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 명지금강문수회 회장

▲ “한 글자도 빠뜨리면 안 돼요.” 김명옥 회장은 새벽이면 조용히 노트를 편다. 머쓱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한다. “40년 넘게 쓰다보니 이제야 ‘집착없는 자유’를 알겠네요.” 햇살이 비치는 오후가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일타 스님이 심은 불심씨앗
1976년 감로사 보살계서
스님 지목·글 받고 발심
〈금강경〉 매일 읽고 필사
“집착 없는 자유” 뜻 알아


수행은 지혜와 자비를 낳다
명지장학회로 인재불사
매년 800만원 후원
행자복 직접지어 보시
자비의 쌀만 8톤 달해


새벽 2시 30분, 김명옥 명지금강문수회 회장이 맞는 하루 첫 시간이다. 김명옥 회장은 일어나자마자 곧장 〈금강경〉을 손에 잡는다. 5000자가 넘는 〈금강경〉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 내려가면 어느덧 동이 튼다. 41년, 김 회장이 〈금강경〉 읽기를 추천받고 하루도 빠짐없이 적고 또 읽은 시간이다.

수행은 지혜를 낳고 그 지혜의 결과는 자비다. 꾸준히 수행을 해온 김명옥 회장은 자연스럽게 도반들과 자비나눔을 실천했다. 그 첫 번째 나눔은 인재불사로 회향했다. 인재불사와 승보공양은 명지장학회 창립으로 이어졌고, 이 원력이 발전해 부산 도심 해인사 직할포교당 대명지사 건립까지 이어졌다.

1월 9일 방문한 부산 대명지사에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따뜻한 겨울을 발원하며 새롭게 들여온 온풍기가 법당 내를 훈훈하게 했다. 공양간과 화장실 등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다. 불사로 인한 인부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282평의 법당에서 느껴졌다. 법당 내의 소음과 먼지는 오히려 야단법석이 돼 새해 포교 전법의 신바람을 기대케 했다. 모두 인재불사에 나서 온 김명옥 회장의 희망과도 같았다.

일타 스님 인연이 마음의 인(印)으로
김 회장의 불연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 가족들의 영향으로 사찰을 간간이 찾긴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불자가 된 것은 40대에 부산 감로사에서 일타 스님에게 보살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많은 대중들 가운데 갑자기 저를 일어서라고 하셨어요. 놀라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불법을 잘 모를 때라 보살계 회향일에 친구들 때문에 찾은 것이었거든요.”

일타 스님의 지목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김 회장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이어 온갖 생각이 떠올라 복잡해졌다.

“스님은 저에게 글을 적어주셨습니다. 그 당시는 그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어요. 스님은 글을 들고 해인사를 가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다라니 기도도 하고 108배와 〈금강경〉을 읽으라고 하셨지요.”

김 회장은 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70년대 해인사에 가는 길은 험했다. 왕복 시간만도 8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매월 보름이면 일타 스님에게 받은 글을 가지고 해인사를 찾았다.

“스님께서는 ‘다라니를 하는 동안은 온 우주에 너 하나 뿐이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그 해답을 풀고 싶었습니다. 〈금강경〉의 뜻도 알고 싶어 꾸준히 빠짐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지금에야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집착없는 자유였습니다.”

풀기 힘든 숙제를 내고 열반한 스님의 뜻을 알고 난 뒤 김 회장은 더욱 깊은 마음으로 감사를 올린다고 했다.

“큰스님이시니 친견이 쉽지 않았어요. 지금은 영천 은해사를 찾아 극락전에 모셔진 스님 영정에 절을 올리곤 합니다.”

깨달음에 늦음이란 없다.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고 수행하는 그 삶이 곧 정토였기에 40년의 시간을 더 보내도 바랄 것이 없다는 김 회장이었다.

▲ 김명옥 회장은 … 1976년 일타 스님의 권유로 수행을 시작해 명지장학회를 설립하고 해인사 행자 스님들을 위한 가사 공양과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어 해인사 직할 포교당 대명지사 창립에 힘썼으며 전국의 사찰 불사에 기여했다. 아울러 ‘명지금강문수회’를 조직하고 108사찰 순례를 진행해 법석을 열었다. 책 <물 흐르듯 꽃피듯>, <53선지식을 찾아서>, <대방등대집경>을 편찬해 법공양을 펼쳤으며 미래 인재 불사를 위한 서원을 세우며 활동 중이다. 금강경 독송과 사경 수행을 40년 넘게 진행한 김명옥 회장은 지난 11월 19일 서울 자곡동 탄허기념박물관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6회 금강경강송대회에서 개인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반과 함께 만든 명지장학회
일타 스님과의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낳았다. 일타 스님의 조언에 따라 해인사를 다니던 김 회장 주변으로 하나 둘씩 도반들이 모여들었다.

