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찾는 천로역정- ③ 붓다와 불교의 관계는

▲ 태국 방콕 사원의 부처님 열반상. ‘붓다 다르마’가 불교라는 용기에 담겨 발달되어 온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온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확산되고 있다.
붓다와 불교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 언뜻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이 제일 어렵고 의미심장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붓다 다르마는 불교에서 올바르게 구현되고 있는가? 불교 없는 붓다는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붓다의 가르침이 불교의 틀 안에서만 존재 하는가? 이렇게 붓다와 불교의 관계는 우리에게 많은 고뇌를 던지고 있다.

붓다 다르마 담은 제도적 불교는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스스로 갱신하면서 다양하게 나타나 
순수한 ‘붓다 다르마’는 있어도
변치 않는 ‘순수한 불교’는 없다

첫 선각자가 떠나면 그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따르기 위해 스승의 말씀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다. 여기에 여러 뛰어난 제자들이 나름대로 선각자의 사상을 해석하고 체계화시키면서 교단이 형성된다. 그리고 제자들이 전법의 뜻을 실현하고자 조직을 만들면 그 첫 선각자를 교조로 하여 하나의 종교가 탄생한다. 이렇게 출발한 종교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자기 생명력을 유지시키고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는 여러 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체계화시킨다. 종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여러 종교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여 제시하여 보면 △교리적, 철학적 차원 △윤리적, 율법적 차원 △경험적, 감정적 차원 △신화적 차원 △의례적, 실천적 차원 △사회적, 조직적 차원 등 6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가 지닌 여러 차원의 특징들은 종교 자체가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계속 보안되고 수정된다. 첫 선각자(교조)의 가르침은 대개 교리적, 철학적 차원과 윤리적, 율법적 차원에 치중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종교 체계를 유지하기에는 어렵다. 이에 신화적 차원, 의례적 차원, 조직적 차원 등이 추가되어 작동한다. 이러한 과정이 거듭하면서 교주와 종교의 관계는 엷어지기도 하고 오히려 충돌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종교는 교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교주를 팔아 종교 생명력을 유지시킨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법이니 말세니 하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긴 종교의 역사에서 이런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중세 기독교의 면죄부,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등 대표적인 사례를 거론할 수 있지만 어찌 기독교 뿐이겠는가.

붓다와 불교라는 종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스리랑카의 큰 스님이자 불교 석학인 라훌라의 견해를 보자. “부처의 가르침에 붙이는 ‘불교’라는 딱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이름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진리에는 상표가 필요치 않다. 진리는 누군가의 전리품이 아니다. 파벌적인 딱지는 진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며, 사람의 마음에 해로운 편견을 만들어 낸다.”

붓다의 가르침은 불교라는 상표가 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제도 불교의 습기에 젖었는지 이 말이 섭섭하다. 그만큼 나는 불교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것이리라. 어리석게도.

그럼, 붓다의 가르침은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종교화 되었는가? 붓다가 세상을 떠난 후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 땅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국과 인접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새롭고 다양한 문화 환경을 만나면서 변신과 변신을 거듭하면서 특정한 입장을 중심으로 한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각 종파는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교리를 개발하고 심화하는 작업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기의 불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고, 여느 계시(啓示)종교와 유사한 면도 많아 졌을 것이다. 

나는 불교가 25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것이 신기롭고 기이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지금 불교는 아시아라는 지역적 틀을 넘어 서양 세계에 새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왜 신기롭고 기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무아’의 문제이다. 무아는 연기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무아는 일단 ‘자기부정’의 논리이다. 무아는 인간 삶의 양식에 있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인간은 영원하고 실재적인 것을 염원한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Atman)을 인정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달리할 뿐 다 아트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보호와 자기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불사의 ‘영혼’을 가정하고 신을 만들어 의지하고 영생을 추구한다. 그런데 붓다는 무아를 주창한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도 무시한다. 이렇게 종교의 틀을 무시하는 불교가 지금까지 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불교는 붓다를 배반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인가? 반대로 붓다의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럽힌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나는 라훌라의 입장에 반대하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싶다. “붓다 없는 불교는 없다. 불교 없는 붓다도 없다.” 붓다는 불교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없는 붓다는 없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붓다 다르마가 불교를 통해 꽃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붓다 없는 불교 없고, 불교 없는 붓다는 없다”는 것은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붓다 없는 불교를 보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신음일 수도 있다.

