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수행만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이 모두 가나니, 단지 가서 아미타불을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 걱정 하리오.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수행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수행도 없으면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 만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참선·염불 같이 닦으면 스승 되어 윤회 벗어나
관음보살 친견 후 변재 얻고 하루 10만 번 염불

참선 보다는 염불이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행법이니 선(禪)과 염불(淨)을 같이 닦아 ‘뿔 달린 호랑이(戴角虎)’처럼 세상의 스승이 되라는 가르침을 담은 선정사료간(禪淨四料簡)이다.

참선과 염불을 같이 닦을 것을 설한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근원이 된 이 법문을 설한 분이 바로 중국에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이다. 중국에서 아미타부처님 성탄절을 영명연수선사의 탄신일인 음력 11월 17일로 정해 기념할 정도로 유명한 이 스님은 선종인 법안종(法眼宗)의 제5대 조사(祖師)이자 연종(蓮宗: 정토종)의 제6대 조사로 양대 종파에서 높이 존숭을 받은 분이다. 시대적으로 앞선 고승ㆍ대덕을 일단 뒤로 미루고 이 분을 연재의 서두에 소개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참선이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요, 염불이 하열한 수행방편으로 알고 있는 현실에서, 본래성품을 깨달은 선종의 조사가 왜 6바라밀을 닦고 염불로 보림하여 윤회를 벗어나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분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공부해 보자.

공금으로 방생하다 사형에 처해도 무심한 경지
북송시대에 태어난 스님의 법명은 연수(延壽)이고 호는 포(抱)이며, 영명사(永明寺)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라 일컬었다. 16세에 글을 지어 세상에 천재로 뽑힐 정도로 숙세(宿世)의 선근이 많은 이 분은 일찍부터 출가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허락을 하지 않자 세속에 계시면서도 불법을 돈독히 공부하였다. 총각시절부터 법화경을 수지독송해 오셨으며, 법화경을 보실 때는 글을 한번에 다섯 줄씩 봐 나갈 정도로 비상한 근기였다. 세속에 살면서도 살생이라고는 벌레 한 마리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방생(放生)하길 좋아하셨으며, 육류와 오신채(五辛菜)도 먹지 않았다. 세속에서 이미 출가승보다 엄정한 계행을 실천한 분이었다.

일찌기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고을 원 살이를 할 때의 일화다. 워낙 자비로운 분이라 산짐승이나 물고기 파는 것을 보면 그것을 꼭 사서 방생을 해줘야만 했던 스님은 자기 돈이 없을 때에는 공금(公金)으로 사서 방생을 해줄 정도였다. 그와 같이 수년을 하다 보니 마침내는 많은 공금을 축내어, 그런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처형(處刑)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국법은 공금을 사사(私事)로 쓴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죽이게 되어 있었다.

당시 조전왕이 명령을 내리길 “죄인을 형틀에 매달아 칼로 목을 치려 할 때 죄인의 안색이 변하거든 목을 베고 안색이 변하지 않거든 목을 베지 말고 풀어주라”고 했다.

명을 받은 형리(刑吏)가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는 칼을 들어 목을 치려 해도 스님의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태연(泰然)하더라는 것이다. 형리는 왕의 분부대로 목을 베지 않고 풀어주었다.

종달새가 옷자락에 집 지을 정도의 자비심과 삼매력
이런 일을 겪은 스님은 인생 무상(無常)을 더욱 크게 느끼시고는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번에 꼭 죽을 사람이었는데 부처님 덕에 살아나서 이제 부처님 제자가 되고자 하니 나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잊어주기를 바란다”고 하시고는 명주(明州) 땅에 용책사 취암영명(翠巖永明)대사에게 출가하셨다. 그때 스님의 나이는 34세였다.

그후 천태산의 천태덕소(天台德韶)국사에게 찾아가서 그곳에서 비로소 대도(大道)를 성취하게 되셨다. 처음 깨달음을 얻기 전, 지자암에서 90일간 잠을 안 자고 철야정진을 하며 애를 써서 정(定: 삼매)에 들게 되셨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정에 드시어 마침내 견성(見性)하여 법안종의 제5조(祖)가 되신 것이다. 당시 삼매에서 나와 출정(出定)을 하고 보니 옷자락 속에 종달새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법화경 독송ㆍ염불ㆍ설법ㆍ보살행하며 짐승까지 구제
영명선사는 조사가 되어서도 두 가지 뜻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는 평생토록 법화경을 독송하고자 하는 것과 많은 중생들께 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계속 선정(禪定)을 닦아 나갔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를 같이 행할 수는 없어서 부처님께 의뢰하여 결정을 하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지자선원에 올라가서 심지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일심선정(一心禪定)’이라고 쓰고 다른 하나는 ‘송경만선장엄정토(誦經萬善莊嚴淨土)’라고 써서 말아놓고는 부처님 전에 판단하여 주시기를 기원하고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집어서 펴보니 ‘송경만선장엄정토’라고 쓴 것이었다. 다시 섞어 가지고 두 번째로 집어서 펴보니 역시 처음 것과 같았다. 그와 같이 하기를 일곱 번을 해보았으나 ‘일심선정’은 단 한 번도 집혀지지 않고 일곱 번 모두 다 ‘송경만선장엄정토’였다.