“해인사를 보름마다 다니면서 도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각사에서도 공부를 했는데 제가 해인사를 다닌다는 것을 안 불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김 회장과 도반들은 해인사를 갈 때마다 행자 스님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도반 중 한 명이 행자 스님들이 너무 추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행자 스님들이 추워보였어요. 가야산 추위는 바람에 살이 에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정도입니다. 그래서 도반들과 함께 결의를 했죠. 직접 행자복을 지어 드리기로요.”

김 회장을 비롯한 도반 4명은 행자복을 각자의 집에서 만들었다. 매달 천을 직접 짜서 만든 행자복이 200벌이었다. 이런 활동이 알려지며 도반도 9명으로 늘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나니 더욱 신바람이 나더군요. 승합차 한 대를 가득 채우고 함께 해인사를 다녔습니다. 그분들이 지금까지 함께 하는 명지장학회의 이사들입니다.”

1980년 이 9명의 도반들은 함께 ‘명지장학회’를 조직했다. 명지장학회는 1년에 두 차례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금뿐만이 아니다. 어머니 손맛으로 지은 만발공양까지 해인사에 전했다. 또 쌀도 전달했다. 회원들이 모은 쌀만 8톤에 달한다.

“1년에 800만원을 주기적으로 드릴 수 있었어요. 사실 9명의 이사들로 힘이 부쳤는데, 회원이 600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해인사 참배도 회원들이 손수 버스를 빌려 조를 짜서 함께 움직이니 가능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모이자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꿈꾸게 된 것이 해인사 포교원입니다.”

▲ 김명옥 회장은 노트에 한 자씩 정성스럽게 〈금강경〉을 쓴다. 쓰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부분에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재차 읽는다.

한 자씩 마음에 꾹 새기는 보현행 서원

도반과 함께하는 수행 박차
‘명지금강문수회’ 구성
버스서 〈금강경〉 1000독
10년 기념 〈53 선지식…〉 발간
“佛恩 조금이나마 갚을 것”

붓글씨로 포교·전법 나서
‘佛’자 6000점 표구해
불사기금 마련, 69곳 불사
해인사 부산포교당 ‘대명지사’
불사 후 문화 포교에 박차

 

진리에 도달했느냐?
진리에 대한 열정이
가장 중요해


해인사 포교당 대명지사 불사 시작

명지장학회의 회원 수는 더욱 늘어 현재 1000여명에 이른다.

김 회장은 이 힘을 바탕으로 1997년 부산 북구 구포2동의 삼정그린코아 상가 4층을 분양받았다.

불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불자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김 회장은 1만점의 ‘불(佛)자’를 직접 그려 나눠주겠다는 원을 세웠다. 인터뷰 중 보여 준 팔에는 아직도 이 ‘불자’를 그리다 남은 혹이 남아있었다.

계기를 물었다. 김 회장은 “어느 스님께서 돈이 있어 보이는 불자에게는 작품을 적어 두세 점을 넘겨 줬지만 가난해 보이는 불자들에겐 작품을 주지 않는 모습에서 다짐을 하게 됐다”고 했다.

“작품을 받은 불자들이 스님께 봉투를 건네 드리더군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외면 당하는 것을 보면서 보살도에 대해 깊이 생각했어요. 제가 적은 불(佛)자가 많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불사의 원동력이 되길 바랐죠.”

김 회장의 붓글씨는 주위에서 놀랄 정도로 성장했고 6000점의 작품을 직접 표구해 대명지사 불사에 활용했다.

김 회장과 도반들의 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 회장과 도반들이 현재까지 전국에서 사찰 불사를 일으킨 곳은 69곳에 이른다.

 

▲ 김명옥 회장이 도반들과 불사한 부산해인사 포교당 ‘대명지사’현판을 가리키고 있다.

