장장이 있어 항상 불길이 치솟고 있다. 죽음의 잔재가 떠내려가는 아래쪽 강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강물에 온몸을 담그면서 ‘씻는다.’ 내 눈에는 흙탕물 같아 절대 몸을 담그지 않을 것 같은데 그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생사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강이다. 갠지스 강에 배를 띄워 먼발치에서 이런 장면을 음미한다. 해질녘 강가에서 펼쳐지는 힌두교도들의 의식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그렇게 장엄한 퍼포먼스도 없을 듯하다.

바라나시 시가지를 거닌다. 사람보다 소들의 행렬이 먼저 다가온다. 어슬렁거리는 소. 소 한 마리가 도로 한복판에 누워 쉬고 있어도, 그러니까 차량 행렬을 막고 있어도, 운전사는 불만을 내색하지 않는다. ‘오, 소 하느님,’ 오히려 공경의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힌두교의 독특한 광경이다. 그들에게 있어 소는 하나의 신, 그래서 사람이 굶어 죽을지언정 쇠고기를 먹을 수 없다.

사르나트에 갔다. 내 눈에 사슴이 보이지 않는다. 녹야원이라면 사슴 천국이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마당처럼 사슴 떼들이 어슬렁거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날 녹야원에서는 사슴을 만날 수 없다. 그냥 폐허이다. 사르나트라는 말은 ‘사슴의 왕’이라는 ‘사랑가나타’에 어원을 두고 있다.

<본생담>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사슴고기를 좋아하는 바라나시 왕을 위해 사슴들은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 스스로 희생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새끼를 밴 사슴 차례가 왔다. 이에 붓다께서 대신 희생하려고 사슴으로 태어났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결국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는 감동의 스토리이다.

사슴은 붓다인가. 녹야원에서 사슴을 볼 수 있다면, 바로 붓다와 만난다는 뜻인가. 그래서 먼지 묻은 내 눈에는 사슴을 볼 수 없었다는 것. 그것도 모르고 사슴 보겠다고 여러 차례 사르나트에 갔었으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먼가보다.

초전법륜의 땅 사르나트를 거닌다. 무너진 건축의 잔해 사이로 뜨거운 태양만 강렬하다. 어느 곳이 첫 번째 설법의 장소였을까. 속인의 짧은 생각이어서 그랬을까. 왜 현지에 도착하면 이런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할까. 18세기말 대홍수는 파괴의 원흉이다. 떠내려 간 다리를 다시 세우려고 사람들은 녹야원 석재를 뜯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적은 폐허로 대체되었고, 거대한 다메크 스투파 정도만 살아남았다.

녹야원의 유구들. 18세기 대홍수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다리 보수를 위해 녹야원의 석재들을 가져다 썼다.
오늘날 유적지는 사원 지구와 승원 지구 그리고 다메크 스투파의 3군데로 구획되어 나그네를 맞는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첫 설법지로 꼽히고 있다. 더불어 다메크 스투파는 오늘날 상징적 건조물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기원전 3세기의 아쇼카 시대의 기초가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아쇼카왕의 석주의 기둥이 남아 있다. 파손된 석주 꼭대기 부분의 사자 조각(현재 사르나트 박물관 소장)은 오늘날 인도의 국장(國章)이다. 4마리의 사자가 각기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모습, 한마디로 걸작이다. 마치 사자가 살아 있어 그야말로 사자후(獅子吼)를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생동감으로 넘치는 조각술은 가히 세계적 자랑거리다.

이 사성수(四聖獸)의 주두(柱頭) 아래 4군데의 법륜과 코끼리, 수소, 말, 사자 같은 동물이 새겨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물론 법륜은 불법의 상징이지만 수레바퀴가 아닌가. 수레는 역시 길 위에서 기능하는 운반용이다. 아쇼카 석주의 사자와 원형 조각은 정말 아름답다. 인도의 상징으로 삼을 만한 걸작이다.
사르나트 박물관에 가면 또 다른 걸작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초전법륜인 불좌상’이다. 굽타시대 작품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원형 두광에 결가부좌한 붓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첫 법문의 80세에 이르는 노구의 붓다 모습과 달리 이 불상은 청년 같다.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 꽃미남처럼 멋있을까. 불상에서 고행의 과거 모습은 보이지 않고 평화 그 자체만 오롯이 담겨 있다. 대좌에는 중앙의 법륜, 그 좌우에 붓다의 첫 제자인 5비구, 여인과 아이의 공양자, 사슴 2마리가 새겨져 있다. 사르나트의 붓다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첫 번째 법문을 내렸을까.

물론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불교조각은 굽타시대 5세기경 작품을 비롯 상당수에 이른다. 투명한 옷, 하지만 옷 주름이 표현되지 않은 입상의 붓다 등 눈길을 끄는 작품은 많다. 이들 조형물이 원위치에서, 그러니까 건축물이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면서, 원래대로 보존되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녹야원을 걷는다. 주춧돌이나 기단부만 남은 건축의 잔해를 본다. 폐허에서 옛 영광을 본다. 폐허에서 중도를 볼 수 있다면, 파괴의 신도 사랑하란 의미인가. 그러니까 폐허의 마구니까지? 무너진 주춧돌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켜 준다. ‘잔해’를 넘어 또 다른 잔해, 거기에 다메크 스투파가 있다. 거대한 원형 탑, 직경 28m에 높이 약 43m나 된다. 거대한 집적이다. 탑은 점토와 석재를 쌓아 둥그렇게 만들었다. 외부 장식은 기하학적 문양이 있는 벽돌로 마감했다. 특이한 것은 아랫부분의 마감에 비하여 상부는 그렇지 않아 대비를 이룬다. 이를 두고 ‘미완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다메크는 도중하차한 건축인가. 흥미롭다.

우리 속담에 ‘공든 탑 무너지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탑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성주괴공은 진리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폐허를 지향하는 것인가? 무너지기 위해 세우는 탑. 나는 녹야원에서 사슴 찾기를 포기해야 했고, 또 탑 보기를 포기했다. 다메크에서 탑돌이를 하면서도 나는 탑을 돌지 않았다. 그냥 걸었을 뿐이다. 매일 걷는 길처럼 걸었을 뿐이다.

“수행자들이여. 잘 알아야 한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 장애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 장애인가? 첫째는 마음이 욕망의 경계에 집착해 쾌락에 빠진 것이니,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바이며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익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해 고행에 빠지는 것이니, 이는 출가의 목적과 수단을 전도한 것으로 심신이 모두 고통의 과보에 떨어질 뿐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해탈의 원인이 아니며, 욕망을 소멸하는 원인이 아니며, 부처를 성취하는 원인이 아니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치우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 초전법륜의 사르나트 폐허에서 들은 사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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