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한 그루의 나무에는 나무 몸통, 나무 줄기, 나무 잎, 나무 열매가 있다. 몸통, 줄기, 잎, 열매는 모두 나무의 다른 이름이므로, 우주 일체 존재에 붙여져 있는 모든 이름은 우주의 다른 이름 즉 별칭인 것입니다.

“이 마음은 허공과 그 수명이 같아서 설령 육도를 끊임없이 윤회하여 각양각색 형체로 바뀌어 태어나도, 그 마음 만은 결코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득 미혹한 마음을 일으켜 갖가지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으며, 본성을 잃은 채 속세의 풍류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신은 생멸하지만, 영각(靈覺)의 성품은 생멸하지 않는다.”

중생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그것은 어리석고 미혹한 업(業)을 짓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 미혹한 업이란,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생각, 즉 6근과 6진이 다르다는 미혹한 생각으로 인해서 ‘부처와 중생’, ‘생과 사’, ‘크다 작다’, ‘있다 없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분별망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일어나는 모든 생각 자체가 이분법인 분별망념이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혹한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은 우리들이 어떤 훌륭한 풍경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볼 때 드러납니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여, 좋아하는 마음과 구하려는 마음에 가로 막히게 됩니다.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다만 좋아하는 나의 생각과 느낌을 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보잘 것이 없고 아름답지 못한 풍경이나 모습을 볼 때는, 그 모습을 싫어하여 벗어나려는 마음에 가로 막혀서 참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싫어하는 생각과 느낌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참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대(四大)의 육신은 생멸하지만, 분별이 없는 영각의 성품인 참 마음은 생멸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지금 이 본성을 깨닫게 되니, 우리는 이를 이름 하여 장수(長壽) 또는 여래무량(如來無量) 혹은 본공부동성(本空不動性)이라고 일컫는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은 오직 이 성품을 도(道)라 하여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 자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작용은 자네의 본성 또는 본심이라고 이름 하는 것인데, 이 마음을 떠나 따로이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하는 것은 이 마음입니다. 5온의 색, 수, 상 행, 식에서 색과 수는 견문에 해당하고, 상과 행은 느낌에 해당하며 식은 앎과 같은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5온이 공하고 무(無)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5온이 본래 이 마음의 별칭이므로 ‘공하고 없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5온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5온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은 없는 것도 아니므로 5온이 마음이고, 마음이 5온이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니라. 마땅히 머물지 않으면 그 마음이 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생각을 불문하고 우리들이 일으키는 생각은 스스로 일어 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오직 대상에 의지해서 일어나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고, 보는 것이 눈이며, 스마트폰을 본다고 하여, 6근의 작용이 모두 이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보고, 보는 것이 눈이며,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아니고, 실은 마음이 보고, 보는 것이 마음이며,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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