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道기행- 2.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의 전경. 이곳의 보리수 아래에서 붓다는 정각을 이뤘다. 6세기 경부터 대승불교의 사원이 건립됐다. 현재의 고층탑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복원된 것이다.
붓다의 생애에서 ‘길’이 주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우선 길에서 태어났다는 것부터 의미심장하다. 인도의 풍습이어서 그랬겠지만, 마야 부인은 출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집’에 도착하기 전 노상에서 태어났다. 무우수 나무 아래서 마야의 몸을 빌려 옆구리로 나온 이, 거기가 룸비니였다. 왕궁을 버리고 고행 길에 나선 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길에서 깨달았고, 또 길에서 설법했고, 또 길에서 열반에 들었다. 길은 인생의 현장이었다. 붓다의 생애 모든 장면마다 중요하겠지만 특히 주목을 받는 곳이 바로 보드가야다. 깨달음의 현장이다.

붓다 구법로 걸어 도착한 정각처
모든 곳이 깨달음의 도량이었구나

마하보디석굴 안의 정각 이룬 이
친견하고 무릎 꿇고 예경 올린다
미륵이 만든 본불은 사라졌지만
그 빛은 동쪽 석굴암으로 이어져


고행 길에 도착한 곳, 거기가 전정각산(前正覺山)이다. 평원에 거의 삼각형 모양으로 우뚝 솟은 산 하나, 외경스럽게 보인다. 깨달음의 현장으로 적합할 것 같은 산이다. 하지만 그곳은 아니다. 아름다운 경치와 깨달음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결국 정각을 위해 산을 나와 강을 건너야 했다.

나이란자나 즉 니련선하(尼連禪河). 인도 가기 전 나는 니련선하가 이름처럼 매우 아름답고 큰 강인 줄 알았다. 그래도 깨달음의 무대이니 뭔가 그럴듯한 풍광을 자랑할 줄 알았다. 나는 니련선하에 가서 실망했다. 강물은 말라 있었고 한마디로 평범했다. ‘정각의 땅’이라면 뭔가 특별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또한 범부의 생각이었다. 깨달음의 장소는 특별한 곳이라기보다 그렇고 그런 평범한 장소였다. 절경과 수행처는 별개의 문제였다. 정말 처처불상(處處佛像)이었다. 우주 공간 어느 곳이나 다 깨달음의 장소이고, 또 모든 것이 다 불상이었다. 아, 그런데 그동안 나는 왜 아름다운 풍경만 찾아다녔을까.

메마른 강에서 전정각산을 바라본다. 운무(雲霧)로 가려졌는지 형태가 또렷하지 않다. 나는 텅 빈 강을 거닐면서 주변을 살펴본다. 니련선하, 그 거룩한 이름의 강, 아니 강 비슷한 곳. 그래서 나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길 위의 싯다르타를 생각했다.

고행의 마지막에 도달했음인가. 싯다르타는 지쳤다. 강 근처의 마을에서 싯다르타는 수자타 여인이 준 유미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 첫 공양자가 살았던 수자타 마을 역시 평범했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6년 고행의 험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곳이 바로 보드가야 즉 깨달음의 땅이다. 구법승들이 즐겨 찾던 곳, 오늘날 성지순례 1순위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 각처에서 몰려오는 나그네의 발길은 분주하다. 하지만 이곳조차 한동안은 폐허의 땅, 잊혀진 곳이기도 했다. 이슬람 침입 이후 특히 그랬다. 19세기에 이르러 가까스로 마하보디 사원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하보디 불당에 이르면 무엇보다 거대한 탑과 만나게 된다. 높이 55m의 탑으로 상층부로 이를수록 좁아지는 첨탑형 구조이다. 삼각형 형태여서 안정감을 자아낸다. 중앙의 대탑 네 모서리에 각각 작은 탑을 두었다. 이 거대한 탑 건축은 19세기 말의 작품이다. 버마의 파간 탑(12세기)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당시 버마 사람들이 마구 복원사업을 펼치니 영국 정부가 나섰다. 하지만 파괴된 원형은 되돌릴 수 없는 불행을 자초했다. 오늘날 대탑의 뒤에 가면 보리수가 있고, 금강좌가 있다. 바로 깨달음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럴까, 세계 곳곳에서 수행승과 불자들의 기도소리와 좌선하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티베트 사람들을 비롯 아시아 각지에서 온 사람들, 더러 구미에서 온 백인들도 보인다. 당나라에서 온 현장법사는 이곳을 돌며 저서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리수로 둘러친 울타리 한가운데 금강좌(金剛座)가 있다. 이 금강좌는 옛날 현겁(賢劫)이 처음으로 열릴 때 대지와 함께 솟아난 것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중간에 거처하고 있는데 아래로는 금륜(金輪)에 닿아 있고 위로는 지면으로 솟아있으며, 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는 백여 걸음에 달한다. 현겁 천 분의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앉으셔서 금강정(金剛定)에 드셨으므로 금강좌라고 한다. 또한 성도(聖道)를 증득하신 곳이므로 도량이고도 부른다. 대지가 진동하였지만 이 자리만이 홀로 흔들리거나 기울지 않았다.”

