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근본에다 놓고 돌아가는 것도 진언입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에 대해서
질문 저희 모친께서 지병으로 10년 넘게 병원을 전전하고 계시다 갑자기 체중이 20kg 이상 빠지시면서 기력이 소진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얼마 사시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희 보살이 편안한 임종을 맞이해서 다음 생에 인도환생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부처님세계에 전달이 돼서 어머니께서 인도환생하실 수 있는 공덕을 얻을 수 있을까요.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생사에 관한 건도
모든 것이 다 놔집니다.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면은 고에서 벗어나는 거죠.


 

답변 항상 말씀드리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마음이라는 자체가 바로 우주 삼라만상을 빚어내기도 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을 다 마음으로 그려 내기도 하고 마음으로 짓기도 합니다. 이 마음은 정말 어디다 비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을 잘 굴려서 내면은 일체 모든 게 생기고 구해지지만, 한생각을 쉬게 되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두가 소멸된다 이 소립니다. 이 고가 다 소멸된다는 그 자체가 한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다 소멸될 수 있을까 하지만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생사에 관한 건도 모든 것이 다 놔집니다.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면은 고에서 벗어나는 거죠.

우리가 죽는다 산다 하는 것은 이거 말짱 거짓말입니다. 이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듯이 그와 같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뭐 별건가요? 이 무명을 쓰고 있다가 무명이 벗겨지면 다른 무명을 쓰고 다시 나오고, 그래서 마음이 발전을 해야만이 지금 산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의 발전, 즉 정신계의 발전을 해야만이 물질계의 발전도 할 수 있거니와 여러 가지로 중용을 할 수 있어서 자동적으로 자유자재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한 그릇 먹어도 그것을 해서 올리는 자는 누구며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해서 올리는 자도 자기요 받는 자도 자깁니다. 그런데 내면으로 볼 때 내가 먹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먹는 것입니다. 몸속에도 수십억 마리의 생명들이 모두 들어 있음으로써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누가 먹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 한 그릇을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생각을 잘하면 공양이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하면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것이 아니니 그래서 공양입니다. 그래 공양을 올리게 되면 공덕을 입는다 이런 소립니다. 공양이 아니고 개별적인 밥이라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공양이라는 것이 내 한 몸체의 조직체, 즉 모든 생명들이 한 그릇을 놓고 다 같이 먹는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먹으니까 다 같이 마음을 내서 모두 서로서로 도와 가면서 서로서로 작용을 하고 작용을 해 주고 이러면서 사니까 공동체고, 그러니까 바로 공덕이 되죠. 공덕이 된다는 뜻도 그렇지만은 공양을 올린다 하는 것도 그렇고 공향(共香)을 피운다 하는 것도 이런 데서 오는 겁니다.

공양을 올리면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전부, 만물만생이 전체가 다 한 그릇을 놓고 내부나 외부 전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덕이 될 수밖에요. 나를 떠나서 상대로 믿는다면, 상대를 믿는다면 공덕이 될 수가 없죠. 그리고 공양이 될 수가 없고요. 그리고 마음의 향이 될 수가 없고요. 공향이 될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공덕이 되게끔 공양을 올리고 공향을 피우고 공덕이 되게끔 행을 하고 마음을 내라 이거죠. 바깥으로 믿고 바깥으로 끄달리고 바깥으로 아무리 공양을 많이 올리고 시주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조직체로서 운영을 하는 거지 조직체가 아니고는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회사도 조직체가 돼 있기 때문에 회사를 운영을 하는 겁니다. 조직체라는 이름 없이도 말입니다. 회장이 있고 사장이 있고 직원이 있고 총무가 있고 상무가 있고 이렇게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질서 정연하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공동체고 그렇듯이 우리가 공양 한 그릇을 올린다 하면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공양입니다. 이거는 내가 먹으니까 아무렇게나 뭐, 이렇게 하지 말고 단 한 숟가락을 먹더라도 공양을 올리십시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도 공양이요, 둘이 아닌 바로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는 이 전체가 바로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먹든 한 그릇을 바치든 공양은 공양입니다. 더불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제사 지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는 사람은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천도를 할 수가 있는가 하면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지극하게 공양을 올릴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거를 알면 아주 멋진…, 자유권을 갖고 행할 때 그게 공덕이죠, 모두가. 내가 먹는다고 해서 공양이 아니고 남을 준다고 그래서 공양이고 이게 아닙니다.

