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모양을 볼 때,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코가 냄새를 맡을 때, 혀가 맛을 볼 때, 몸이 촉감을 느낄 때, 무엇을 생각할 때는 욕계와 색계입니다. 있음과 없음,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일체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욕계, 색계를 벗어나 무색계의 보살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이런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한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고자 49년간 팔만사천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팔만사천 분별망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팔만사천 분별망념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것이 팔만사천 법문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을 또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 것은 팔만사천 분별망념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와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손가락은 도구와 표식으로, 표식에 의지하여 물건을 찾고 손가락을 의지하여 달을 보게 되지만, 달은 손가락이 아니고 표식은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팔만사천 분별망념도 이름이고 팔만사천 법문도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며, 티끌이 아니고 이름이 티끌이며, 이름이 부처이고, 이름이 여래(如來)이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금강경〉은 부처님이 삼계 가운데 무색계의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것입니다. 〈금강경〉은 보살 10지, 4선, 4정, 5온의 뜻을 담은 경전입니다.

보살지(菩薩地)는 색, 수, 상, 행, 식이 온전히 공함을 깨달을 때 증득하는 과위로서 성인의 경계입니다. 보살지인 성인의 경지는 우리들의 언어와 문자, 생각으로 접근 될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언어와 문자,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런 수행 과정이 현재 지구상 우리들의 근기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마 대사는 이러한 내용을 중국에 전했습니다. 인도 27대 반야다라 존자는 남천축국(南天竺國)의 달마 대사에게 법을 전했습니다. 반야다라 존자가 달마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중국 너른 땅에
길 하나 제대로 없어
질손(姪孫)의 발뒤꿈치만
바짝 좇아야 하겠구나.
금계(金鷄)는 용하기도 하지
쌀 한 톨 입에 물어
시방(十方)의 나한승(羅漢僧)을
공양(供養)하는구나.

중국 땅이 비록 넓으나 불법이 널리 펼쳐지지 못하여, 불법을 널리 펼치는 선사의 뒤를 따를 뿐이란 것입니다. 쌀 한 톨을 시방의 나한승에게 공양한다 함은, 한 마음의 일체중생들을 깨우침으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달마 대사는 반야다라 존자 열반 후 남천축국에서의 교화를 마치고, 뱃길로 중국 남해에 이르러 양나라 금릉에 도착했습니다. 달마 대사가 양무제를 만났으나 달마 대사는 무제의 근기가 불법에 맞지 않음을 알고 양나라를 떠났습니다. 이 때 양나라 지공(志公) 조사가 양무제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서역 남천축국에서 ‘보리달마’라는 승이 왔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양무제가 대답했습니다. “어제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소.”

지공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했고, 만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양무제가 묻기를 “서역 남천축국의 보리달마가 누구였던가요?” 지공 조사가 답하기를, “그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관세음보살의 후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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