108사찰순례 ‘문수회’ 창단, 전국사찰 다녀

2008년 김 회장은 해인사를 함께 찾던 도반 700여명과 함께 ‘명지금강문수회(이하 문수회)’를 창단했다. <금강경〉 1000독을 하며 전국사찰 108곳을 찾아 기도하는 단체다. 문수회는 수행에 있어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차례 버스를 빌려 사찰을 방문합니다. 108곳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가장 중요한 목표는 수행입니다. 수행의 법열로 참석자들이 가는 곳곳마다 기쁨으로 동행했어요.”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들은 법문을 김 회장은 수첩에 꼼꼼히 기록했다. 법사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때마다 기록한 것도 모자라 수첩에는 모두 형광색 줄이 그어져 있었다.

반복해서 다시 읽고 마음에 새긴 표시다. 그렇게 모은 법문을 문수회는 책 〈물 흐르듯 꽃피듯〉을 법공양으로 발간했다.

책 표지에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 상관없다. 과연 얼마나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 열정은 축복이다. 무의미한 욕망은 결국 무의미할 뿐이다. 오직 진리를 향한 열망만이 그 자체로 기쁘고 행복해진다. 자비롭고 지혜로운 보현행의 순례를 떠나자’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열정으로 구법의 순례길을 떠나는 문수회와 그 회원들의 중심에서 주춧돌 역할을 하는 김 회장의 자세가 담겨 있다. 문수회가 책을 발간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53선지식을 찾아서〉는 문수회 10주년을 맞아 2016년 봄에 발간한 책이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떠나 듯 법을 희구한 김 회장의 마음이 담겼다. 마지막으로 〈대방등대집경〉은 법공양을 위해 발간한 책으로 이 책과 인연 맺게 해준 여래원 지성 스님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편찬했다.

김 회장은 “이 모든 법공양을 ‘불은(佛恩)에 보은하는 길’로 여긴다”고 했다. “책 표지도 고급이지만 글씨도 커서 편찬하는데 재정적 소모가 컸겠다”는 말에 김 회장은 짧고 강하게 답했다.

“책이 고급스러워야죠. 법공양은 가장 정성을 들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바른 수행은 바른 삶을 이끌어 냅니다. 이런 삶 속에서 불교가 완성되며 세상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 지름길이 부처님 법에 있는데 어찌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읽고 또 읽을 수 있도록 글을 크게 해서 실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편히 읽도록 배려했구요. 법공양으로 회향한 이 마음이 부처님 은혜에는 티끌 같으나 정말 조금이나마 갚고자 했습니다.”

대명지사, 젊은 동량의 주춧돌 되길

김 회장은 앞으로 자신의 사명을 ‘인재불사’와 ‘포교’로 세웠다. 도반들의 자녀와 인연을 맺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고 걸었다. 김 회장은 자신과 인연을 맺은 청년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이 된다고 했다.

“청소년기에 방황을 크게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생활이 어려워 마음을 못 잡고 가출을 하는 경우도 있죠. 많은 인연들 가운데 16명은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가출을 하면 부모들이 저에게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럼 함께 찾아 나섰는데 제가 정말 잘 찾아냈거든요. 다독이고 안아주고 멘토가 되어줬어요. 지금은 너무나 잘 성장한 모습들을 보면 정말 기쁩니다. 학생 가운데 자신의 꿈을 찾고 나눔의 삶을 결심한 아이도 있어요. 이번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소개 돼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마음이 열린 아이죠. 이름이 박지영인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가 기도 중이신 모습을 보며 저에게 문자를 보냈더군요.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존경심과 환희심이 생길 정도라며…”

김 회장은 젊은 불자들이 넘쳐나는 대명지사를 꿈꾼다며 다양한 문화 포교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회장은 41년 동안 읽고 써서 이제는 안 보고도 〈금강경〉을 외운다고 했다. 일주일에 4편을 정기적으로 적고 현재 258번째 적고 있다는 〈금강경〉은 따로 사경집이 필요 없을 정도다. 눈이 멀어도 〈금강경〉은 독송해서 기억하고 싶다는 설명이다.

〈자비경〉에는 자비심의 조건으로 유능함이 먼저 나온다. 그 유능함에는 마음에 정한 바를 명확히 마무리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정진이 곧 자비라는 말이다. 수행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자비의 시작일 것이다.

김 회장은 옥련암에서 1만배 절을 하면서 멈춤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도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마음을 담기를 기도했다. 4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금강경〉과 수행으로 자신의 삶을 고요히 걸어갔고 그것만으로도 도반들이 생겼다. 도반들과 일군 그 삶의 축제 속에서 김명옥 불자는 ‘부처님처럼’을 되뇌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쟁이입니다. 온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시니까요. 저도 그 욕심을 닮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저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 서원입니다.”
부산=하성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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