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주인공에 맡겨서 하세요

 

촛불을 밝혀야 마음이 밝아지나요?
질문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저희 신도들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해서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고 공부해 나갈 수 있도록 나와 조상님과 더불어 밝히는 촛불재를 지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촛불재를 통해서 정성스럽게 불을 밝혀서 한순간에 그 어둠이 사라져 버린다면,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꺼져 버리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님들을 의지해서 밝혀야 하는 방편을 쫓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른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에 중심을 두고 산다면
어떠한 괴로움의 상처도 가실 수 있고
어떠한 괴로움의 구덩이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답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도리를 명백히 아셔야 하며 마음의 촛불, 즉 인등이 항상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 백 일 동안 켠다고 한다면 백 일 동안만 불이 켜져 있고 백 일 동안만 진리가 돌아가고 그럽니까? 생각들 해 보세요. 일 초도 쉬지 않고 우리는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찰나찰나 마음이 바뀌고 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를 만날 땐 자동적으로 자식이 돼서 말도 행도 뜻도 그렇게 돌아가고, 또 아내가 오면 아내가 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남편이 돼서 금방 “여보!” 할 수 있는 그런 자동적이고 자유로운 힘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거죠. 오신통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할 때가 여러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 만날 때를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했느니라. 색이 즉 공이요 공이 즉 색이니라. 너희들은 둘로 보지 마라. 모두가 한 찰나 한 찰나 돌아가는 그 이치를 알면 공한 도리를 알 수 있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만약에 나로부터 알 수 있다면, 여러분 육신 속에 업식이 한데 뭉쳐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움죽거리게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제일 먼저 설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뭉쳐 있는 고덩어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만 알면 바로 즉시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과거에 걸어온 길을 짊어지고 나와서 그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악업이든 선업이든 그 업식 자체가 합쳐진 것을 ‘나’ 하나가 짊어지고 들어간 거죠. 아버지의 뼈를 빌리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서 그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바로 자기의 업식을 짊어지고 그렇게 여러분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치로 따지고 볼 때 집만 얻어 가지고 여러분이 그 안에서 살림을 하는 거죠. 이것을 절실하게 생각하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신다면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여러분의 보배를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인등도 인등이지만, 부처님께서 과거에 49년 동안 말씀해 놓으신 경전을 볼 때 “수많은 사생의 마음을 물방울이라고 비유한다면, 바다에 전부 들어가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퍼내도 줄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물컵에 여러분의 마음 한 방울, 물 한 방울 넣어 보십시오. 컵의 물이지 한 방울의 물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어느 것도 붙지 않는 자리입니다. 체가 없으니 붙을 자리가 없죠.

더 말한다면 부처님의 마음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면서 성장하는 마음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마음, 바로 내가 대신 죽어 줄 수도 있는 마음 그 자리에는 어느 것도 붙지 않습니다. 이유가 없고요. 자식이 물에 빠지면 부모는 그냥 들어가서 건지거든요. 자기 죽는 줄 몰라요.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와 같이 자식이 빠졌을 때 뛰어드는 그 순간의 마음,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그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둘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마음이 따로 있고 부처님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두루 하시고, 육의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두루 하지 못하는 차이는 있지만, 내 걸 다 버려서라도 너를 살리겠다는 그 마음은, 잘돼라 하는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과 같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더 큰 바다든 한 그릇은 한 그릇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작은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도 한 그릇, 큰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도 한 그릇, 더 큰 그릇에 물 한 그릇을 떠도 한 그릇입니다. 작은 그릇의 한 그릇이라고 해서 한 그릇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대천세계, 중천세계, 소천세계가 셋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같이 하나가 돼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법을 배운다고 해서 부모를 소홀히 하고 자식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 선원에서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새해맞이 촛불재를 하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의식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본래 안다면 아마 전자에 선지식들이 그렇게 방편을 일러 주시고 많은 설법을 하지 않았을 거고 또 부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런데 모르니까 염불도 있어야 했고, 그 옛날 법을 다 갖추어야 했고, 지금 현재 법과 예전 법이 둘이 아니게 우리는 항상 따라야 하는 것이 예의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알고 행해야 합니다. 모르면서 남이 하니까 그냥 따라 해서는 아니 되죠.

