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수 송춘희 (81·백련장학회 회장)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세월동안 노래한 불자가수 송춘희 씨의 모습에서는 여전히 젊었을 때의 정열이 비쳐진다. 어느덧 팔순을 맞은 원로가수지만 그녀의 음성포교에 대한 열정은 시간을 거스르는 듯하다.

음악이 없는 곳이 있을까. 노래가 없는 곳이 있을까. 글 말고 음악, 말(言) 말고 노래여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좋은 음악과 노래를 만들고 불러주는 사람들은 고마운 이들이다. 그리고 그 음악과 노래가 전법에 쓰인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60여 년 동안 대중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고, 삼십 년 넘게 찬불가를 부르며 힘겨운 이들을 돕는 이가 있다. ‘수덕사의 여승’으로 한국가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송춘희 씨다.

이역만리 미국서 만난 불교
미국 공연서 광옥 스님 인연
불교 입문하며 마음공부
숭산 스님 만나 수계·법명
백련화 불명으로 불교 귀의

찬불가 포교 본격 시작
1983년 귀국 후 수덕사 찾아
찬불가음반 1집 발매
‘수덕사의 여승’으로
스타 되고 불교 귀의 단초

 

인생 바꾼 노래…‘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1956년 가을, 서울 답십리 경미극장.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손엔 장바구니를 든 열아홉 살 소녀가 극장 벽에 붙은 벽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단원모집’, 소녀의 눈은 그 네 글자에 붙들렸다. 악극단 단원모집 벽보였다. 소녀는 곧바로 악극단을 찾아간다. 소녀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여섯 째 동생인 한 살배기를 등에 업은 채 노래를 부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교수가 꿈인 소녀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부친의 사업이 실패했다. 가세는 급작스럽게 기울고 부모님은 충격으로 건강을 잃었다. 맏딸인 소녀는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꿈은 그야말로 ‘꿈’이 되어버렸고 눈앞엔 감당하기 힘든 현실뿐이었다. 평소 노래와 연극, 무용 등을 좋아하던 소녀에게 악극단 벽보는 한 줄기 빛이었다. 소녀는 일주일 뒤에 합격통지를 받고 3일 후에 첫 공연길에 오른다. 소녀의 이름은 송춘희.

1985년 광주소년원 위문서 노래부르는 모습.
또 한 번 인생 바꾼 노래…‘수덕사의 여승’
수원으로 첫 공연을 떠나는 날. 소녀는 눈물로 쓴 편지 한 장을 부모님께 남기고 집을 떠난다. 꿈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소녀는 좌판을 열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슴에 품고 차가운 세상으로 나선다. 이별이었다. 기약은 없었다. 성공만이 기약이었다.

극단 생활은 쉽지 않았다. 건빵 하나로 3일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러 극단을 거치며 가수의 꿈을 키워간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가수의 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극단생활로는 가수의 꿈을 이루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6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1962년, 그녀는 마침내 ‘삼다도 편지’와 ‘울릉도 아가씨’라는 곡으로 첫 앨범을 발표한다. 하지만 앨범은 실패한다. 가수의 길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기로에 선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한 살배기 동생을 업고 노래를 불렀던 송춘희였다. 가수의 꿈은 그녀의 전부였다.

간절한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듬해 그녀는 KBS 라디오 드라마 ‘남산골 샌님’의 주제곡을 부르게 된다.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이후로 각 방송사의 드라마와 영화 주제가 20여 곡을 부르며 자신의 이름을 가요계에 알린다. 그리고 꿈의 무대라는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서는 등 가수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4년 그녀는 일본공연으로 교포와 일본 현지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2집 앨범 ‘영산강 처녀’가 히트하면서 대중에게 가수 송춘희를 확실하게 알린다.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는 당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함께 가장 많이 전파를 탔던 노래 중의 하나다.

1966년 봄, 가수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송춘희는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30여 년 찬불가 보급 불사
‘법화경노래’ 등 100여 곡
60년 간 총 1000여 곡 발표
군·교도소 찾아 음성공양

장학사업도 병행하다
백련장학회 설립 나눔 실천
도움받은 장학생 취직해
월급 모아 찾아오기도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지금의 송춘희를 있게 한 ‘수덕사의 여승’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흰 고깔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송춘희가 부르는 ‘수덕사의 여승’은 가요차트에서 10주 넘게 1위를 지켰다. 그해 송춘희는 10대 가수상을 수상한다. 송춘희는 이제 평범한 가수가 아니었다. 스타였다. ‘수덕사의 여승’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각종 무대와 방송이 송춘희를 찾았고 그녀는 바쁜 날들을 보낸다. 어느 날, 그녀가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자 진행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수덕사에는 가보셨나요?”

