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찾는 천로역정 ⑤ 자비의 꽃 피는 연기의 밭을

▲ 물가에 놓여있는 나무배. 우리는 연기의 강가에서 이를 건너갈 뗏목을 찾고 있다. 언젠가는 버려야할 뗏목이지만.

붓다의 연기법에서 불교의 자비 사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이 모든 존재는 시방삼세 존재자들의 상호적인 관계에서 나온 선물이다. 따라서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 우주적 연쇄의 존재가 주는 선물임을 깨닫고 다른 존재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비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사랑을 다른 형태의 모든 존재에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래즐로의 ‘자연시스템에 대한 존경(reverence for natural system)’과 마찬가지로 자비는 다른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에 열려 있다.

 이런 우주적인 자비 구현의 모습은 초기 불교의 <본생경(本生經)>에서부터 대승불교의 보살 정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촘촘히 표현되고 있다. 자비 구현은 이론과 관념으로는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궁극적으로 자비 없는 깨달음은 없으며,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고 본다.

깨달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자비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자비가 경시되는 불교 없다
불교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자비 실천방안에 대한 연구 필요

한국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다. 깨달음에 대한 논의는 많은 경에도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참고하면서 깨달음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즉, △1단계 인지적(認知的) 깨달음 △2단계 수행적(修行的) 깨달음 △3단계 전일적(全一的) 깨달음으로 유형화해 보았다.

1단계 깨달음은 붓다의 핵심사상, 즉 연기법과 무아와 공사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2단계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가슴으로 품고 느끼면서 자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의지를 행동으로 연결해 가는 단계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 바로 수행적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수행적 깨달음은 자비의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비료를 주고 가꾸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계이다. 자비실천의 수행이 바로 열반으로 가는 길이며, 이것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녹이고 없애는 길이다. 아무리 선정의 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삼독을 녹여 내지 못하면 사상누각이리라. 이 자비 수행은 ‘바로 여기’의 생활 마당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마지막 3단계 깨달음은 열반의 경지에 이른 깨달음이다. 이 단계는 탐진치에서 해방되어 대자유인으로서 높고 깊고 넓은 무량자비심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3단계의 전일적 깨달음이 보통 불자들에게 깨달음의 표상으로 제시된다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무엇으로 보일 수 있다. 동시에 불교가 현실과 먼 사념적인 종교로 평가 받을 위험성이 있다. 직관적인 사유의 성격인 선불교에서 그 위험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불교가 겪는 깨달음의 논쟁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우리가 불자로서 바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2단계 깨달음, 즉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적 깨달음이라고 본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도록 아수라적이다. 개인의 도덕성 회복에서부터 사회구조의 개혁에 이르기 까지 목청을 돋우고 있으나, 마치 찢어진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수리하려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 든다. 공동체 붕괴, 종교와 인종의 갈등, 사회 양극화 등 사회 문제에서부터,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 핵무기의 확산 등 인류의 생존과 지구별의 위기가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지구촌의 아수라적인 현실은 인간이 탐진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교의 역할과 기능이 자명해진다. 붓다 다르마의 목적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 즉 ‘정토’를 만드는 것이다. 상구보리를 통해 지극한 행복을 얻고, 하화중생을 통해 바른 정토를 만드는 것이리라.

붓다의 연기법에서 생성된 윤리를 조안나 메이시(Joanna Macy)는 그의 저서 <Mutual Causality in Buddhism & General Systems Theory>에서 ‘상호윤리’(Mutual Ethics)라고 표현하고 있다. 상호윤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 발생으로 보고 출발한다. 자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와 경험을 해석하는 코드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상호윤리의 규범과 가치들은 개인적인 행복과 사회적인 변화 사이에 깊은 상호 의존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이에 상호윤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깊은 배려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확장하는 것이다.

붓다의 자비정신을 윤리이론으로 정립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윤리’라고 생각한다. 타자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한다고 보면서 ‘타자 윤리학’을 주장한다. 그의 타자 개념은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현대인에게 자아 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의 시각으로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붓다의 연기론에서 나온 자비정신을 그대로 재현한 윤리이론이다.

이렇게 불교는 자비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처럼 큰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물을 뜰 생각은 안 하고 그릇 자랑만 하고 있지 않은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제 자비의 규범적 명제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자세가 필요하다.