향을 하나 피워 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우주 삼라만상을 한 찰나에 돌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 물질적인 향이 아니라 마음의 향을 피우시라 이겁니다. 잘 생각해서 공덕이 되게끔 마음을 잘 내는 것이 바로 마음의 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예배를 올릴 때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합니다. 이 다섯 가지 향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공양을 올려야죠? 누구나가 입산 제자나 유발 제자나 다 마찬가집니다. 이 모두가 다 공양이 되게끔 하고, 공덕이 되게끔 하고, 내가 공동체로서 어느 거 하나 빼놓지 않고 구할 수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전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나요
질문 『한마음요전』과 마음공부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신도들이 한 권씩은 다들 구입해서 공부에 참구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어떤 분은 하루에 몇 구절씩 읽고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평소에 큰스님의 법문을 많이 듣다 보니까 이제는 요전을 보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안다, 심지어는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느 분이 옳고 어느 분이 그르다 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마음공부 하는 과정에서 경전의 중요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하는 점이 더 궁금합니다. 평소에 경전을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대해야 하며, 특히 『한마음요전』을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을 설하셨고 그것을 경전으로 편집해서 냈어도 이날까지도 모두들 그 마음을 모르고, 그러면서도 그 마음을 움죽거리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나로서는 경전을 봐야 옳다, 경전을 안 봐야 옳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마음 자체는 다 똑같지만 이 오장육부 속에도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다르고 행도 다르고 모두 다르듯이 이 세상만사의 모든 마음 내는 그릇은, 마음 내는 차원은 천차만별로 달라서, 그건 그릇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할 뿐이지 누가 봐야 옳다, 안 봐야 옳다 할 수는 없죠.

생각을 해 보세요. 경전을 써 놨어도, 풀이를 해 놨어도 기복으로 풀이를 많이 해 놨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기복으로 써 놓은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참고적으로 지혜를 넓혀 가고 마음을 계발하려면, 즉 지혜롭게 발전을 하려면 자기가 어떤 때는 모르는 게 있으면 한번 보고 넘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죠. 그래서 목차 목차대로 있으니까 자기가 아쉬운 대로 한번 넘겨서 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보고 듣지 않으면 이름을 몰라서 생각도 안 납니다. 우리 먹는 것도 그렇죠. 우리가 먹어 봤으니까 먹고 싶은 생각이 나는 거지,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맛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참고적으로, 길잡이로서 꼭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교 자체에서 개선할 게 너무도 많은데 그 책을 만약에 잘 보고 습득해서 넘어간다면 그 책은 살아 있는 겁니다.

어떤 돌부처가 말입니다, 옮겨 놓으려고 하니까 꿈에 나타나서 “나는 가기 싫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시 모셔 놨답니다. 그와 같이 돌 하나도 생명이 없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책에 말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딴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다 한마음으로써 다 같이 한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의 진리이자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그냥 글귀로 해 놨을 뿐이지 모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해 놓은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누가 했다, 누가 안 했다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참고적으로 우리가 보고 알아야 되지 않나. 그래야 마음의 발전이 되면서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나죠.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날 때는 가차 없이 갖다가 먹을 수 있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응, 그 사람이 얘기하는 건 만날 그 얘기가 그 얘기야. 그런데 뭘 그래?” 이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글을 외워서 배우라는 게 아니거든요. 외워 가지고 그 외운 거는 다 버리더라도 그 뜻을…. 내가 진짜 갖다 먹을 수 있도록 행을 중용으로 해라, 정신계와 물질계를 중용으로 해라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거지, 그걸 외워서 읽으라고 해 놓은 게 아니거든요. 읽다 보면 때에 따라서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면 생각이 나거든요.