그곳이 성스러운 길, 바로 성도(聖道)였다. 세계의 배꼽에 해당하는 성스러운 길, 바로 금강좌였다. 보드가야는 성역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순례자의 발길로 가득하다. 대탑 주위를 돌면서 두 손을 모은다. 불행하게도 현재 이곳에서 오래된 불상은 볼 수 없다. 마투라 형식의 4세기 굽타시대 불상이 남아 있다. 보드가야의 불상은 대부분 9~12세기의 제작이다. 그런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상은 촉지인 불좌상(9세기, 파트나주립박물관 소장)이다.

당당한 체구에 우견편단 옷을 입고 가부좌 틀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겹쳐진 발 위에 올려놓았다. 광배는 위에 보리수가 있고 꽃다발을 든 천인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새겼다. 본존 좌위에는 관음과 미륵이 서 있다. 정말 당당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대탑 안에 봉안된 본존불이다. 역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지닌 좌상이다.

마하보디 석굴 안에 앉아 있는 깨달은 이. 원형 두광을 두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이. 2m 높이의 금빛 화려한 빛에 노란색 가사로 몸을 감싸 더욱 신비롭게 보이는 부처님, 저절로 무릎을 꿇게 한다.

마하보디 사원 대탑의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과 같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지닌 좌상이다.
이 불상은 10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19세기 복원 당시 힌두교 계통 마한트 사원에서 옮겨온 것이다. 때문에 당나라 구법승들이 참배했던 불상은 아니다. 아쉬움을 안기는 부분이다. 그나저나 깨달음의 이미지를 누가 조성할 수 있을까. 무불상시대를 거쳐 오랜 세월 흐른 다음 어느 누가 진정한 불상 즉 정각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 마하보디의 정각상(正覺像), 당나라의 현장법사는 이 부분의 일화를 흥미롭게 기술했다. 그의 〈대당서역기〉에 수록된 내용이다.

정사가 준공되자 성도한 붓다의 모습을 새길 공인(작가)을 모집했다. 하지만 응모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그렇지, 어떻게 범인의 솜씨로 붓다의 이미지를 조성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정각의 순간을 형상화해야 하는 것을. 세월만 흘러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브라만이 나타났다. ‘내가 여래의 묘상(妙像)을 훌륭하게 만들겠다.’

드디어 붓다의 이미지는 조형화되는가. 불상 제작에 있어 브라만의 요구는 오로지 향니(香泥) 한 가지면 된다고 했다. 향기 그득한 흙 그리고 등불 하나. 단 조건 한 가지가 있다. 제작기간인 6개월간 그 어누 누구도 문을 열면 안 된다. 6개월 동안 브라만은 두문불출 정사 안에서 깨달은 이의 모습을 만들었다.

하지만 궁금증이 많았던 일반인들은 참지 못하고 일찍 문을 열었다. 그래서 완성 직전에 작업은 멈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은 장관이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좌상이었다. 바로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예이다. 토함산 위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본존상, 바로 그 모습과 같다.

그런데 고맙게도 현장법사는 마하보디 정각상의 크기를 기록해 주었다. 대좌의 높이는 4척 2촌에 넓이 1장2척5촌, 불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무릎의 폭은 8척8촌, 두 어깨의 폭은 6척2촌. 정각상의 규모, 이는 토함산 석굴암 불상과 똑같은 크기가 아닌가. 보드가야와 토함산의 불상은 같은 모습에 같은 크기, 그리고 같은 동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석굴암의 모델은 바로 보드가야 정각상이 아닌가.

깨닫는 순간의 모습, 그 정각상을 만든 브라만은 누구인가. 바로 자씨(慈氏)보살, 미륵이다. 그는 일반인은 ‘부처님의 성용(聖容)을 추측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 미륵께서 정각의 모습을 만들어주셨구나! 이런 붓다 이미지를 요새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상투적으로 공장 제품 만들 듯 불상을 만드는 이른바 불모(佛母)는 없는지, 반성하게 한다.

“정각상은 미륵보살이 친히 와서 만든 것/ 일반 속인은 물론 바라문도 만들 수 없는 것/ 실내 깊은 곳에 있어/ 아침 일찍 커다란 거울을 가지고 햇빛을 끌어오면/ 드디어 영상(靈相)을 잡을 수 있다/ 자비로운 모습/ 중생에게 무한한 감동을 안긴다/ 깨달음의 순간을 증거한다// 속인은 상상할 수 없는 것/ 보살이 와야 만들 수 있는 것/ 보드가야의 정각상/ 그 깨달음의 모습 동쪽을 비추기 시작한다” -졸시집 〈토함산 석굴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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