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시조를 보리달마(菩提達磨:Bodhi- dharma)라 한다. 선종의 전등 계보로 치면 인도로부터는 28대 조사이며, 중국에 와서 새로운 선법을 창안하였기 때문에 중국 선종에서는 달마를 초조로 삼게 되었다. 달마의 생몰연대와 중국도래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중국으로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달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어 그의 출신지를 파사국(波斯國), 향지국(香至國), 바라문국(바婆羅門國),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후대에 성립된 자료에는 그가 향지국의 셋째 왕자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제 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을 전해 받은 후 중국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보림전〉에는 달마가 중국에 온 해를 527년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불교를 크게 장려하여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지던 양무제를 만나 무제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 준다. 무제는 은근히 자신이 불교를 크게 장려한 치적을 자랑하며 자신에게 공덕이 성취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왕의 이 물음에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다.(無功德)’고 하였다.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참된 공덕으로 보지 않는 무루공덕(無漏功德)의 입장에서 한 말이다. 이때 왕과 나눈 대화는 분위기상으로 보아 매우 어색했던 것 같다. 하기야 감히 어전에서 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제를 만난 이후 달마는 선법을 펼 시절인연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로 들어간다. 여기서 달마가 9년 동안을 면벽을 했다 하여 ‘소림면벽(少林面壁) 9년’이라 한다.

면벽(面壁)이란 좌선을 할 때 얼굴을 벽을 보고 앉는 자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말이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하여 면벽관심(面壁觀心)이라는 사자성어가 또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말을 다시 줄여 벽관(壁觀)이라 하였다. 벽관의 벽과 면벽의 벽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 물론 둘 다 좌선 수행을 두고 쓴 말이지만 벽관이란 몸과 마음이 벽이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번뇌나 망상이 침입할 수 없는 삼매의 경지를 두고 벽관이라 하는 것이다.

〈경덕전등록〉 3권에 수록되어 있는 〈보리달마전〉에는 벽관의 뜻이 나타나는 말이 나온다. 달마가 그의 법을 이은 제자 혜가(慧可)에게 도(道)에 들어가는 입도방편을 일러준 말이 있다.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보리달마장〉에도 벽관에 대한 설해 놓은 대목이 있다.

“만약 망상을 버리고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 마음을 통일시켜 벽관(壁觀)에 머물게 되면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평등하여 견고하게 머물며 움직이지 않게 된다. 더 이상 문자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진리에 합치되어 분별이 없어지고 고요해져 무엇이 어떻다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경지를 ‘이치로 들어간 것(理入)’이라 한다.(若有捨妄歸眞 凝住壁觀 無自他 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言敎 此卽與眞理冥狀 無有分別 寂然無名 名之理入)

이러한 문헌들의 이야기는 초기 선종에서 벽관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달마로부터 600년이 지난 대혜종고의 시대에 와서도 참선을 지도하는데 벽관으로써 하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
〈서장〉에 대혜선사가 왕내한(汪內翰)에게 답한 편지에 벽관을 망상을 쉬는 좋은 약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을 걸고 벽을 보고 앉아서 마음을 관한다고 하니 그것이 마음속의 망상을 쉬는 좋은 약입니다. 만일 다시 낡아빠진 글귀를 파고들어 근본을 알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장식(藏識) 중에 있는 시작도 없는 생사의 뿌리와 싹을 끌어 일으켜 선근이 자라기 어렵게 만들고 도를 장애하는 어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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