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의 산막일지

지율 스님 지음|사계절출판사 펴냄|1만 5800원

[현대불교=김주일 기자] 지율 스님〈사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닉네임은 ‘천성산 지킴이’이다. 스님은 생명을 파괴하는 자본과 권력에 맞선 오랜 단식을 끝내고, 걸음도 걷지 못하는 아픈 몸으로 경북 영덕 칠보산 기슭 마을에 들어왔다. 그곳 산막에서 지율 스님은 심고, 가꾸고, 수확하고,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스님은 죽음의 문턱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로 일손을 보태고 음식을 나누며, 오순도순 투덕투덕 정을 쌓아가는 마을 어르신들의 일상을 통해 자연스레 생명의 귀함과 인간사의 애틋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초봄 땅이 풀리자마자 시작돼 절기에 따라 진행되는 소농들의 농사 이야기를 통해 농촌의 한해살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은 지율 스님의 농사일지이자, 열 가구가 모여 사는 오지 마을 어르신들이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자연의 순리가 곧 깨달음
천성산 살리기를 위해 5차에 걸쳐 단식한 지율 스님은 지난 2006년 단식을 중단했다. 그리고 칠보산 기슭에 정착한다. 처음 한동안은 기웃거리는 외부인에 불과한 스님은 문 앞에 슬그머니 음식을 놓고 가고, 멀쩡한 데가 없는 낡은 집을 손봐주고, 어설픈 텃밭 농사를 거들어주는 마을 어르신들의 다정한 보살핌 속에서 조금씩 스님은 ‘마을 사람’이 되어간다.

닷새에 한 번 버스가 들어오는 깊은 산속 오지 마을서도 어르신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손발을 가만 두는 날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상할 대로 상해 삶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스님은 세상 끄트머리 같은 그곳에서 죽음이 아닌 삶 쪽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봄에 싹이 터서 그해 가을에 열매를 맺고 죽는 일’이라는 ‘한해살이’의 정의처럼, 심고 가꾸고 거두고 ‘죽음’과도 같은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씨를 뿌리는 농촌의 삶을 지켜보며 죽음의 터널서 빠져나와 다시 자기 삶을 심고 가꿀 수 있게 됐다.

자연의 신음 소리에 함께 아파하며 쓰러져 가던 지율 스님은 바람 소리, 빗소리, 할배의 장작 패는 소리, 댓잎이 사그럭거리는 소리, 할매의 구성진 노랫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긴 겨울 끝에 다시 봄이 오고, 또다시 낫과 호미를 드는 소농들의 삶. 돌고 도는 자연의 순리가 곧 깨달음이요, 경전이었다.

오지 마을의 생기와 온기를 전하고자 한 지율 스님.
오지 마을 농촌서 한해살이
이 책에는 칠순, 팔순을 넘긴 어르신들이 자기가 태어난 혹은 시집 온 집에서 예전 방식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한 해를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오랜 시간 변해가는 자연을 기록해온 지율 스님은 이 마을서도 관찰자이자 참여자로서 어르신들의 농사 일지를 대신 써내려간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온 마을이 모여 동제를 지내고, 길일을 택해 장을 담그고, 분뇨를 모아 거름을 만들고, 소를 몰아 밭을 가는 식의 전통적인 농경은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귀한 풍경이라 여기며 사소한 일화 하나까지 꼼꼼히 수집하듯 적어 넣었다.

도시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라고 하면 옷차림이 달라지는 정도겠지만, 농촌에서는 마을 전체가 앉는 자리가 달라지고 하는 일이 바뀐다.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듯 지율 스님의 일지를 따라가다 보면, 철따라 달라지는 농촌의 풍경과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농부의 손과 발이 눈앞에 그려진다. 농촌에 고향을 둔 이들이라면 잠시 향수에 젖을 것이고, 마트 진열대서 계절 감각을 잃은 도시인들이라면 식탁 위에 놓인 곡식과 작물들이 어떤 노동을 거쳐 온 것인지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기록한 적 없는 어르신들 작은 일대기
이 책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분명한 ‘캐릭터’가 있다. 삼십오 년 동안 꼬박꼬박 마을 살림살이를 수첩에 적어온 이장님, 늘 막대사탕을 물고 다니며 사탕이 입안서 녹는 시간으로 거리를 계산하는 나무 할배, 이십여 년 전 당뇨로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나무를 하고 밭일을 하는 자야 아재, 이야기 중에 늘 ‘대한민국’을 끼워 넣는 옥이 할아버지, 구성진 노랫가락에 시름을 잊는 옥이 할매와 진국 할매, 도시에 나갔다가 팔 하나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술에 절어 사는 총각 호영이 등 지율스님은 누구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짧은 글 안에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드러나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심성의껏 묘사했다.

구십이 넘은 눈먼 할매, 팔순이 넘은 나무꾼 할아버지와 할매, 소를 모는 아재, 호미질로 하루를 시작하는 할매들, 도시에서 싸움질하다 크게 외상을 입고 고향에 들어와 술에 쪄들어 사는 청년, 도시로 나갔다가 고향이 그리워 가족을 두고 혼자 돌아온 초로의 아재, 귀 어둡고 눈먼 가난한 사람들… 등등.

저자는 “그분들의 거친, 그러나 착한 마음들을 깊이 들여다본다. 사람이 풍경을 좌우한다는 말을 이곳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한 장의 사진도 찍히지 않는다”고 밝힌다.

풀 한 포기, 나무 열매 하나, 도롱뇽 한 마리가 귀하듯 지율 스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삶이 다 소중했다. 땅에 엎드려 평생을 심고 가꾸고, 낳고 기르고, 거두고 나누어왔지만 삶의 끝자락에 온 지금까지 누구 하나 그들의 삶에 주목하지 않았다. 지율 스님은 자신의 삶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 넣어준 마을에 은혜라도 갚듯이 할배의 발, 할매의 한숨, 아재의 손, 젊은이의 상처에 두루 눈길을 주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완성한 이 책은 곧 마을 어르신들의 작은 일대기이자, 처음으로 기록된 그 마을의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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