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따로 주인공 따로가 아니라 자기가 즉 주인공!

 

첫째, 강당이 아직 안 돼서 모두 길에 서 있는 것이 안쓰러워 죽겠습니다. 먼 데서 오셨는데 앉을 자리나마 풍족해서 걱정 없이 만들어 드려야 할 텐데 제 덕이 아마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봄을 맞이한 듯 날씨는 벌써 더워진 것 같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사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 봄을 지니고 항상 봄처럼 그렇게 여유 있게 어깨를 쭉 펴고 사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사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 봄을 지니고 항상 봄처럼
그렇게 여유 있게 어깨를 쭉 펴고 사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공부를 하시고 계시는데, 물론 똑같이 공부를 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 온 분들도 있으니 그렇기도 하고 또 오래 됐어도 새로 오는 분들보다 외려 못한 분들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이렇게 비유를 하게 되죠. 오늘은 상근기에서 좀 얘기하고 또 중근기, 하근기로 내려가도록 하죠. 간단간단히 우리 비유를 해 봅시다.

상근기에서 본다면 만약에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을 게 있다면 그것은 윤회법이요, 인과법이요, 과보를 받는 법이요, 또 윤회하는 법이라 이렇게 일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다면 생사는 면치 못하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이라도 얻을 법이 있다면 그건 윤회법이요, 인과법이요, 과보를 받는 법이요, 윤회하는 법이라 생사를 면치 못한다.’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잘 생각하셔서 넘어가시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뜸을 들입니다. 허허허.

그리고 부처를 이루려면, 즉 자유인이 되려면 주인공(主人空)의 성품(性品)을 발견해야지 만약에 성품을 발견치 못한다면 그것은 외도를 범하는 격이 되죠. ‘유의 법’만의 떡 하나를 집어먹고 그게 걸려서 모두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거와 같죠. 그러나 그 정신세계 무(無)의 떡과 유(有)의 떡을 한데 합쳐서 집어삼키면 아주 깨끗하고 청정하기가 이를 데 없이 만사가 오케이죠. 그것 차이가 그렇게 무섭답니다. 유의 법 50%의 떡 하나를 그냥 먹고 지내는 거와, 무의 법 50%의 떡과 유의 법 50%의 떡 둘을 한데 합쳐서 하나로 삼킨다면, 닥치는 대로 삼킨다면 그 차이가 얼마만큼 나는지 모릅니다.

부처란 업보도 없고 인과도 없는 지위입니다. 그래서 한 마음, 한 기능, 한 견해, 한 소견에 집착을 한다면, 여러분께서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자아부처의 주장자가 허용치 않습니다. 이건 상근기의 얘깁니다. 절대 스스로서 허용치 않습니다. 부처란 이 지킨다는 게 없기 때문에 범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본래 성품(性品)은 항상 공(空)해서 더럽다 또는 깨끗한 법이 있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닦는다, 증득한다 이런 것도 없으며 원인과 결과도 없습니다. 부처는, 자아부처는 계를 지키지 않으며 그 반면에 범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는 선을 닦지도 않으며 악을 짓지도 않습니다. 부처는 정진을 하지 않으면서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작위(作爲) 없는 자유인이라서 어떠한 것에도 집착한다면 스스로서 주장자가 허용치 않습니다. 이것이 죄가 될까, 이것이 죄가 안 될까 이런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소리에, 이 말에, 이 뜻에 모든 걸 한번 기울여 보신다면 한 찰나에 넘어갈 수도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나쁘고 좋은 건 다 아시죠? 이거 하면 나쁘다, 좋다 이런 건 다 아시지 않습니까? 강도도 강도질하는 게 나쁘다는 거 알면서 합니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도둑질이나 사기질이나 이런 거 하는 것도 번연히 나쁘다는 걸 알면서 하는 거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주인공’ 하면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하고부터, 탄생을 했다 하면 주인공입니다. 생명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종합해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부처인 줄로 아는 것도 또는 부처가 아닌 줄 아는 것도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이자, 주인공이 과거로부터 벌여 놓고 어저께 벌여 놓은 게 오늘에 닥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저지른 것 당신이 해결해라.’ 이거지, 누가 대신 아파 주고 대신 죽어 주고 대신 해 주는 사람 봤습니까? 자기가 저질렀으면 자기가 거둬야 하는 것이 분명한 거죠. 자기가 잘못 저질렀으면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이요, 자기가 잘했으면 자기가 즐거울 것이요. 여러분을 이끌고 성품을 발견해서 제대로 걸음을 걷게 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것 자기한테 되놔라 이 소립니다.