“아직 못 가봤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수덕사에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순간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TV를 보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난센스였다. 수덕사는커녕 그녀는 불교의 ‘불’자도 몰랐다. 집안은 기독교 일색이었다. 외조부를 비롯해 다섯 명이 목사였다. ‘수덕사에 가보았냐’는 질문은 공연과 방송 때마다 그녀를 따라다녔다. 질문이 거듭되면서 그녀의 마음속엔 짐이 쌓이기 시작한다. ‘수덕사의 여승’은 가수 송춘희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야말로 송춘희에겐 소중한 노래였다. 송춘희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수덕사는 ‘숙제’였다.

“그래, 수덕사에도 한 번 안 가보고 수덕사의 노래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녀는 수덕사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스타 송춘희의 일정에서 당시 예산의 수덕사를 다녀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의 짐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녀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서울에 있는 작은 절을 찾아간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 편히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춘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마당을 밟는다.

“법당에 들어 부처님을 보는데 왠지 낯설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수 송춘희는 그렇게 부처님을 처음 만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의 ‘불자 송춘희’는 그 시절에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 훗날 가수 송춘희는 말한다.

“‘영산강 처녀’가 송춘희를 가수로 만든 노래라면, ‘수덕사의 여승’은 송춘희를 불자로 만든 노래죠.”

법무부 교정대상을 수상한 송춘희 회장.
백련화 송춘희…광옥 스님과 숭산 스님 만나다
송춘희는 1971년까지 여섯 차례 연속 10대가수상을 수상했고, 이후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1976년 그녀는 미국 LA 한인회 초청으로 8·15 광복절 축하공연을 간다. 당시 미국 교민들을 위한 한국 연예인들의 공연은 처음이었다. ‘수덕사의 여승’은 여전히 인기였다. 한국에서 공연단이 왔다는 소식에 미국 각지의 교민들이 공연을 요청했다. 공연은 LA에서 끝나지 않고 예정에 없던 다른 지역으로 이어졌다. 공연단은 하와이 공연을 끝으로 귀국길에 올랐지만 송춘희는 미국에 남았다. LA의 한 클럽으로부터 공연 제의를 받았다. 단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공연은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면서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연으로 송춘희는 1983년까지 무려 8년 동안 미국에 머물게 되는데, 송춘희의 삶은 그때 전기를 맞는다.

1977년. 그녀는 캐나다 토론토 공연길에 오르는데, 공연장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난다. 한국비구니 최초의 국제포교사 자격으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포교를 하고 있던 광옥(前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스님이다. 그녀는 먼 이국에서 스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신기했다. 이 먼 곳에도 절이 있나 싶었다. 스님으로부터 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 옛날 절에 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캐나다 공연 일주일 동안 광옥 스님의 절에서 스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스님이 직접 공양도 내주시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부처님 일대기를 이야기해주셨는데,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재미있었어요.”

아쉬운 만남을 뒤로 하고 스님과 헤어질 때 스님은 그녀에게 책 두 권을 건넨다. 〈부처님 일대기〉와 〈알기 쉬운 불교〉라는 불교 입문서였다. 시애틀로 돌아온 그녀는 스님이 주신 두 권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스님의 이야기(법문)도 그렇고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설명할 수 없는 평온과 이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녀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이끌며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숭산 스님을 만나게 된다. 당시 숭산 스님은 미국 달마사에 주석하며 재미 홍법원장을 맡고 있었다. 숭산 스님이 가수 송춘희를 만나기 위해 LA에서 시애틀까지 날아온 것이다. 찾아가도 만나기 어려웠던 숭산 스님이었다. 그런 스님께서 비행기로 2시간 반이라는 먼 길을 자처한 것은 광옥 스님의 부탁 때문이었다.

“송춘희 씨 불자 만들러 왔죠.”

어리둥절해하는 송춘희에게 숭산 스님이 던진 첫 마디였다. 가수 송춘희는 처음 보는 숭산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백련화’라는 불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날, 스님으로부터 금과옥조의 법문을 듣는다. 그 옛날 작은 절에서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광옥 스님을 만나 부처님의 일대기를 들었을 때처럼, 그녀는 사막에서 샘을 만난 듯 모든 것이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다. 짧은 만남들이었으나 그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스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천수경〉을 외고,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도 사시예불, 저녁예불은 기본이고 사경과 108배 등 견고한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생을 바꾸는 것이었다.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그 뒤로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제 몸과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었어요. 아팠던 몸과 지친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기도하는 것이 점점 즐거웠어요. 이후로 기도와 절은 제 일상이 됐지요.”

