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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읽어라! 그래야 불교 맛을 안다”불교 철학 Essay 붓다 찾는 천로역정
방영준(성신여대 명예교수)  |  hynbulnews@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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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13  1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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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들의 모습. 경전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수행과 직접 경전을 읽어 붓다와 일체가 되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출처=현대불교 자료사진

② 경전의 바다 어떻게 건널 것인가?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출발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불교 경전에 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해 보고자 고개를 돌리면, 먼저 엄청난 문헌의 양에 압도되어 기가 질린다. 다양한 경전의 내용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까지 있어 우리를 혼돈케 하고 당황시킨다. 〈아함경〉의 내용을 인용해 보면 붓다도 그 혼란을 이미 예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붓다와 일체가 되도록 노력하자
붓다의 고뇌 함께하고
가르침을 체감하는 게
붓다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경전의 바다를 넘는 것 자체가
수행의 길이 아닌가 싶다

“훌륭합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인과 법칙(연기론)의 심심 미묘함이라니. 그것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너무 간단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실로 이 인과 법칙은 심심 미묘하며, 그것은 심오하다. 이 연기법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들은 타래처럼 뒤얽히게 되었고, 마치 삼이나 왕골 밭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이게 되었으며, 쇠퇴의 운명과 비참함과 몰락과 끝없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위의 경전 내용을 보면서 붓다의 깊은 고뇌를 읽는다. 그의 명석한 제자 아난다마저 연기법이 간단하다고 말하니. 연기법은 붓다 가르침의 제일 근원으로 여기서 무아와 공이 나오고 자비정신의 원천인데 아난다마저 이해 못하니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나도 연기법을 간단하게 본 시절이 꽤 길었다.

붓다는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후 보리수 밑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즐기셨다. 그 후 붓다는 고민에 빠진다. 이 귀중한 깨달음의 진리를 혼자서 지니고 있어야 하느냐? 아니면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느냐?

“고생 끝에 겨우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 미묘하니 어찌 알리오.
걱정에 메이고 무명에 덮인 사람은
이 법을 깨닫기 어려우리라.”

붓다는 이러한 고뇌를 넘어 고(苦)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위해 드디어 길을 떠난다. 붓다의 여정은 태풍과 파도가 산같이 몰려오는 것에 배를 띄우는 것이리라. 연기와 무아는 인간 삶의 양식과 너무나 어긋나는 역리이기에.
상상해 본다. 붓다가 연기법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뇌하셨을까?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첫 설법의 길에 우연히 만난 외도(外道) 우파가(Upaka)이다. 그는 붓다의 거룩한 모습에 이끌려 붓다에게 접근하며 말을 붙인다. 붓다는 반가워 깨달음의 내용을 말하니 놀라고 황당해 하면서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붓다 첫 설법의 실패담이 이렇게 경전에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지. 우리 모두가 우파가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리라.

붓다는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법활동을 하였다. 또한 붓다는 상대의 근기와 위치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설했다. 붓다와 붓다의 제자 사이는 연기적 관계이다. 붓다의 법이 제자들에게 다양하게 들릴 가능성은 항상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붓다의 불법은 붓다 입멸 후 근 400년 간 송습교단(誦習敎團)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러한 구전전승으로 인해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믿을 만한 상당 부분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구전에서 문자화된 경전으로 정착된 시기도 이론이 다양하다. 인도인들은 역사적 연대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이라 한다. 역사상의 흥망성쇠는 영원의 진리에 비추어 보면 하찮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붓다가 입멸한 년대도 현격한 차이로 다양한 추정이 있으니 경전이야 오죽하랴. 또한 경전에 별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한다. 익명성이야말로 성스러움에 어울리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등 이름을 남긴 인물들도 있지만 이 이름을 이용한 익명의 저자들도 있다고 하니,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어떻게 이 넓고 긴 경전의 바다를 건너야 하나? 불교의 삼보중 제일 핵심적인 것이 불법이고, 이 불법을 담고 있는 것이 경전인데 이를 어떤 기준으로 긍정할 것인가? 필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긍정할 것이냐에 치열한 고뇌를 한 선각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이런 선각자 때문에 불법이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한 분이 디그나가(Dignaga,480-540)이다. 디그나가는 “음미되지 않은 싯다르타의 말은 진리가 아니다”라며 붓다를 이해하는 정교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원효도 같다고 한다. 불행히도 너무나 훼손된 채 전해오는 〈판비량론(判批量論)〉에 원효의 비판철학적 숙고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경전과 종파가 있어도 붓다의 제일 중요한 지혜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것은 붓다를 치열하게 독해한 선각자들의 덕분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자세로 넓고 깊은 경전의 바다를 건널 것인가? 이것은 바로 디그나가의 방법처럼 붓다 말씀을 ‘바르게 음미’하는 것이다. 이 ‘음미’의 방법은 전문가에 따라 ‘문헌 분석’에서 부터 ‘역사적 접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붓다에 소박한 믿음을 가진 평범한 불자는 어떻게 경전의 바다를 건너야 하나?