 불교의 실천윤리로서 보살행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상구보리를 먼저 이루고 하화중생 하는 보살행을 뒤로 미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많은데 왜 큰 보살행을 한 스님들은 많지 않은가?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랑의 실천자를 왜 불교는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깊은 자성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비의 구현은 공감과 연민의 마음과 함께 ‘지혜’의 힘도 많이 필요하다. 이 지혜의 힘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까지 포함하는 종합 학문적 식견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현대사회에서 작동할 자비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섭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자비라는 중심 가치를 두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가치 위계에 대한 틀을 마련하고, 이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교한 이론과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사회 윤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자비의 구체화 작업과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자비 정의론’, ‘자비 교육론’, ‘자비 윤리론’, ‘자비 정치론’, ‘자비 복지론’ 등 자비의 큰 그릇으로 연구하고 실천할 과제가 너무나 많다.

깨달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자비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그래서 반야와 자비,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자아완성과 정토건설은 함께 굴러가는 바퀴가 아닌가. 깨달음만 강조되고 자비가 경시되는 불교는 없다. 오히려 한국불교의 현실에서는 깨달음보다는 자비가 강조되어야 한다. 불교가 현대사회와 인간 삶의 현장에서 생동감 있고 효율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비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근래에 ‘지구촌 공생회’ 등 자비를 국내외적으로 실천하는 다양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자비 불교의 앞날에 빛이 보인다.

붓다는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위해 수행의 길을 걸었고 전법의 길을 걸었다. 붓다의 긴 여정은 대자대비의 길이다. 자비 없는 깨달음은 없다. 자비 없는 수행은 없다. 그래서 자비 없는 불교는 없다. 이제 나는 기복의 단계를 넘어 “나도 당신처럼 되게 해 주세요”하며 자비 수행의 관음기도를 해야겠다. 기복을 넘어 복을 짓는 작복의 관음 염송을 해야겠다. 그 기도로 나의 아뢰야식에 웅크리고 있는 업장을 녹이고, 이를 회향(回向)하여 타자의 업을 녹이고, 그러면 우리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이러면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것은 분명하리라. TV 다큐 ‘차마고도’에서 오체투지하며 라사의 성지를 찾아 가는 순례자들이 ‘지구의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이것이 바로 붓다 다르마를 실천하는 자비 수행일 것이다.

글을 끝내면서
이제 여정을 마칠 때가 됐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크리스천’이라는 기독교 신자가 무거운 짐(죄)을 지고 성서 한권을 들고 하나님의 구원을 찾아 ‘하늘의 도시’로 가는 내용이다. 크리스천은 여행 도중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등을 거치면서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도착한다. 그런데 나는 붓다 다르마를 따르는 수많은 도반의 도움을 받아 여기 강가에 왔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서 보물찾기 할 때처럼 두근거림의 여정이다. 존 버니언은 크리스천의 꿈에 의탁하여 소설을 전개해 나갔는데 나도 꿈같은 소리를 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강가에 와 보니 여러 종류의 뗏목이 있다. 뗏목은 ‘붓다 동산’에서 조림된 나무를 재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약자, 장애인, 운동 신경이 발달한 사람,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등 다양한 용도의 뗏목이 있다. 서양 사람을 위한 새로운 뗏목도 만들고 있고, 노 젓는 방법을 붓다의 제자들이 가르치고 있다. 이 강가가 바로 연기의 광장이다. 연기의 다양한 차원이 이 강가에 전개되고 있다. 2500년의 긴 불교 역사가 이 강가에 펼쳐지고 있다. 나는 이 장엄한 현장에서 나의 뗏목을 찾고 있다. 결국 버려야 할 뗏목이지만. 이 강을 건너 뗏목을 버리고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때는 가는 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콘즈는 현대사회와 문명이 불교에게 큰 도전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응전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교의를 해석하는데 상당한 ‘적응’이 필요하며, 나아가 일대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전환이 세계 여러 곳에서 움트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의 다르마는 항상 여실(如實)하면서 대상과 시절에 따라 연기한다. 붓다 다르마가 새로운 시절을 맞아 장엄한 모습으로 그 빛을 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야 한다. 탐진치(耽瞋痴) 삼독(三毒)의 파고를 넘어 뗏목이 전복되거니 좌초되지 않도록 항해해야 한다. 가슴에 정(釘)을 박는 아픔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고 채찍질해야 하는데 그 길이 아득하다. 이제 경을 읽어야지. 강을 건너는데 흥을 돋우는 신나는 뱃노래가 되길 바라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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