2001년 경비교도대 위문공연 당시.

새로운 원력, 찬불가 부르기
1983년, 그녀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고국 땅이 그립기도 했지만, 부족한 불교공부를 해보고 싶었고, 가수로서 불법(佛法) 홍포를 거들고 싶었다. 그녀는 대중가요가 아닌 찬불가를 취입하고 싶었다. 새로운 원력이었다.

그녀는 귀국하고 얼마 후 드디어 수덕사를 찾는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지 18년만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수계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을 시작으로 대원불교대학, 포교사대학, 전법대학, 일붕삼장대학원, 해동불교범음대학,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를 수료했다.

1983년, 그녀는 찬불가 음반 1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녀의 찬불가 보급 불사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후로 5종의 찬불가 음반을 발표했고, 2008년에는 〈법화경〉 28품을 찬불가로 만든 〈법화경노래〉를 출반했다. 서울 법화정사 주지 도림 스님의 〈법화예찬 108 참회문〉을 저본으로 해 동료 불자가수들과 함께 만든 음반(CD 3장)이다.

가수 송춘희는 … 1956년 악극단에 입단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곡으로 ‘영산강 처녀’, ‘수덕사의 여승’, ‘할아버지 쌈짓돈’ 등이 있으며, 찬불가를 포함해 1000여 곡을 발표했다. 1983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찬불가 보급과 백련장학회 설립 등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1992년 일붕삼장대학원 삼장전법사과정을 졸업했고, 199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를 수료했다. 1984년 영등포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위촉됐으며, 현재 백련장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66년 국제 가요대상 민요가수상, 1967년~1971년 10대 가수상, 2005년 세계 문화예술인상(민요가수 최고상), 2011년 한국을 빛낸 사람들 등을 수상했다. 2006년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나는 가수가 되리라〉를 출간했다.
은혜는 은혜를 낳고…아름다운 회향
“군부대는 매주 가고 있어요. 장병들을 위해 노래도 부르고 법사로서 법문도 하면서 뜻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매주 가지는 못하지만 교도소 공연도 꾸준히 가고 있고요.”

가수 송춘희의 불사 원력은 찬불가에서 끝나지 않았다. 적지만 찬불가로 인해 모인 정재로 다섯 개의 군법당을 지었고, 30년 넘게 군장병을 위해 음성공양과 법문을 하고 있으며, 교도소 교정활동도 하고 있다. 그리고 1991년부터는 백련장학회(회장 송춘희)를 설립해 소년소녀가장과 불우학생 등 30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8남매의 맏이인 그녀의 마음에는 힘겨웠던 시절의 동생들 모습이 늘 애잔하게 남아있다. 그런 그녀에게 힘들어하는 소년소녀들은 모두 그녀의 동생들이다. 백련장학회는 그녀와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의 십시일반으로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다.

“제가 뒤늦게 부처님 가르침에 눈을 뜬 것은 숙연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수덕사의 여승’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래서 불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모두 부처님 은혜였습니다. ‘수덕사의 여승’이 그랬고, 광옥 스님, 숭산 스님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도와주신 여러 스님과 불자님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따뜻하게 일으킨 마음은 다시 따뜻한 마음을 낳았다. 어느 겨울날, 그녀는 장학생 중 한 명으로부터 빨간 내복 한 벌을 받는다. 장학금으로 무사히 학업을 마친 학생이 첫 월급으로 사 온 것이다. 경찰관이 된 청년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송 회장에게 너덜너덜해진 종이봉투 하나를 건넨다. 언젠가 만나면 주려고 늘 가지고 다녔단다. 청년은 군복무 시절 송 회장이 해온 떡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전역을 하고 경찰이 된 청년은 첫 월급에서 떡값 십 만원을 떼어 봉투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송 회장이 다시 부대를 찾을 때 떡값에 보태기 위해서였다.

“힘겨운 청소년들이 자라서 사회 일꾼이 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껴요. 노래를 통해 불법을 전하는 일도, 힘겨운 이들을 돕는 일도 모두 제가 받은 불은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2006년 백련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그녀는 2006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다시 태어나도 나는 가수가 되리라”고 했다. 올해로 여든 한 살을 맞은 그녀는 그동안 100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그 중엔 100여 곡의 찬불가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송춘희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부른 1000여 곡의 노래는 모두 찬불가가 아닐까. 불교의 ‘불’자도 모르고, 수덕사엔 가본 적도 없이 ‘수덕사의 여승’을 불렀던 가수 송춘희가 지금 찬불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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