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백련사에 가다

 

눈내리는 어느날, 백련사 대웅전을 참배하는 부부의 모습

곤돌라가 어디쯤 올랐을까. 갑자기 주변 풍경이 바뀐다. 세상이 확 뒤집혀버린 느낌이다. 스노보드나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도 오간 데 없다. 무주리조트의 곤돌라 탑승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눈이 드문드문 쌓인, 그저 그런 갈색 산이더니, 해발 1,200m를 지나면서 새하얀 설산으로 돌변한다. 굼뜨고 의심 많은 나의 감정이 이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극장문을 열고 들어가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만큼 족히 걸렸으리라.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나는 영화 자막 대신 엉겁결에 곤돌라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나무들 위로 눈보라가 치고 무엇에 쫓기듯 새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마치 옷장문을 열면 ‘나니아’라는 마법의 세계도 동시에 열리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세계를 꽁꽁 얼게 하는 마녀는 어디에 있을까?

눈보라에 덕유산 산행, 설산고행 이랬을까
설산 나무는 마하가섭, 상고대는 만다라
종교적 상상력이 불교를 풍성케 해

곤돌라에서 내리니 설천봉이었다.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하늘로 솟구치듯 800여m 높이를 단번에 올라온 셈이다. 눈보라와 안개 너머로 팔각정이, 아니 요괴가 사는 성이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와 도반들은 그 팔각정이 가까운 기상대에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차고 스틱을 폈다. 몇몇은 마스크와 고글을 써서 눈보라를 막았고, 몇몇은 그저 눈을 감는 것 외엔 별 조치 없이 더듬더듬 돌풍과 안개를 뚫고 데크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손오공과 그 일행은 톈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넜지만 우리는 눈 내린 설원을 걸어 향적봉 입구로 향했다.

 

눈덮인 설천봉 팔각정.

겨울 덕유산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만 그 밖의 계절엔 안개 낀 날이 많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지나는 길에 짙은 안개가 드리워 산속으로 피란 나온 사람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감록도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은 은둔의 산이다.

눈길에서는 아무리 잘 걸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다. 그만큼 힘이 들고, 같은 길을 걸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핑계 없는 무덤이야 어디 있겠냐만, 명색이 등산을 하겠다면서 우리가 곤돌라를 탄 이유이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길가 나무들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거기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공중에 얽혔는데 부러져 내릴 것 같은 상고대(Air Hoar)다. 모두들 이 상고대를 보고 환호하는데, 나만 김성동이 쓴 ‘만다라’의 한 장면을 기억해내고는 묵묵했다. 영화로도 만들었던 불교 소설이다. 토굴에서 꽁꽁 얼어붙은 지산 스님을 빼내는데 가부좌를 틀고 합장한 얼음덩어리였다. 얼어 죽은 스님을 뜨거운 장작불로 다비할 때 누군가 요령을 흔들었다. 그 소리를 수년 전 이 덕유산에서도 들었다. 철쭉과 산죽, 키 작은 나무들이 웅크린 어느 능선에선가 얼음꽃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딸랑 딸랑거렸다. 구슬픈 소리였지만 햇살이 수정처럼 쪼개지고 있어 눈이 부셨다.

 

남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등산객 행렬.

상고대는 눈과 서리, 안개와 구름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더께를 이룬 꽃이다. 이 눈꽃이 만발하면 덕유산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설산수행하는 자세를 취한다. 보라, 저기 저 죽은 지 오래인 주목나무도 부처의 수제자 마하가섭인 양 가부좌를 틀고 있지 않은가.

만다라의 지산과 마하가섭을 닮은 상고대의 주목나무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설산에서 고행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부처가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으러 찾아간 곳은 눈 덮인 첩첩산중의 히말라야가 아니라 마가다국의 변방 가야였다. 부처가 그곳에서 깨달았으므로 훗날 보드가야(Bodhgay쮄)가 된다.

가야에서 히말라야까지는 수백 킬로일뿐더러, 부처가 히말라야 설산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은 경전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법당 외벽에 그려진 부처는 그런데도 히말라야의 맹렬한 추위를 겨우 왼쪽 어깨만을 걸친 얇은 가사로 버티고 있다. 물론 부처의 고행을 우리나라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종교적 상상력이란 때로 불경을 구하러 인도에 간 현장의 이야기가 그러했듯 서유기라는 기묘한 모험담으로 둔갑하지 않았던가.

향적봉 1,614m은 정상치고는 터가 널찍해서 마치 대웅전 앞마당 같았다. 설경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몰려들어 초파일이나 백중 때처럼 분주하다. 일부는 벼랑 쪽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다. 첩첩한 산줄기, 물결처럼 넘실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에 한눈이 팔려 있는 것이다. 이 기분에 봉우리에 오른다. 낮은 데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볼 수 있는 데서 오는 희열, 이 기분에 젖을 때마다 문득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법열이다. 수행자가 깨달음에 눈이 떠서 모든 번뇌가 끊어질 때 온다는 환희지(歡喜地)는 어떤 기분일까?

북덕유산이라 부르는 향적봉은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거리에 있다. 그 향적봉을 경계로 남덕유산이 시작되고,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에 속해 있다. 향적봉에서 30여 분 걸리는 중봉은 북덕유산의 끝 봉우리로, 남덕유산과 갈라진다.

중봉에 올라 대간을 타는 등산객의 기나긴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백련사(白蓮寺)로 하산길을 잡는다. 계곡물이 흐르는 습지라서 바윗길이 미끄럽다. 아이젠을 차고도 발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계곡은 단단히 얼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얼음장을 깨고 맑고 물은 솟아난다. 정상과 달리 계곡에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소나무와 리기다소나무에서 번갈아 눈뭉텅이가 뚝뚝 떨어진다. 얼마를 걸었을까. 흰 눈을 머리에 인 백련사 일주문이 나타났는데, 배가 고파선지 그 모습이 떡시루를 이고 언덕에 선 여인네 같다. 81가지의 난관을 헤쳐 가까스로 천축국에 도착한 손오공과 그 일행도 금강경보다는 떡이지 않았을까.

 

눈 내리는 백련사 대웅전.

백련사는 신라 흥덕왕 때 무렴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덕유산에 은거한 백련선사(白蓮禪師)가 하얀 연꽃이 솟아나온 곳에 지었다는 이야기가 더 그럴싸하다. 절의 다른 이름이 구천동사(九千洞寺)라든지, 구천동의 구불구불한 계곡에 9,000명의 스님이 머물렀다는 비현실적인 전설 때문일 것이다. 구천동은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이자 관문이었던 나제통문(羅濟通門)부터 덕유산 으뜸 봉우리인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금강으로 흐르는 구천동 계곡은 길고도 아득하지만, 덕유산의 신령스러운 안개는 25km에 이르는 그 길이를 덮고도 남는다. 구천동 계곡에는 이런 소문이 떠돈다. ‘안개가 피어오르면 골짜기 문이 닫혔다가, 해가 떠오르면 스르르 문이 열린다.’ 얼핏 환상적인 문장으로 보이지만 나름 논리를 갖췄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된다. 9,000명의 스님이 은둔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하기에.

 

걷는길 : 무조리조트(케이블카 승차)-설천봉-향적봉-중봉-오수자굴-백련사-구천폭포-신대 휴게소-구천동 탐방지원센터

거리와시간 : 16km정도, 5시간 30분 (중봉 코스를 생략하면 10m 4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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