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④

존중은 사랑의 근원
필자는 나이 60을 넘기면서 종종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내 나이 값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자신에 대해 좀 더 겸허해지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삶이 귀중했지만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기엔 미흡함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삶의 중심이 너무 나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기적 자아에 갇혔던 사람도
명상으로 관용·존중 일깨우면
초의식이 세상과 연결됨을 느껴
자기 행복이 세상으로 확대 가능

한 집단상담에서 구성원인 수녀가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쉬는 시간에 다른 구성원인 스님이 수녀의 우울한 모습에 대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수녀는 집단에 오기 전 나무로 만든 새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을 본 신자가 “수녀님은 그것이 필요 없잖아요. 저에게 주세요”라고 하였다. 그 순간 안주면 그런 물건에 욕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까봐 주었고, 그 뒤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그렇다면 집단이 끝난 뒤 그 신자에게 가서 되돌려 받으세요. 그리고 주기 싫으면 주지 마세요”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녀의 얼굴은 활짝 피어났고 크게 웃었다. 스님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니 너무 기뻤고, 그 신자에 대한 무거웠던 감정이 가벼워지면서 나무새를 돌려받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필자도 몇 년 전 국제학술행사에서 중국의 발표자로부터 빨간 넥타이를 선물 받았다. 한 번도 빨간 넥타이는 매어보지 않았지만 다음에 매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며칠 뒤 큰 아들이 와서 그 넥타이를 보더니 “이 빨간 넥타이 안 보던 거네요. 아버지는 넥타이가 많으니 이 넥타이를 저에게 주세요”라고 했다. 그 순간 안 된다고 하면 넥타이에 욕심이 많은 아버지라고 할까봐 주고 말았는데,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니 그 빨간 넥타이를 매고 싶었는데 매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내가 매어보고 나중에 줘도 될 텐데 너무 성급하게 주는 바람에 매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서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빨간 넥타이는 매어보지 못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수녀는 스님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존중받음으로써 나무새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신자로부터 나무새를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는 아직까지 빨간 넥타이를 매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아마도 수녀는 다음에 그와 유사한 상황이 되면 편안하게 자기의 것을 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선뜻 주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 존중받게 되면 사랑의 힘이 생겨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마음이 생겨난다. 우리의 마음은 매 순간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으로 이끄는가 하면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이미 사랑의 행위가 그의 삶이 된 사람도 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어느 날 플랫폼에서 열차를 타려고 할 때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열차 아래로 떨어졌다. 간디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른 쪽 신발을 마저 떨어뜨렸다. 만일 우리가 이와 유사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그 신발을 줍거나, 떨어졌으니 그냥 버리거나 하지 않았을까? 간디는 그 상황에서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그 신발을 줍는 사람을 생각했다. 누군가 한 짝 신발만을 가졌을 때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보고 다른 한쪽 신발도 떨어뜨린 것이다. 필자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시내에 있는 한 식당에 점심약속이 있어서 갔는데 그날따라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마침 비어있는 한 공간을 보고 가는데 나와 똑같은 입장인 다른 차가 그쪽으로 재빨리 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필자는 그 공간에 주차할 수도 있었지만 양보하고 더 먼 곳에 주차를 하였다.

간디 관심의 초점 ‘他人’
간디는 그의 삶에서 주된 관심의 초점이 타인이요, 세상이다. Hawkins(2012)에 의하면 간디의 의식수준은 700이상이다. 이미 사랑과 평화를 넘어 깨어있는 삶의 의식을 갖고 있다. 명상을 하지 않을 때도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적절한 행위를 취한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기’라고 하는 에고가 없다.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때로는 자기를 넘어서는 초의식의 행위를 할 때가 있다. 이미 우리 안에 깨어있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인 환경의 자극이 너무 강해 내 안에 있는 초의식, 깨어있는 의식을 만나지 못할 따름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보다 높은 의식의 힘이 발휘되어 나와 세상이 함께하도록 한다. 몇 가지 의식을 들어보자. 하나는 관용(Tolerance)이다. 관용은 어려움을 잘 참으면 생겨나는 힘이다. 참는다는 것은 어떤 부정적인 상황들로부터 영향 받지 않는, 생각에서 조차도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부동한 능력이다. 누가 나를 모욕하고 비난하거나 화를 낼 때, 혹은 육체적 고통이 있을 때에도 관용의 힘이 있으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머물 수 있다. 모진 풍랑에도 꿋꿋한 고목이나, 발로 차고 흔들고 돌을 던져도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돌려주는 과일나무 같이, 관용이라는 영혼의식에 머물게 되면 언제나 사랑을 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가 간디다. 간디의 관용의식은 사랑의 행위로 변용되어 세상을 만났다. 다른 하나는 협력(Cooperation)이다. 협력은 나의 시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는 힘이다.

나와 타인의 행복은 일치한다
명상을 통해 협력의식이 자연스러워지면 다른 사람을 형제로 보는 태도를 가지게 되고 공동체의 단결력이 형성된다. 요즈음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능기부가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리 자신을 보면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지만 자기만을 위해 사용할 뿐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자기에게 너무 주의가 쏠려 있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를 더한다면 분별(Discrimination)이다. 명상을 하게 되면 거짓에서 진실을, 부정한 것에서 옳은 것을 순간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생각은 간직해서 키우고, 부정적이며 해로운 생각은 즉각 버릴 수 있다. 세상은 부정적인 생각이 올바른 분별을 가로막는 일이 너무 많다. 우리는 매 순간 분별에 의해 선택을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분별력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세상을 사랑하는 힘은 내가 존중받을 때 더욱 확대된다. 부라마크마리스(2016.1)는 말한다. “마음은 눈이 가는 방향에 따라 움직인다. 이기적인 눈은 받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다. 자애로운 눈은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본다.” 이러한 마음의 눈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 조건 없이 존중받는 느낌을 경험할 때, 우리는 편안해지고 안전한 느낌을 가지며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발휘된다. 1997년 필자는 인도 비하르요가 대학의 부총장 일행을 모시고 ‘요가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3박 4일간 필자는 부총장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행사기간 중에 일정이나 식사, 숙박 등을 안내하며 그와 함께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그가 돌아간 뒤 지나간 3박 4일을 돌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필자는 서투른 영어를 통해 부총장을 잘 모실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대답은 명백했다. 부총장이 필자를 전적으로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 단어나 어휘 등 안내 과정에서 보여준 필자의 영어 소통은 매우 미흡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총장은 필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100% 온전히 수용하였다. 늘 미소로 필자를 대해주었고 간간히 칭찬도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자신감이 솟아올랐고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를 기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영화 ‘버킷리스트(the bucketlist, 2007년)’는 나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이 하나임을 알려주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두 남자의 대화다.

A : 자네, 그거 알고 있는가?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멋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네. 영혼이 천국의 입구를 가면 말이야, 신이 그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대. 그들의 대답에 따라 그 영혼이 천국에 갈지 말지가 결정되었다는군.B : 질문들이 무엇이었는데?A : 하나는 ‘너는 너의 인생에서 행복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너는 너의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주었는가?’일세.

이 대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가령 지금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천국의 입구에 갔을 때 신이 ‘너의 인생에서 행복했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니요’라고 답할 것인가? 아마도 ‘예’라고 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 ‘너의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주었는가?’에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만이 천국행 티켓을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과연 천국행 티켓을 받을 수 있는가? 이 대화는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나만 행복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명상은 긍정적인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명상을 하다 보니 필자도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긍정적인 행위가 점차 확대되어 세상을 사랑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제 70을 넘긴 나이에 세상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귀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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