나는 불교를 통해 2500여 년 전의 붓다를 만나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부터 해방된 붓다를 만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두 붓다를 한 분으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역사적 인물인 붓다의 가르침에서 출발하였지만 또한 불교는 붓다를 역사적 인물에서 해방시켜 또 다른 붓다를 탄생시키고 있다. 이는 바로 역사적 인물인 고타마 붓다의 역할을 함께 하기 위해서다. 바로 아미타불과 많은 보살은 역사적 인물에서 해방된 붓다라고 생각한다. 

탁월한 서양 불교학자로 알려진 콘즈(E. Conze)는 그의 저서 <Buddhism: Its essence and development>에서, 붓다 입멸 후 1500년이 지난 후 불교사상의 창조적 맥락이 멈추었다고 주장하면서 안타까워한다. 1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교리의 연꽃이 피어날 만큼 만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1000년 동안은 과거의 위대한 유산만을 지키려고 애써 왔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불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콘즈의 입장은 이러한 불교의 다양한 변신에 대해 ‘연꽃의 만개’라며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에 대해 붓다 사상을 훼손시키는 결손된 불교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이것은 붓다 다르마가 불교라는 용기에 담아져서 발달되어 온 것인지, 아니면 훼손되어 온 것인지의 논쟁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초기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논의는 다양한 영역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의 한국불교를 보는 맥락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나의 입장을 정리해야겠다. 붓다 다르마를 담은 제도적 불교는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갱신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순수한 ‘붓다 다르마’는 있어도 변치 않는 ‘순수한 불교’는 없다고 본다. 남방 불교, 티베트 불교, 중국 불교, 한국 불교, 일본 불교 등은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붓다 다르마를 구현한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붓다 다르마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구현했느냐의 문제이다. 기후와 바람, 해류 등에 따라 불교라는 배의 항해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붓다는 배가 제대로 항해할 수 있도록 ‘항해 지도’를 만들어 주었고, 항해의 방향을 안내하는 ‘등대’도 만들어 세웠다. 따라서 붓다 다르마를 탐구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불자들은 끊임없이 붓다의 항해 지도를 독해하고 등대의 빛을 따라 항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는 좌초하고 표류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승가 공동체 구성원’의 자질과 사명감이 요구된다. 그 붓다 다르마의 길을 ‘방편’이라는 틀로 피해 가서는 안 될 것이다. 방편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단일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21세기 문명 대전환의 격변기 속에서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붓다 다르마를 구현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불교와 신비주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불교는 합리적 종교이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붓다 다르마와 신비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아가 불교의 최고 지향 가치인 열반과 선불교 및 밀교를 신비주의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신비주의는 붓다 다르마를 훼손하는 것인가? 제도 불교의 의례 중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우상 숭배고 기복적인 것인가? 이러한 논쟁은 신비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궤도가 달라진다 하겠다. 신비주의는 일상의 경험세계를 초월하여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성을 보려는 인간의 열망에서 생성된 것이다. 신비주의는 어떤 실재와의 직접적이고 내면적인 일치의 체험을 중시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의 긴 역사 속에서 그 유형과 범주도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사는 것 자체가 신비스러울 정도로.

저명한 불교 학자인 콘즈는 <반야심경>에 심오한 붓다 다르마와 주술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는 산스크리트로 열반의 저 언덕으로 빨리 가자는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런데 구마라집과 현장은 산스크리트 원어를 왜 번역하지 않았나? 언어의 신비화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극대화한 것인가? 나는 진언 게송이 없는 <반야심경>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신비주의적인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이에 관한 독서도 꽤 많이 했다. 특히 현대 물리학과 신비주의의 관계에 대한 담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신비주의가 현대 과학에 의해 신비의 가면을 벗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불교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분들 중에는 불교가 신비주의와 결합되는 현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나는 불교 의례의 신비적인 요소는 결코 기복적인 것이 아니며,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불교의 신비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붓다 다르마가 이렇게 넓게 파종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관음 기도를 이제는 기복을 넘어 붓다 다르마에 가까이 가는 수행 길로 생각하고자 한다.

어느 불교 학자는 나보고 ‘미신 불교’를 믿는다고 농을 한다. 이러한 농에 대해 전혀 불편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불교를 신해(信解)하는 나의 틀은 나만의 것으로 소중하게 간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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