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道기행- 깨달음의 길, 아름다움의 길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나그네. 일명 실크로드로 불리는 이 길은 불교 전래의 길이자 구법승들의 구법로, ‘붓다로드’였다. 수많은 석굴사원이 존재하는 이 길은 아름다움의 길이기도 하다. 사진= 황헌만 사진작가
길 위에서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길이 어디예요? 길 위에서 길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래서 행장을 꾸렸다. 그동안 참 많이도 걸었다. 많은 곳을 다녔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방황이었다. 방랑이나 산책과 같은 단어는 하나의 사치였다. 아, 길은 어디에 있는가.

1988년 시작한 붓다로드 순례
그 길서 우리 미술을 다시 봤다
佛道는 깨달음이자 아름다움의 길
“覺者의 참 모습 무엇인가” 화두로
오늘도 ‘길에서 길이 어디냐’ 묻는다


어떤 분이 ‘저기를 봐’ 했다. 좀 더 가면 길이 보인다고. 그래서 나선 길이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비단길’인줄 알았다. 정말 비단이 깔린 아름다운 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길은 나서면 나설수록 험로임을 알게 했다. 실크로드 기행(紀行)은 고행(苦行)이었다. 실크로드는 중국 비단이 로마까지 가 인기를 끌게 했던 길이다. 비단은 금과 같은 무게로 바꿀 정도로 인기였다. 로마 한림원은 국고를 축낸다하여 비단옷 착용을 금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 길의 이름, 하지만 고대 동서교통로가 되었다.

이게 길이야, 하고 가르침을 주신 분. 그 분을 쫓아 중국대륙을 헤매고, 또 사막을 건너 만년설의 파미르 고원을 건너, 간다라를 건너, 인도로 갔다. 아, 여기, 룸비니와 붓다가야, 거기에 길을 가르쳐 준 분이 있었다. ‘붓다로드’가 있었다. 바로 불도(佛道)였다. 깨달음의 길이었다. 붓다로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했다. 북방불교의 길, 그 길은 중국대륙을 거처 한반도에 이르렀고, 궁극적으로 신라문화를 꽃 피우게 했다. 종점은 토함산이었고, 거기에 세계적 국보 석굴암을 세우게 했다.

불교 전래의 길. 아니, 불도, 그 깨달음의 길, 노상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화두는 깨달음과 아름다움이 되었다. 미술이라는 단어 하나로 담기에는 뭔가 아쉽게 하는. 물론 절에서는 미술 역할을 ‘장엄’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장엄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찰은 불교미술관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절을 세울 때, 미술관을 건립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찰은 미술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찰 순례는 미술관 탐방의 길이었다. 바로 깨달음의 길이면서 아름다움의 길로 안내하는 것과 같았다.

카라코럼 하이웨이 훈자 부근. 사진= 황헌만 사진작가
‘붓다로드’를 본격적으로 답사하기 시작했다. 1988년 여름이었다. 당시 ‘중공’이라고 불리던 중국대륙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한국 여권으로는 들어 갈 수 없는 ‘죽(竹)의 장막’, 그 ‘공산당의 나라’에 겁도 없이 입국했다. 한 신문사의 후원으로 들어간 중국대륙 취재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인연인가. 현지에서 비자가 연장되고, 여행경비까지 해결되고, 수행원까지 생기게 되고, 뭐, 인생이 바뀌려고 그랬던가. 나는 3개월 동안 중국대륙을 지그재그 누볐다. 백두산에서 티베트까지 갔다. 그때 타크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을 횡단했다. 돈황석굴과 용문석굴을 거치는 언저리의 하서회랑 협곡에서, 나는 서울올림픽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나의 오지여행은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뉴욕생활을 졸지에 마감하게 되면서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어떤 기업의 후원을 받아 실크로드 미술기행단을 꾸리기도 했다. 당연히 여름과 겨울 방학은 오지에서 지냈다. 당시 나의 안내로 오지 체험한 미술가들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몇몇 화가들은 인생관이 바뀌어 ‘시대구분’의 경계선을 이룰 정도라고 의미부여하기도 했다.

불교 동전(東傳)의 길. 그 붓다로드를 다니면서 나는 우리 미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니, 정확한 표현으로는 한국불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불상은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속인의 눈으로 ‘최고의 불상’ 단 하나만 골라 보라 한다면, 나는 토함산 석굴암을 꼽았다. 심지어 나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다. “만약 한반도가 침몰되어 단 하나의 아이템만 허락한다면, 나는 토함산 석굴암을 건지겠다.”