이에 영명선사는 모든 의심을 풀고 법화경을 독송하며 많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면서 정토수행을 하기로 결심하고는 그 즉시 염불을 하기 시작하셨다.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매일같이 설법과 만행(萬行)을 행하심에 하루도 휴식 없이 실천하셨다. 마침내는 산에 사는 조류(鳥類) 금수(禽獸) 미물(微物)들을 위해 천주봉에 올라가 법화경을 외우시고 높은 소리로 염불을 해주곤 하셨다.

그와 같이 3년을 하시고 난 어느날 삼매에 드시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자, 관세음보살께서 감로수(甘露水)로 입을 씻어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관음변재(觀音辯才)가 열려 입을 열면 청산유수(靑山流水)같이 법문이 나오고, 듣는 사람들도 모두 환희심을 내어 발심을 하게 되며, 또한 모두 염불하여 윤회를 벗어난 세계인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게 되었다.

이때 영명선사께 법을 배우려 모여든 대중은 무려 2천여 명. 영명사에서 15년 동안 주석한 사이에 제자 1,700인을 제도하였고, 천태산에 들어가서는 1만 명에게 계(戒)를 주었다. 평생 염불을 하며 정토왕생을 발원하였고, 저녁에 별봉(別峰)에 가서 염불할 적에는 옆의 사람들이 하늘의 음악(天樂)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떠도는 귀신에게 시식하고 방생하기를 말할 수 없이 많이 하였고 40만 본의 미타탑(彌陀塔)을 찍어서 보시하며, 또 승속에 염불을 권장하여 정토종을 널리 퍼뜨리는데 전력하여, 세상에서는 미륵보살이 화생하였다고 칭송하였다.

특히, 매일 108가지의 일과 조목을 정하여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염불만도 10만 번씩에 달했다. 생전에는 〈법화경〉을 1만 3천 번 외웠고, 특히 〈법화경〉을 들에서 암송하면 양떼가 감응하여 엎드려 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국청사에서 참회법을 닦고 있을 때, 밤 중에 절을 돌아보다가 보현보살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홀연히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일생동안 꽃을 뿌리는 공양을 하였다.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종경록〉. (청나라 판본)
선과 교의 금자탑 ‘종경록’ 100권…선정쌍수 황금시대
영명선사는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는 감응을 받고 관음변재(觀音辯才)를 얻게 된 후 팔만대장경을 요약했다는 〈종경록〉 100권, 〈만선동귀집〉 6권, 〈유심결〉 1권 등 60여 부 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종경록〉을 세 권으로 요약한 〈명추회요〉는 성철스님이 평생 애독한 어록이기도 하다.
영명선사는 일반 선사들과는 달리 신도들을 두루 자비로 대하고 보살행을 널리 실천했다. 율사로서 계율도 설하고, 선사로서 선을 지도하며, 인연 있는 사부대중에게 염불을 가르치며 대자대비행을 펼쳤다. 항상 옆에 따르는 제자들이 2~3천 명이었으며 대중법회 때마다 1만여 대중이 운집할 정도로 선정쌍수의 황금시대를 구가한 대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선사께서는 개보(開寶) 8년(975) 2월 26일 새벽에 대중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시고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으셔서 향을 사루고 염불하시고는 고요히 열반에 드셨다. 다비를 하고 나니 많은 사리가 나와 탑에다 모시어 지금까지도 보존해 내려오고 있다.

견성 후 염불과 108가지 행으로 보림한 대선지식
깨달음 이후에도 하루 108가지 행을 닦으셨다는 선사의 행적을 살펴보면, 오늘날 위기의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깨달음만 있고 보살행이 없는 소승불교, 참선만 위대하고 다른 방편은 하열하다는 오만, 출가승이 육식과 음주, 음행 등을 태연히 자행하는 파계, 매년 안거에 드는 선승은 많지만 깨닫지 못하는 수행가풍. 그리고 해오(解悟) 또는 작은 깨달음을 확철대오로 착각하여 깨달음 이후 성태(聖胎)를 보호하고 지켜가는 공부인 보림(保任)법이 없어 막행막식에 떨어진 풍토, “책 보지 마라”(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경전을 굴려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경전을 비방하고 공부하지 않는 풍토를 만들어 이른바 ‘무식불교’에 떨어진 한국불교의 현실에 영명선사의 삶은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특히, 선종과 정토종은 물론 교종의 대선지식으로서 염불수행을 하고 정토왕생을 발원한 것을 볼 때 염불이 결코 하근기만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 오히려 지혜와 공덕을 함께 닦은 상상근기(上上根機)들이 간절히 권유한 원돈(圓頓: 원만하고 단박에 증득하는)법문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불자들은 자세히 살펴보고 정토법문에 대해 참구해 보시길 간절히 발원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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