그런데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보이는 물질의 촛불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써, 마음이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래 마음이 밝아 있지 않다면 밝다고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내 마음을 밝힌다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래 마음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그 촛불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 내 부모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전체가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도 내 마음이 밝혀지면 그 마음도 밝혀진다는 얘깁니다.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듯이, 그것은 자연히 되어 있는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을 밝아지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내 마음도,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거나 열심히 하는데도 안된다거나 또는 본인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말썽을 피우는 것도 다 업식으로 인한 거니까 본인이 마음의 촛불을 켜 들고서 간절히 관하게끔 만들어 주고, 또 본인이 부득이 못 하게 되면 부모라도 대신 해 주어서 그 간절한 마음의 전달로 지혜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겁니다. 각자 내가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내가 해 놓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받을 게 있겠습니까? 내가 해야만 내가 한 것만치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라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태워서 어두움을 없애고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촛불처럼,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명을 밝히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항상 마음의 뿌리가 밝아지도록 발원하는 방편이자 진실한 의식인 것입니다.

잘되기를 관한다면 중용의 도가 아닌데
질문 큰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죽는 쪽도 사는 쪽도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한 방향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주인공한테 관하는 게 아니라, 그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道)라고 저는 이해를 하고 있는데요, 한쪽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관하는 것은 그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인지,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함인데 그것을 중용의 도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답변 모든 일체 만법이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 났으니까 당신으로 인해 들고 나죠? 그래서 중심에서 모든 일들을 하시니까 그 중심에다, 당신 뿌리에다가…. 뿌리가 있어야만이 모든 가지, 이파리 또는 그 나무가 스스로 열매도 잘 맺고 그렇게 할 수가 있죠? 뿌리 없는 나무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뿌리에다 놓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모든 것이 뿌리에서 나옴으로써 싹도 있지 뿌리가 없는데 싹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댁도 주인공 그 자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있는 겁니다. 몸이 있으니까 움죽거리고 있고. 그러니까 그 중심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대로 자기 생각 돌아가는 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치우치지도 않고, 이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저리로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망상이 나온다 하더라도 망상이 아니요, 모든 게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다 되놓고 활발하게 인연에 따라서 활용해라 이겁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보십시오. 저렇게 말없이 설하고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부처 아닌 게 없어요. 꽃은 꽃대로 가지각색으로 남을 위로해 주고, 또 극복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고, 마음이 화사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 줘요. 나무들은 또 시원하게 응달을 지어 주기도 하고, 보는 데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고, 또 추운 데 그냥 뜨듯하게 해 주기도 하고요. 또 나무는 우리가 밑을 닦고 뭐, 매사에 쓰는 종이를 전부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게 보시를 하는 겁니까? 자기 몸뚱이를 다 그냥 보시하는 거예요, 다 그냥. 일체 만물이 다 그렇게 보시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시를 하고 가는 겁니까? 그래서 첫째 육바라밀의 무주상 보시, 핵심으로서의 무주상 보시를 해라 이랬습니다.

