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향일암에 가다

 

금오산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다.

아주 먼 옛날에는 신이 남아돌아갈 정도로 많았나 보다. 일상의 요소요소에 신이 깃든다고 믿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을 섬겼으며, 다신교가 뿌리내린 일본에서는 심지어 도낏자루까지 섬긴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신은 또한 인간을 닮았으니, 신계(神界)를 보면 최고신과 최고신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들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한때 부처가 신 중의 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인도인의 계급의식이 빚어낸 산물이다. 인도인은, 부처가 자연계에서 가장 위대한 해에 버금가는 존재이기를 희망해서 그 이름에 바이로차나(vairocana)라 덧붙였다. 비로자나는 해의 광명을 뜻하는 바이로차나의 인도말 음사이다.

사찰에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데, 크나큰 선정(寂)과 크나큰 지혜(光)를 품었다는 뜻이다.

 

항일암 풍경에 와닿는 아침빛.

부처를 해에 비유하기는 했으되, 그 차이점이 없지는 않다. 해는 구름이나 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도 있으나, 부처의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세상을 비춘다.

여수반도 최남단에 솟은 금오산 323m에는 해의 형상으로 바다 위에 떠오르는 부처를 보러 사람들이 몰린다. 그들은 금오산 정상에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해안선을 따라 절벽을 이룬, 150여m 높이의 향일암(向日庵)에서 해를 맞이한다. 특히 해가 바뀌는 시기엔 하루에 30여 만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일출 명소라지만 향일암에 막상 가보면 제대로 된 일출을 볼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바다를 물들이는 불그레한 햇빛만으로도 사람들은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듯 얼굴이 밝다. 언제 어느 때고 두루 세상을 비추는 비로자나불의 존재를 굳게 믿는 까닭이리라.

금오산에 올라 향일암에 가려면 3가지 코스가 있다. 향일암 일주문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 율림치 주차장에서 ‘유인김해김씨묘’를 지나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 죽포 삼거리를 기점으로 삼아 봉황산을 넘어오는 길. 이 가운데 첫째와 셋째는 너무 짧거나 긴 코스다.

서울에서 밤버스를 타고 내려온 나와 도반들은 두 번째 코스 율림치를 들머리로 삼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별이 총총 빛났으며 그믐달은 캄캄한 밤에 손톱을 박은 채 묵묵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들에서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의견과 그렇지 않으리란 의견이 잠시 갈렸다. 우리는 이내 금오산 들머리를 찾아 걸었고, 헤드랜턴과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뚫고 능선과 골짜기 이곳저곳을 깨웠다. 불청객을 맞이한 나무와 바위와 흙들이 부스럭거린다. 겨울날의 새벽 추위는 남도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았다. 소백산이나 덕유산처럼 칼바람이 불진 않았지만, 이따금 찬바람이 불었고 마른 나무들이 스산하게 울었다.

금오산 정상인 323m봉우리를 지난 우리는 예상보다 일찍 315m봉우리에 도착했다. 정상과 비슷한 높이로 겹쳐 있는 봉우리인데 금오산에서 가장 조망이 넓게 트이는 곳이었다.

능선에 부는 바람이 차서 우리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걸었다. 그 모습이 줄지어 바다로 기어가는 거북이 무리 같았는데, 마침 우리가 오른 산이 바다로 기어가는 금거북이 형상이라는 금오산이었다. 250m봉우리를 향해 걷는 동안 먼바다의 수평선이 약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250m봉에 닿자 바다와 하늘에 걸쳐있는 구름에 붉은빛이 살짝 감돌았다. 바다는 여전히 캄캄했으나 동이 터오는 하늘은 차고 새파랬다.

“수평선에 구름이 차오르는 걸 보니 오늘도 일출 보긴 어려울 거 같네.”

“여기 와서 제대로 된 일출 본 게 딱 한 번이었나? 거북아 거북아, 어서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관음전 문살로 들여다보이는 관음보살상.

주고받는 말끝에 누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를 읊조렸다.

향일암에서 우리가 서 있는 봉우리를 보면 영락없는 거북이다. 향일암의 본래 이름은 영구암(靈龜庵)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산에 들어선 절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음이 틀림없다. 거북은 옛사람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으로 나타났는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선 산악신앙으로 발전했다. 향일암과 금오산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수평선과 나란히 주홍색 구름띠가 일자진을 펴기 시작했다. 그 아래 해가 잠복했을 테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떠오를지 오리무중이었다. 하늘은 검푸른 접시에 홍합을 까서 속을 내놓은 듯 알록달록했다. 다들 해무를 뚫고 둥근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해서 목을 내놓고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누군가 맥 빠진 소리를 했다.

“일출 보긴 글렀어.”

그러나 실망은 잠시뿐, 꼭 둥근 해를 봐야만 일출을 본 것인가. 남도바다에서 세상이 깨어나는 원초적 풍경만으로도 도반들은 충분히 감격한 표정이었다. 삼라만상에 존재 이유가 있듯이 아침 해가 구름 뒤에 숨은 것도 다 이유가 있으리라.

다도해의 섬들을 붉게 물들인 햇빛이 점점 옅어지자 우리는 향일암에 가려고 철제계단을 밟았다. 날이 훤해져 거북이 등껍질 무늬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식으면서 육각형 또는 오각형의 주상절리가 생긴 것이지만, 그보다는 천 개의 거북이 천 개의 경전을 바다로 옮기는 중이라는 상상이 여기서는 훨씬 그럴싸하지 않을까.

향일암에 들어가자 낯익은 전각들이 차례로 눈에 띄었다. 눈길을 더듬어 대웅전 뒤로 난 좁은 길을 찾아냈다. 거대한 암벽이 포개진 사잇길을 따라 원효가 수도했다는 상관음전으로 갔다.

다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아침 햇살이 널리 퍼져서 먼바다의 섬들이 깨어났고, 고기잡이배들은 벌써 해가 뜨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빛나는 생활의 풍경이었다.

 

임포리로 내려서는 언덕길.

상관음전은 향일암의 구조를 확실히 알고 일출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찾는 장소지만, 대부분은 그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러 왔다가 저도 모르게 명당터에 발을 디딘다. 나는 풍수지리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라면 향일암 상관음전에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떤 소망이라도 들어준다는 관세음보살이 거기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향일암 상관음전은 법당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바깥에서부터 묘하게 훈풍이 감돈다. 따듯한 공기에 싸인 몸에서 관세음보살의 손길이 느껴진다.

일출을 보러 향일암에 다녀오면 비로자나불이나 관세음보살 못지않게 생각나는 것이 일주문밖에서 임포리로 내려서는 언덕길이다. 그 지역 명산물인 돌산갓과 홍합 파는 가게가 길가에 줄을 섰다. 해산물 곁에 일종의 옵션처럼 동동주 항아리를 좌판에 두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언덕길을 잠시 멈춰 서서 동동주 한잔에, 갓김치 한쪽 입에 넣어보라. 가슴이 무너지듯 뻥 뚫리는데, 어디 가슴뿐인가. 임포리에 정박한 배 옆구리에 쓰인 글자까지 보일 정도로 눈이 밝아진다.

 

쪾걷는길 : 대율마을 - 율림치 - 정상 - 315m봉 - 250m봉 - 향일암·임포리
쪾거리와시간 : 4.5km 정도, 2시간 30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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