그래서 얼마 전 나는 <토함산 석굴암>이라는 제목의 장편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석굴암은 한국 불교미술의 최고봉이라고 칭송이 자자한데. 하지만 최고봉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책도 아직 접하지 못했다.

가치는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고통과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10대 이래의 의문점이었다. 정확하게는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의 석굴암 기행 단원을 공부한 이래의 의문점이었다. 이 의문은 대학에서 불교미술을 공부해도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나의 방랑은, 아니 방황은, 실크로드 오지로 이어졌다. 수십 번 그 길에서 헤매는 동안 실크로드는 어느새 붓다로드로 바뀌어 있었다. 더 쉽게 말한다면, 토함산 석굴암의 가치를 탐구하는 답사여행이기도 했다. 좁게는 석굴사원 순례의 길이었다.

중국 개방정책 이래 이 순례의 길은 너무 편해졌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공부방’은 관광지로 바뀌었다. 조용하던 불적(佛蹟)이 이제는 시끄러운 관광지로 바뀌어 나의 발길을 멀게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히말라야 언저리, 티베트라든가 라닥, 아, 라닥, 거기 알치사원, 그리고 카라코롬 하이웨이, 이런 곳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나는 관광지를 싫어한다. 소음만 가득한 곳, 나는 그런 곳을 싫어한다.

인도 성지(聖地) 순례의 길에 올랐다. 아니 인도 석굴사원 탐방에 올랐다. 그래서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 등을 감동하며 답사했다. 도처에 ‘불상’이 있었다. 불상(佛像)은 글자 그대로 ‘깨달은 이의 모습’ 바로 ‘붓다 이미지’이다. 지역이나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가 나의 관심권 안에서 학구적 호기심을 자아냈다. 불상은 불교 도상학에 의해 원리는 같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난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나는 시대미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더 정확하게는 시대정신이란 말을 좋아한다. 훌륭한 미술작품 속에는 시대정신이 들어 있다. 거꾸로 표현하면, 시대정신이 결여된 작품은 그만큼 허접하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불상은 무엇인가. 깨달은 이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불상을 보러 다니면서, 나는 의문점이 강하게 들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실크로드건 붓다로드건,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 구체적으로 깨달은 이의 참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쉽게 대답한다. 불상을 보라. 하지만 불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많고도 많은 지구상의 숱한 불상들. 그 불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한마디로 불상 작가가 만든 것이 불상이지 않은가. 그래서 불상작가를 우리는 불모(佛母)라고 높여 불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 그렇다면 불상 작가는 깨달은 이란 말인가. 아니, 깨달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은 이의 모습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가. 속된 표현으로, 깨닫지 않은 이들이 만든 불상은 모두 가짜란 말인가. 나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고비사막을 건너는 낙타행렬. 사진= 황헌만 사진작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작가 나부랭이(?)’가 만든 붓다 이미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불도(佛道)는? 분명한 것은, 그러니까 깨달음의 길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아름다운 불상은 많고도 많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길을 찾았다. 아름다움이 함께 하는 불도는 더욱 멋있었다. 붓다로드의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기원 1세기 무렵까지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5백년간을 동양미술사에서는 ‘무불상 시대’라고 부른다. 불상의 기원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마투라와 간다라, 이 두 군데를 주목하게 했다. 그 현장을 몇 번이고 답사하게 했다. 나는 무불상 시대의 의미를 높게 보고자 했다. 왜 불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세계의 많고도 많은 불상을 보러 다니면서, 나는 오히려 ‘불상 없던 시대’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 들였다. 석굴사원 순례의 길은 결국 ‘불상 지우기’ 순례로 바뀔 때도 많았다. 깨달음의 경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의 눈에 무슨 불상? 무슨 붓다 이미지?

아무튼 나는 길에 나설 것이다. 실크로드 방랑은 붓다로드 고행이 될지라도, 나는 길 위에 나설 것이다. 물론 나의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더군다나 길 위에서 또 다시 길을 물을지 모른다. 길은 어디에 있어요? 노자(老子)가 말했던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길을 길이라고 하면 길은 아니다. 길은 양식화되면 길의 생명은 끊어진다. 길은 도전, 그 자체여야 한다. 늘 새롭게 꿈틀거리는 행보, 거기에 진정 길이 열린다(라고 믿고 싶다). 수행자나 예술가에게 있어 안주(安住)는 가장 무서운 적이지 않은가. 길은 길 위에 나설 때, 길의 의미를 안겨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길 위에 나서려 한다.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길에서 길이 어디냐고 묻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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