자기가 본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어른이 됐으니까 일을 하는 거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공이 다 일들을 하고 모두 행하고 생활을 하고 나가지 않습니까? 딴 놈이 해 주는 거 없죠? 각자 하는 거죠. 과거에도 그렇게 살아왔고 현실에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을 자기 주인공한테 되놓으라는 거고 되입력을 하라는 겁니다. 물질적인 입력은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컴퓨터에다 입력하는 거는 한계가 없고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자기가 저지른 거 현실에도 자기가 저지르고, 잘하고 잘못하고 그렇게 가는 거 아닙니까. 잘하든 잘못하든 모든 걸 당신이 하는 거니까 몰락 당신한테다 놔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지른 거고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자기가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 생활 전체가 바로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자기한테다 되놔서 입력이 되게 해라 이겁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자꾸 나오니까 그 자리에다가 되놔서 되입력이 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는 대로 현실에 또 나올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에다가 자꾸 놓고 관(觀)하는데도 안됩니다.” 이러거든요. 이건 아주 하근기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모든 건 여러분, 각자 여러분께서 하는 겁니다. 잘하든 못하든 못났든 잘났든.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공의 뿌리요, 주인공이지 다른 분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통해서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서 하는 거,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거 모든 것이 주인공이 하는 것입니다. 이 보세요. 주인공이 모두 하는 거, 바로 주인공이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주인공에다 되놔라 이 소립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그 성품을 발견할 수가 있죠. 어떻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각자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하는 일을 주인공한테다 되놔라 이겁니다. 그러니 못 믿고, 믿고 이런 게 없죠. 그렇게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 심성(心性)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주인공에다가 관하고 그랬는데, 주인공은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왜 안되느냐?” 이런 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 데 만약에 부산으로 차를 타고 갔으면 타고 올 수도 있어야죠.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 것을 모르십니까?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해야 이 끊임없이 이어서 진리의 길이 되는 거지, 끊어진다면 어떻게 진리라고 하겠습니까? 또 우리가 잘못하는 일도 있고 잘하는 일도 있는 것이지 어떻게 여러분이 다 잘하고 가십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의 선장을 만들어 놓고, 아까 얘기처럼 잘못하게 되면 그 잘못하지 않게 가차 없이 쳐서 거기다가 되놓고 잘못하지 않도록 이렇게 다스리는 겁니다. 너무도 잘못하고 잘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게 하고 또 잘 안되는 거는 ‘아, 나를 가르치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돌려서, ‘너만이 잘되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돌려서 놓는다면 ‘이거는 안되는 것도 알고 되는 것도 아는구나!’ 해서 안되는 거와 되는 거 그 가운데서 진짜 성립이 돼야 되는 것이죠. 내리고 타는 그 가운데 있는 거지, 내리고 타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잘되고 못되는 그 가운데에 그 자유인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려면 그 주인공 가운데서 바로 내 성품이 발견돼야 됩니다. 그렇게 발견되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거, 여러분이 주인공이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게 공(空)했으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 되놔라 이겁니다. 무슨, 못 믿고 믿고가 없어요. 종교를 믿고 안 믿고 이전에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타고 났으면 주인공이자, 바로 주인공이 살림을 하고 생활을 하고 상대를 겪고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이 그렇게 하고 살고 있는 것을 주인공 자기한테다 다시 ‘네가 하는 거니까 잘 할 수 있잖아!’ 하고 자꾸 마음의 계발을 시키면서, 발전을 시키면서 창조력을 기른다면 그 가운데서 성품의 작용이 드러나게 되고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체가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모든 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을 발전시키려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를 주인공에다가 모두 되놔라, 잘하는 건 감사하게 놓고 잘못하는 건 잘하게 굴려서 놔라 하는 그것이 배움의 지름길입니다.