예를 들어서 하다못해 차 사고가 날 일이 생겨도 읽었던 대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차 사고가 안 날 수도 있는 거거든요. 이 보이지 않는 데, 이 우주 자체 허공에 말입니다, 생명들이 꽉 차 있어요. 그러니까 어느 때 어떻게 부딪쳐서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몸뚱이나 혹성 자체도 다 대기권에서 통신으로 들일 건 들이고 버릴 건 버리고 대치할 건 대치하고, 이렇게 해서 다니게끔 돼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데 그렇게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문득문득 스스로 생각날 수 있도록 그런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 그 책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진언이 어째서 효력이 있는지요
질문 진언(眞言)이란 무엇입니까? 아침저녁 예불 중에 외우는 경에도 많은 진언이 있고 또 다라니경(陀羅尼經) 같은 것은 주력이 있다 하여 예불 중에도 빼놓지 않고 외우는데, 그 진언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째서 효력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누가 효력이 있다고 그러나요? 모든 사람들이 각자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네들이 하는 것뿐이죠. 예를 들어서 사람이 죽었을 때는 지장경을 염하고, 이게 진언이 되죠.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가난하게 살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진언을 외우고, 또 명이 짧다 하면 남의 말을 듣고서는 또 칠성에게 빌면서 진언을 외우고, 또 아주 좋은 데로 가게 해 달라고 지장한테 빌고 진언을 하고, 또 용신(龍神)한테 진언을 하고, 이거는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진언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죠? 앞에 닥치는 대로요. 그런데 다 똑같은 진언이 아니죠. 모두가 자기 가정에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진언을 하게 되죠. 병고가 있으면 바로 약사보살을 찾고, 길을 가다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되면 바로 지신한테 진언을 하고, 이렇게 모든 게 우리 사는 용도와 똑같죠.

그런데 내가 말하는 건 바깥으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 노예로서의 진언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한군데서, 여러분이 못났든 잘났든 한군데서 모두 살림살이를 하고 갑니다.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네들이 자기네들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면 자기를 끌고 다니는 바로 근본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아까 말했듯이 명이 짧으면 짧은 대로 거기다가 되돌려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병도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놓고 돌아가는 것도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진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하는 것은 진짜 진언이 아닙니다. 그거는 바깥으로 떨어지는 진언이고 이것은 안에다가 되돌려놓는 진언이기 때문에 우주 법계에 일체제불의 마음으로서 전부 통신이 되는 겁니다.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진언이라는 것은 그대로 그냥 진언입니다. 바깥으로 상대를 두고 진언을 하는 거하고 상대를 두지 않고 직접 자기 자성(自性)에 진언을 하는 거하고는 어딘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항상 가도 노예가 될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고 노예가 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겁에 질려요
질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학교 1학년입니다. 불교에 뜻이 있어 단기 불교대학도 다니고 있습니다. 현대불교신문의 대행 스님의 답변을 보고 용기를 내어 이렇게 질문을 올립니다. 저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종의 공포증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겁에 질려 떨려서 말도 잘 못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으면 책도 읽기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학교생활 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어렸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성격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별로 없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불교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이 난국을 극복하려 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의 아상이 강해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아직 수행이 부족한 탓인가요? 이대로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는 잘못되고 잘되고가 없고 악도 선도 없어요. 잘못된 거 잘된 것이 없다고요. 그 없는 도리를 안다면 전부 내가 공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모든 세상살이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죠. 마음속으로 자꾸 편안치 않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하세요.