내가 그전에도 얘기를 했죠. 그 뜨물 한 그릇 얻어먹고 나뭇짐을 해다 주려고 그랬는데, 은사가 그냥 한번 때려 제껴서는 쓰러뜨려 놓고 “이놈아! 나무 한 짐으로써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행하고 난 뒤에는 ‘아차, 무주상 보시가 이렇게 광대무변한 걸 몰랐구나. 그 핵심적인 여기에서의 한생각이면 무주상 보시의 행을 할 거를 내가 이 나뭇짐을 하느라고 이렇게 끄달렸구나.’ 하곤 그냥 무르팍을 탁 치고, 무르팍 깨진 거를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고마워.’ 했다는 얘기 말이에요. 이렇게 자비하고 평등하고 묘하고 이런 법을, 우리가 이렇게 모두 재료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대서야 어떻게 앞으로 실천해 나가며 어떻게 이 혼란한 세상을 헤쳐 나가렵니까. 포교 좀 하고, 다니면서 설법하고, 다니면서 뭐 하나 집어 주고 이러는 게 무주상 보시가 아닙니다. 그거는 새 발의 피예요. 우리가 쌀 수억 가마니를 갖다가 고아원에 줬다고 해도 그건 새 발의 피예요. 물론 물질로도, 물질 아닌 무주상 보시로도 함께 겸용을 해야 이것이 중용이 되죠. 그러나 ‘이거는 아니고 이거는 맞다’ 이런다면 벌써 그 중용은 그냥 해체가 돼 버리고, 진짜 핵심적인 중용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것도 이름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질문 큰스님 법문을 듣고 있노라면 금방 제가 부처가 될 것만 같고 하늘을 날 것 같고 그런데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에 자책이 많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받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불자로서 부처님께 누가 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답변 부처가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이 세상에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답답한 마음이 또 생길 테니까. 네? 그러니까 그대로, 못났든 잘났든 그대로 그냥 수순히 걸어가세요. 그냥 딱 세우곤 입 딱 다물고 그냥 걸어가다가 딱 닥칠 때 ‘네가 하는 거지.’ 하고…. ‘너!’ 하고선 말 안 해도 ‘너!’ 할 때 그건 그냥 그대로 깜짝할 사이예요. 그러니 재생이 돼서 체가 나올 때는 거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있겠지만 그건 자동적으로 불이 확 붙어서 끓는 쇠가 돼 가지고 직접 바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한 마음으로 이 도리를 어떻게 공부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살기 위한 욕심으로,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잘 살아야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것 때문에 이 공부 하지 마세요, 진짜! 진짜! ‘안 돼! 이거는 어떠한 억겁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하란 말입니다. ‘안 돼!’ 하면 그냥 안 되는 거지. 이게 이렇기 때문에 왁 소리를 지르고 그랬어요. 그러곤 그냥, 손을 번쩍 쳐들어서 그냥 쳤단 말입니다. 이게 진짜 깊은 물이 되기 때문에 큰 배가 뜰 수 있고, 큰 배가 뜰 수 있기 때문에 거기 중생들을 다 태울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주인공에 맡겨서 모두 하게끔 하라 이겁니다,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도. 만약에 소를 잡지 않으면 안 돼서 소를 한 마리 잡는다 하더라도 주인공에 맡기고 잡았을 때는 살생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소의 살은 모든 사람들에게 약이 되고, 또 소의 근본은 바로 무명을 쳐서 나한테 집어넣었으니 사람이 된 겁니다, 금방. 금방 내가 된 거예요. 그래서 한번 굴려서 재생이 돼서 사람으로 인도환생을 한다면 그거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 수레에 한번 굴려서 내놓으면 그렇게 공덕이 된다 이 소립니다. 하여튼 어렵고 가난하고 무질서하게 살지 말고 모든 것에 중심을 두고 산다면 어떠한 괴로움의 상처도 가실 수 있고 어떠한 괴로움의 구덩이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식물이나 바위도 윤회를 하는지요
질문 불교의 윤회설에 의하면 중생들은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는데, 물론 성불하게 되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천상, 인간, 지옥, 아수라, 축생, 아귀라는 육도를 윤회하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는 식물이나 바위 등 무정물의 경우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답변 돌이 서 있는데 비에 씻기고 바람에 스쳐서 그냥 반드르하게 한쪽이 달아나갔어요. 그런 걸 볼 때 그것이 바꿔지지 않은 거라고 할 겁니까? 육도 윤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 노릇 할 때가 있으면 자식 노릇 할 때가 있고, 그런 게 윤회예요. 남편 노릇 하다가 자식에게는 아버지 노릇을 할 때가 바로 윤회라니까요. 윤회가 별다른 게 아니에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윤회예요. 그러니까 윤회도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기로 태어나서 젊어지고 늙어지고 하는 것도 바로 윤회죠. 또 우리가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도망가고 또 딴 말을 해야 하니까 그것도 윤회고요. 그래서 마음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바꿔지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윤회도 없다, 붙을 데가 없다 이랬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암흑이었다고 봅니다. 암흑세계에서 우리가 생명이 생기게 된 원인이 불·물·바람·흙, 즉 흙이라면 먼지를 말하죠. 그것이 한데 합쳐서 하나가 붙으면 하나가 커지고, 둘이 붙으면 둘이 커지고, 그저 굴러가는 대로 서로 엉기고 붙어서 인연이 있어서 불의 인연, 물의 인연, 바람의 인연, 흙의 인연이 한데 합쳐지니까 원인이 되어서 생명이 생기게 된 거죠. 생명이 생기니깐 바로 광력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생명이 생기고 밝아진 것입니다. 이 도리를 생각한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밝아져서 그 하나하나가 별성이 생기고, 별성이 생김으로써 태양이 생기고, 태양이 생김으로써 만물을 기르는 어버이가 된 거죠.