수억겁 전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우리는 물에서 살다가 겨우 물 바깥으로 나와서 무척 오래 시련을 겪고 인간으로 탄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서부터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가는 데 어떻게 살아나가야 되는가. 자동적으로 훈련이 되고 또 훈련을 받으면서 지금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열을 받아서 골고루 모든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서 바닷물이 파도가 치고 소용돌이가 생기고 위와 밑이 뒤집어지고 하면서 우리는 그 생명에 관한 건의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그러한 시련과 고난 이런 모든 게 없었더라면 우리가 진화돼서 사람으로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생사에도 교훈이 있지마는 한 찰나에 살아나가는 교훈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모두 대치를 하고 살아나가는 그런 생물입니다. 그러한 시련이 없었다면 우리는 땅 위로 올라와서 짐승들이나 날아다니는 새들로서 시련을 또 당해야 되고 그 시련을 다 넘어감으로써 진화돼서 인간으로 형성되는 거죠. 사람도 천차만별 가지각색입니다. 짐승에서 갓 나온 사람이 있고, 사람으로 세 번 태어난 사람이 있고, 또 사람으로 여러 번 반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여러 번 반복하면서 느끼고 알고 이런 공부도 하고 이러면서 또 자기가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생물들을 무시하지 말아라. 생명들을 내 생명과 같이 아껴라. 살생하지 말라.” 모두 이런 말들을 하셨죠. 그것이 왜냐하면 이리로 태어나면 이 부모가 내 부모요, 이 자식이 내 자식이요, 이렇게 되니까 모두 한 번씩 안 겪어 본 분들이 없어요. 부모가 안 돼 본 분들이 없고 자식이 안 돼 본 자식이 없어요. 그러니 지금만 보고서 어찌 남을 업신여기겠느냐는 얘깁니다. 참, 내가 그거는 말로도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말이에요. 도대체 이걸 버선목이니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허허, 나만 답답한 게 아니겠죠. 상대방들도 답답하겠죠. 그러나 더불어 나도 답답하단 말입니다. 이거는 보일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답답하게 ‘아, 주인공에다가 관했는데도 안 됩니다. 잘되다가 안됩니다.’ 이러거든요. 아이, 참 내! 세상에는 사람이 태어났어도 그대로 있는 사람이 없어요. 물건도 그대로 있는 물건이 없고요. 말도 한마디 했으면 그대로 그걸로만 고정되게 말을 하는 것도 없고요. 보는 것도 그렇고 모두 일체 만법이 다 고정됨이 없죠. 그런데 어찌 되는 것만 되고 안 되는 거는 없으리까. 왜냐하면 안 되는 것도 있어야 그 시련 속에서, 되는 거, 안 되는 거 그 가운데서 깨닫죠? 자기가 작업을 하면서 그 한 구멍으로 들고 나는 데에 지금 행을 하는 겁니다. 그 행이 없다면 바로 자기 성품을 발견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작업이라야만이 자기 성품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세상에 나와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한테 되놓아라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모두 하고 왔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지요. 그런데 어찌 딴 사람한테 미루어서 또 딴 부처님을 찾고 이러겠습니까? 여러분이 행하고 저지르고 잘하고 못하고 이런 것이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행을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또 지금 하고 가고 있으니까 모두 벌어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도 자식분들에게, 자손들한테 이렇게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저지른 거는 네가 거두어라.” 하고 아마 훈계하실는지도 모르죠. 대신해 줄 수 없는 도리가 많죠? 어떻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저지르고 여러분이 행하고 과거로부터 행하고 왔던 거, 지금도 행하고 가는 거, 그 여러분이 하고 있지 누가 딴 사람이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시다가 발부리가 차여서 피가 나도 여러분이 각자 “아이고!” 하고, 자기가 그 순간에는 자동적으로 보현신이 돼서 자기를 어루만진단 말입니다. 딴 사람이 대신 와서 아파 줄 리가 없죠. 딴 사람이 만져 주기는 할지언정 아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생활 자체에서 아프고 좋고 나쁘고 이런 모든 것을 여러분이 겪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행하고 있으니까 여러분이 행한 거 여러분한테 모든 것을 되놓고 ‘네가 잘못했으니까 네가 해결해라. 네가 잘못했으니까 네가 거둬라. 너만이 거둘 수 있어!’ 이렇게 놓는 겁니다. 거기에서 숙달이 되고 거기에서 미묘한 법을 발견해 낸다면 감응이 되겠죠. 이것이 차차차차 감응이 돼서 커진다면 이게 바로 성품을 발견해 내는 도립니다.

무조건 “나는 주인공에 관(觀)했는데도 왜 안되느냐?” 하! 진짜로만 했으면 왜 안되겠습니까, 또. 만날 자기 이외의 주인공으로 아니까 그렇죠. 진짜 자기라는 걸 어찌 모릅니까? 자기가 하고 자기가 거두는 걸 어찌 모릅니까? 세계적으로 종교를 모두 믿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전부 타신에게 기도하고 상대를 보고 믿고 찾게끔 전부 그렇게 배우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물속에서도 헤매고 물속에서 나오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그 회오리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이러는데도 죽고 사는 걸 헤아리지 못합니다. 또 자식을 낳고, 알을 낳고도 다 그냥 몸소 자기 몸을 던져서 죽어 버리고 이러는 시련을 겪으면서 진화가 돼서 땅 위로 올라왔어도, 땅 위에서도 지금 물주머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이런 형국이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딴 형상을 믿거나 딴 데 이름을 믿거나 허공을 믿거나 이렇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부처님께서도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이득이 하나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너부터 먼저 알아라.” 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먼저 알게 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그 방식이 아니라면 안 되기 때문에, 구멍은 한 구멍이니까 그 한 구멍에다 놓고 가게 한다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죠. 주인공 탓을 하지 말고 가만히들 생각해보세요. 즉 자기 탓이죠. 주인공이라는 것은 이름입니다, 이름! 여러분의 이름! 왜냐하면 고정됨이 없이 끝없이 돌아가니까. 보는 거 듣는 거, 모두가 고정됨이 없으니까 주인공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모두 주인공 죽는 법은 없죠.