나는 붓다라는 역사적 인물을 뗏목으로 삼아, 경전의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다. 이 방법이 일반인에게는 제일 빠르고 쉽게 붓다 다르마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생각한다. 붓다라는 역사적 인물로 접근하는 경전 해석은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 살펴 볼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붓다의 전 생애를 통해 나타난 붓다의 인격과 지향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불교와 긴 인연을 맺었지만 붓다의 생애를 통해 전해진 체온은 최근에야 느꼈다. 붓다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생애를 연구한 책과 자료를 보면서 어떤 경전보다 큰 감명과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불교도들이 붓다를 체온으로 느끼지 못하고, 역사 인물에 대한 지식 비슷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수입된 불교에 대한 습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불교는 붓다의 종교인데 붓다 생애의 발자취에서 그 뜻을 찾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창시자는 초월적인 신이나 성령을 받은 존재가 아니고 사람이다.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바로 불교를 아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붓다다. 그래서 불교는 사람을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상위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두 번째, 붓다 전법의 목적과 핵심 사상의 틀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붓다 전법 목적과 핵심사상은 불교의 모든 교리 책에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를 왜 새삼 강조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붓다를 교조로 내 세우는 각종 불교에서 오히려 붓다 다르마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붓다 다르마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기본 목적과 핵심사상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붓다 핵심사상에 대한 강조는 스리랑카의 고승이자 탁월한 불교학자인 라훌라(Walpola Rahula)의 저서 〈What the Buddha Taught〉에서 절절히 나타난다. 그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와 무아(無我) 그리고 수행 등 여섯 주제로 나누어 핵심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서양 불교학자들이 핵심사상을 왜곡하거나 간과하는 것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교라는 연이 붓다 다르마와 연결하는 얼레의 실을 끊고 날아간다면 붓다의 불교는 아니다.

세 번째, 붓다는 탁월한 교사로서의 자질과 실용적인 윤리학자로서의 품성을 지닌 분이라는 점이다. 붓다 생애의 발자취와 설법 내용을 보면 붓다는 참으로 매력적인 분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전하시고, 상대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매우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가르침을 전하는 완고한 설법자가 아니다. 그는 항상 연기적 입장에서 가르침을 전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보면 현대 교육 방법론의 이론을 2500여 년 전에 개발하고 실천하신 분이다. 또한 붓다가 제시하는 윤리적 규범은 어떤 절대적 기준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처한 입장에 따라 적용되는 실용적인 규범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붓다에 대한 세 가지 특성은 내가 도출한 것이 아니라 불교 저서들에 나온 것들을 종합 정리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 틀로 경전을 보면 붓다의 참 뜻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붓다와 일체가 되어 보는 노력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붓다와 일체화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붓다의 고뇌를 함께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철저히 체감하여 붓다와 하나 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경전의 바다를 넘는 것 자체가 수행의 길이 아닌가 싶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문제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대승 경전이 붓다를 내세워 불설을 가탁(假託)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일종의 기만행위로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승 경전의 내용은 붓다의 기본 사상이 주변의 환경과 연기하여 진화, 확장되었다고 본다. 대승적인 씨앗은 초기 경전에 이미 파종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불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경전을 직접 접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나의 사부로 생각하는 어느 도반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새삼 생각난다. “불교를 해석하고, 논쟁하는 책은 이제 그만 읽으세요, 그리고 직접 경전을 읽으세요, 그래야 제대로 불교의 맛을 압니다.” 그래서 목돈을 들여 〈니까야 전집〉을 사긴 샀는데 아직 바라만 보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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