이 산하대지는 만물을 길러 내는 어머니와 같고, 태양열로 인해서 모든 만물이 자라나는 것은 아버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물속에서 사는 고기들도 천차만별로 모습과 이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름도 있고 알지 못하는 고기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밑에서 사는 것도 있으니 그 태양열이 어떻게 거기를 한데 합쳐서 다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입니다. 마음은 태양열이 들어가지 못하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마음의 문이라는 것은 깊이가 깊든 얕든, 높든 낮든 불문에 부치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정물이라는 것도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의 근본, 지수화풍의 근본도 다 그 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떤 걸 ‘없다’라고 하고 어떤 걸 ‘아니다’라고 규정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근본을 먼저 발견하고 싶은데… 
질문 저희가 계속 관을 하고 자기 업장을 소멸하고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자기 근본이 드러나서 자기를 발견하겠지만요, 그 전에 저는 부족한 점도 많습니다만 우선 자기 근본을 먼저 발견을 하고 나서 업장을 소멸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변 그렇게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가 붙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내가 걸어올 때 생각했던 거는 그게 아닙니다. 빨리 이거를 해결을 해야겠다도 아니고, 이거를 안 해야겠다 이런 것도 아니고 단지 믿고, 믿고 그냥 거기에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가 살게끔 하는 거, 내 마음은 거기에 둘 아니게 탁 믿어 버리고…. 그러니까 말로 할 수 없는 거지만 움죽거리게 하는 것이 그놈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없다면 지금 모두 송장들일 거예요. 허허허…. 그러니 송장을 움죽거리게 만들어 가지고 자기가 다니는 거니까 뭐, 잘돼라 못돼라 할 것도 없고, 잘돼야 한다 못돼야 한다 이럴 것도 없는 거죠. 자기가 그대로 사는 거니까. 그리고 믿는다, 믿어라 이렇게 할 것도 없는데 그런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급하시면 그냥 무조건 믿고 닥치는 대로 그냥 거기 놓으세요. 감사하게 놓고, ‘되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놓고, 모든 걸 그렇게 놓고 가세요. 마음이 급하고 급하지 않고 이걸 떠나서 그냥 닥치는 대로요. 거기에 진짜 묘미가 있는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서둘지 마시고요.

사람이 서둘다 보면 좀, 뭐라고 할까요? 좀 방황이 되죠. 그러니깐 방황하지 마시고 어떤 거든지, 우리가 똥을 누든지 잠을 자든지 뭐, 밥을 먹든지 누구하고 만나든지, 우리가 보든지 듣든지 생각을 안 하든지 하든지, 하여간에 일거수일투족이 다 거기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거기서 안 하고 하고가 없으니까 그저 여러분은 생각을 한생각 잘해서 굴려라 이거죠. 한생각을 잘해서 굴리면 잘 생각한 대로 그대로다. 그대로 법이다 이러는 거죠.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데 ‘어떡하면 마음공부를 빨리 할 수 있을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죠.

진짜로 내 껍데기를 이렇게 추려서 달아 보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나 속 내부를 전체 달아 본다면 근수가 많이 나가겠죠.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일반이에요. 우리가 보이는 껍데기를 가지고만 말한다면 그,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부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죠. 그러나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 모습이 수레바퀴라고 생각한다면, 수레바퀴 아니라도 모두가 수레바퀴처럼 돼 있다면 항상 그냥 더하고 덜함도 없이 짧게 구르든 길게 구르든 하여튼 쉬지 않고 굴러가는 것만은 사실이죠.

근데 그 굴러가는데 말입니다, 그 수레바퀴는 굴러가는데 이 차이가 없이 모습은 자꾸 변하기는 변하되 금세금세 화해서 돌아가는 거,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거 그거를 진짜로 믿는다면, 그대로 자기가 공한 도리를 알고 공한 도리를 알면, ‘애탄지탄할 게 없이 함이 없이 24시간 굴렀구나. 함이 없이 굴렀구나. 함이 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죽거렸구나. 함이 없이 식구들하고 싸웠구나. 함이 없이 웃었구나. 함이 없이 성냈구나.’ 이런 게 모두가 그냥 이렇게 함이 없다는 것만 알면은 죄가 붙을 일도 없고 유전성이 생길 일도 없고 영계성이 생길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업보성이 거기 붙을 일도 없고. 이거 괜한 소리가 아니에요.

사람이 어떤 짓을 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하다 편안하다 하면 편안하다는 데 다 거기 흡수돼서 돌아가죠. 가정살이가 다 흡수돼서 돌아가요. 그냥 거저 편안한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오시면은 얼굴에 기미가 꼬이고 이렇게 얼굴에 벌써 그냥 아주 애탄지탄하고 사시는 게 완연히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그 기미 좀 벗기고 살라고 그러면 어느 때 기미가 다 벗겨져서 와요. 그것이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아주 나같이, 못난 나같이 그렇게 편안하게 사시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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