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다 되놔라. ‘네가 저지른 거라면 네가 해결을 할 수밖에 없잖아! 네 머리가 잘못 돌아가서 잘못된 거라면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그 모든 거를 거기에 맡겨 놓는다면 이 몸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털구멍을 통해서 나가서 다 조절을 하는 겁니다. 둘로 보지 않으니까. ‘주인공!’ 하면 전체 거기 하나로 묶어져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개별적인 자기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포괄적인 자기가 되는 거죠. 몸속의 생명의 의식들도, 모습들도 다 자기가 되는 거죠. 주인공 하나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품의 발견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감응도 될 수가 없고요. 만약에 타신을 찾아서 어떠한 일이 생긴다, 보인다, 들린다 이런다면 그건 미치는 발광쟁이가 되죠. 내면의 자기 주장자에 의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잘못되는 일이 없어요. 정의정당하게 생활을 하게 만들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는 관했는데도 왜 안됩니까? 나는 관하는데도 안됩디다.” 이런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주인공 따로 있는 줄 알고 그렇게 재주를 부리는 짓을 하니까 그게 안되죠. 진짜로 자기인 줄 알아야 됩니다. 진짜로 말이에요. 그래서 과거에 살던 자기가 현실에 사는 자기와 둘이 아닌 주인공이 바로 자기를 이끌어 나가는 겁니다. 이끌어 나가게 만드는 거죠.

고인 물을 그냥 둔다면 썩어 버리지마는 자꾸 새 물이 들어오고 고인 물이 나가고 이렇게 한다면 그 물은 아주 청수가 되는 겁니다.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목석이 되는 것이고 또는 발전이 없어요. 그러나 마음을 내면서 자꾸 굴리면 바로 물리가 터지고 지혜로운 생각이 자꾸 넓어져서 자기의 성품을 발견하는 거죠.

여러분도 공부하시면서 알고 모르고 간에 발견이 돼서 해 나가는 분도 있을 테고 또는 감응이 돼서 희미하더라도 ‘아, 이거로구나!’ 하고 알고 가는 분들도 있고 그렇지만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공부를 해도 그 도리를 모르고 지내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한 구멍에 들이고 내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이 하는 거라는 것만 알면은 아주 쉽습니다. 자기 따로 있고 주인공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즉 주인공이라는 얘깁니다. 주인공이 전체 하는 일을 주인공에다가 되놔라 이겁니다. 그래야 앞서 입력됐던 것, 자기가 저질렀던 일들이 다 소멸되면서 새로이 넣는 그 입력이 새로이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을 수차에 걸쳐서 해 드렸는데도 그게 납득이 잘 안되고 그러죠? 허허허.

하여튼 아주 오늘, 여러분 각자가 그대로 주인공이라는 것, 여러분 각자가 그대로 주인공이며 그 주인공이 일체를 다 과거도 현재도 지금 하고 가는 것이라는 걸 잘 아십시오. 그런데 일체를 다, 그 주인공 놈이 한 거니까 ‘주인공 놈 너 알아서 잘 이끌어가야 하지 않아!’ 하고 거기다 되놔라. 되놓는 작업을 해라 이겁니다. 처음부터 부처를 찾기에는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 그저 그렇게만 한다면 스스로 성품이 살금 살금 살금 발견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자세히 일러 드렸는데도 허겁지겁하고 부처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허겁지겁 그냥 날뛰고, 허겁지겁 아무 이름이나 부르고 무꾸리나 하러 다니고, 급하면 그냥 아무한테고 다니면서 묻고, 아무 절에나 이리저리 그냥 다니면서 기복으로 물들고 이렇게 하신다면 십 년, 이십 년이 가도 절대로 자기 성품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자기 성품을 발견치 못한다면 외도로 전락되죠. 깨친 자유인들은 절대 무슨 ‘선을 닦는다’ 이런 것도 없고, ‘정진한다’ 이런 것도 없고 또 그 대신에 악법도 짓는 것도 없고 범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도리를 모르고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수억겁을 겪고 올라온 겁니다. 지금 몰라서 그렇지 수억겁을 모두 내려가 보십시오, 어떠한가. 어떠한 시련과 치욕을 겪고 올라오는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겪고 올라온 거죠.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4년 2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
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