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4조가 된 도신 대사(道信:580~651)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해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여 사미가 된 후 14살 때 환공산(?公山)에 머물던 승찬 대사를 찾아가 절을 하고 물었다.

“원하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법문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승찬 대사가 되물었다.

“누가 너를 속박하였는가?”

“아무도 속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이 말 끝에 도신 대사는 크게 깨닫고 9년 동안 승찬 대사를 시봉했다. 훗날 이 문답이 ‘도신해탈’이라는 공안 중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국 선종사에서 많은 대중이 모여 회상(會上)을 차리게 된 것은 4조 도신 대사 때부터다. 만년에 그가 파두산(破頭山, 쌍봉산)에 30여 년간 주석할 때 문하의 제자들이 500여 명이 됐다. 홍인(弘忍)대사에게 법을 전해 조사위를 잇게 하고 그의 문하에서 우두종(牛頭宗)을 세운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스님이 배출됐다. 법융 스님은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하여 독특한 선법을 선양하였다.

〈능가사자기〉 ‘도신장’에는 자신의 법에 대해 언급해 놓은 말이 있다.

“내 법의 요점은 〈능가경〉에서 ‘부처님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는 말과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근거를 둔다.”

그의 선법 특징을 나타내는 말에는 수일불이(守一不移)와 섭심(攝心), 간심(看心), 일행삼매(一行三昧) 등이 있다. 하나를 지키면서 옮기지 않는다는 ‘수일불이’는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의 화합인 신체가 무상함을 깨닫고 공(空)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을 시종일관 수행한다는 말이다. 일행삼매란 좌선 만이 선의 능사가 아니라 모든 활동영역에서 선이 실천되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일행삼매에 드는 자는 무수한 제불 법계가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다 알게 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다리를 들고 내리는 것까지 도량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든 행위와 거동이 모두 깨달음이다.”(入一行三昧者 盡知恒沙諸佛法界 無差別相 夫身心方寸 擧足下足 常在道場 施爲擧動 皆是菩提)

이는 〈유마경〉에 설해져 있는 말과 상통하는 말이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다리를 들고 내리는 것까지 도량으로부터 와사 불법에 머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諸有所作 擧足下足 當知皆從道場來 住於佛法矣)
〈경덕전등록〉 3권 ‘도신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당 태종이 도신 대사가 터득한 불도의 깊은 이치를 흠모하여 서울로 오게 하였으나 대사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황제가 이러기를 세 번 거듭하였지만 도신 대사는 끝내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네 번째는 황제가 노하여 ‘이번에도 일어나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머리를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사신이 절에 도착, 황제의 말을 전해주자 도신 대사는 목을 길게 뽑아내 칼에 갖다 대면서 베어가라는 시늉을 하였다. 얼굴빛이 태연하고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사신이 남다른 인물이라 여기고 그냥 돌아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전하자 황제는 스님을 더욱 찬탄하고 존경을 하면서 보배와 비단을 하사했다고 한다.

제자인 홍인 대사가 황매현(黃梅縣) 동산(東山)에서 선법을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도신 대사와 홍인 대사의 법을 병칭해 동산법문(東山法門) 또는 동산정문(東山淨門)이라 하였다.

〈선문염송설화〉 108칙에 운거요원(雲居了元) 읊은 송이 있다.

“속박됨이 없이 명백하게 해탈한 몸이여! 서산 언덕 깊은 곳에 한 송이 꽃이 피어 봄소식을 전하네. 설령 문황(文皇)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변함없이 기주(?州)의 광제(廣濟) 사람이었을 것이네.”

꽃 한 송이가 무한한 봄소식을 전하고, 한 방울의 물에도 거대한 바다의 짠맛이 느껴진다는 뜻으로 속박이 없는 해탈 이외에 더 이상 어떤 존재가 있겠느냐는 말이라고 설화에서는 보충 설명을 하였다.

대사는 72세의 일기로 좌선한 채 입적하였다. 100여년이 지난 대종(代宗) 때에 와서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와 자운(慈雲)이라는 탑명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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