그러면 두 가지 표현으로 해 보죠. 한 가지는 차를 탔으면 내리죠? 그렇죠? 한계가 없이 그냥 타고 갈 그런 사람은 없죠. 차를 타면 내리려고 타고 내리면 타려고 내립니다. 어때요? 그 답답한 마음도 또는 어떠한 마음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업식에서 입력된 게 나오는 거니까 그대로 상관할 게 없이 거기다가 놓아 버리고 새 걸로 바꿔서 쓴다면 좋은 거고요. 좋게만 생각을 해서 거기다가 놓으세요, 자기한테 유익하게만. 자기의 가정에도 이익하고 자기에게도 이익하고 모든 걸 이익하게만 생각을 해서 놓으세요. 바꿔 놓으세요.

꿈을 꾸고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이렇게 관습에 의해서 쩔쩔매지 말고 또 다가오는 용도도 ‘이거 이렇게 다가오니까 사람이 살 수가 있나?’ 하고선 고민하고 이럭하질 말고 ‘고민하게 하는 것도 너니까 고민 안 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 돌려놓는다면…. 믿고 돌려놓을 수만 있으면 되는데 아직까지도 100%로 놓질 못하는 까닭이죠. 놓는다는 건 믿어야 놓는 거지, 믿지 못하면 놓지 못하죠. 우리가 걸음을 걸어갈 때에 구덩이에 발을 떼어 놓을 수는 없죠. 그렇듯이 바로 자기 마음이 구덩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냥 거기다 발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거죠.

마음은 체가 없어요. 그런데 모든 거를 나쁘다고, 좋은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러나 그건 관습에 의해서 오는 거니까 모든 것은 거기다가 맡겨 놓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세요. 내 마음이 조절을 해서 밝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면서 재생산이거든요. 재생의 생산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생산처에다가 모든 것을 다시 바꿔서 재생을 하게끔 거기다가 놓으라는 거예요. 만약에 이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자기 주인공을 믿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학생이 지금 생명의 근본, 움죽거리지 않으면서 한 기둥이 기계 기둥 가운데서 중심을 타고 돌아갈 때 여러 가지에 연결된 기계가 다 돌아가죠. 그런데 그 가운데 중심의 기둥은 움죽거리질 않아요. 힘만 배려해 주죠. 그 기둥에다가 다 놓으란 말입니다. 자기 근본, 주인공을 믿고 일상생활을 전부 그렇게 한다면 하나도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까 거기다 다 맡겨 놓고, 그 힘에 다 맡겨 놓으면 다시금 새 물로다 생수를 먹을 수 있고, 새 걸로다가 굴릴 수 있고 쓸 수 있어요. 어떤 애고든지 말입니다.

주인공의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질문
 저를 고민케 하는 것들은 교리나 신행과 관련되는 것들이 아니라 살다 보면 부딪치게 되는 생활상의 문제들입니다. 경제적 어려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주인공에 놓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이런 문제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놓아야 하는 건지요. 그리고 주인공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주인공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요. 주인공이 존재함을 믿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주인공의 나툼이니 결국 주인공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어야 된다는 뜻인지요.

답변 여러분의 깊은 잠재의식 속에 참나가, 바로 공(空) 안에 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맡겨 놓으라고 하는 그 자체가 내가 공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다 공했으니 포함해서 공한 주인공에 의해서 보이는 게 있기 때문에 부처도 이루고 세상이 공한 줄 알았고 내가 공한 줄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체 생활을, 들이고 내는 것을 몰락 다 ‘들이고 내는 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는 거니까 거기서 다 알아서 길잡이가 될 거다.’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안되는 거는 나를 테스트해 보는구나 하고선 놓고 또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그렇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을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은사 아닌 은사, 참 은사를 만날 것입니다. 진짜 은사를.

그리고 여러분의 몸이 있기 때문에 부딪침이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 가난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더더욱 잘 알게 됩니다. 가난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이라는 걸 찾지 못해서 한데로 떨어지는 수가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하고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일생에 눈물 흘리고 가슴 아프고 그런 일들이 한두 건입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안 보이는 자기한테 다 맡기고 ‘너만이 길을 찾아가게 할 수 있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고, 너만이 가정을 지켜 주고 너만이 애들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릴 수 있어.’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간절한 한마음이 아주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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