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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 난 붓다를 찾아가고 있다불교 철학 Essay- 붓다 찾는 천로역정
방영준(성신여대 명예교수)  |  hyunbulnews@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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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6  10: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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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길목인 양관 유적으로 노을이 지고, 낙타 무리가 이를 지난다. 그 옛날 구법승들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는 천축으로의 여정을 떠났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이 글은 붓다와 불교에 대한 자전적 글쓰기다. 그런데 웬 천로역정(天路歷程)인가? 천로역정은 영국의 존 버니언(John Bunyan)의 소설로, 하나님의 구원을 찾아 가는 내용인데 기독교인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라고 한다. 붓다를 찾아가면서 왜 천로역정을 차용하는가? 글쎄다. 직관적으로 차용해 보았는데 이 글을 마무리할 때쯤 되면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나오리라 생각해 볼 뿐이다.

필자는 불교와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그 인연을 매우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긍지와 감사의 마음을 항상 지녀왔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친께서 주신 관세음보살사진을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사진이 낡으면 재인화해서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 서부 전선 최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도 항상 관음보살을 염송하였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었던 것도 관음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는 벽암록의 내용을 팔고 다니면서 주변으로부터 도사니 선사니 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이러한 타이틀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10여 년 전 불교평론과 인연이 되어 열린 논단에 참여하면서 혼돈이 시작되었다. 불교 이론의 논쟁점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붓다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여겨왔던 경을 두고 불설·비불설의 논쟁을 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경전 속에 있는 서로 다른 내용의 다툼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내가 평소 염송하는 관세음보살님도 대승불교에서 제조된 것이라 하니 이 천진한 불자의 당황스러움은 적지 않았다.

나의 붓다 사랑과 불교 신앙에 재건축을 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살고 있는 움막 같은 집은 엉성하여 밤하늘의 별은 볼 수 있지만 비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관음보살을 재창조하여 나와 일체화 시키겠다는 염원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육십이 넘어 정년을 바라보면서 불교에 관한 책을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인연이 있어서 그런지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궁금증이 더해가고 재미도 적잖게 있어 불교 서적을 즐겁게 배회하였다. 동시에 불교 공부는 나의 전공에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켜 주기도 하였다. 대학원 시절 광덕 스님께서 불교 공부하면 전공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불교 책을 배회하면서 동시에 많은 혼란도 느꼈다. 어떤 때는 혼란을 넘어 뒤죽박죽이 되었다. 저자의 입장과 위치에 따라 붓다와 불교를 이해하는 시각이 다름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배회의 와중에서 나름대로 불교 이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붓다 다르마의 위대성을 재삼 확인하는 기쁨도 많았다.

또한, 이론적 논쟁이 많은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복합체계이론의 틀로 접근하는 논리를 만들어 나가세나나선비구경의 내용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오만도 피워 보았다. 그러나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붓다의 지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늪에 빠져 문자 불교, 지식 불교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립문자를 내세우고 형이상학적 사색과 이론을 비판하는 선불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다양한 불교 이론을 접하면서 동시에 나의 신앙 체계에 혼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론은 머리의 일이지만 믿음은 가슴의 일이라 더 큰 파장으로 다가왔다. 불교를 만나는 인연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믿음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고 이해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불교를 만난 것은 운명 비슷한 믿음으로 출발하였다. 불교는 와서 보고이해가 전제된 믿음이기에 이론의 혼란은 믿음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믿음은 자전거 타기와 유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이 쓰러지고 만다.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혼란을 느끼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혼돈이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n)의 출발점이라고 하던가. 이 혼란과 뒤죽박죽을 극복하기 위해 붓다를 찾아 가는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혼돈의 양상과 그 원인은 무엇이며, 내가 갈 길은 어디인지 찾아보는 것이다. 그 길은 누구를 위한 안내 지도가 아니라 나 혼자 걷고자 하는 길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큰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고 본다
역사상 오늘처럼 교리와 수행론에
큰 파고가 있는 것은 처음 아닐까
그 변곡점에서 붓다를 찾는 여정의
지도 만들기를 해 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는가
여정을 떠나는 이 땅에서 나는 어떤 생각으로 틀지어진 것인지 진단해 보아야겠다. 이것은 바로 내가 인연을 맺고 나의 믿음 체계를 제공해 준 한국불교는 과연 어떤 불교인가를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붓다의 연기론으로 한국불교를 진단하고 나의 항로를 그려보는 작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일종의 가공 수입품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직수입된 불교가 아니라 중국의 중계상을 통해 중국에서 가공된 수입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신도들은 한국불교가 중국에서 가공된 수입품이라는 것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가공 수입된 붓다 다르마는 한국불교 역사 속에서 긴 내면화 과정을 겪었다. 한국에서는 붓다나 그 직계 제자보다 오히려 혜능을 비롯한 중국 선사들의 선어록이나 에피소드가 더 많이 인용되고 있다. 종정, 조실 등 큰스님들의 신년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의 유시문에는 중국 선사들의 어록이 많이 회자되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으로 불교 성지 탐방을 하는 관광 상품도 많다. 그만큼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에 중독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필자는 얼마 전부터 상윳다니까야를 보고 있는데 한문이 없는 경전을 보는 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한문이 없는 경전은 왠지 가볍게 느껴지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붓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니까야를 읽으면서.

그러면 중국은 불교를 어떤 틀로 받아들였는가. 중국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어지러워 보인다. 초기 부파 불교의 내용과 대승불교의 내용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혼란스럽게 수입되었다. 또한 중국인의 사유 양식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도 꽤 있었으리라. 또한 통치자들이 불교를 그들의 통치 이념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계산도 있었다. 이에 중국인의 사유 틀에 불교 사상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탐색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격의불교(格義佛敎)이다. 격의불교는 무아와 공()사상 등 불교의 사유 양식을 노·장자 사상 등 중국 전통사상과 서로 견주어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격의불교는 불교가 중국에 정착되는 방편이었고 동시에 중국인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와 함께 도교적 요소가 불교 사상에 융해되었다.

그 후 불교경전이 대대적으로 한역되면서 격의불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불교 자체를 새롭게 연구하는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었다. 또한 불교 경전의 번역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생겼다. 중국에 들어왔을 때 이미 역사적인 변용을 거친 많은 불교문헌을 번역하면서 서로 상이한 교리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상황에서 교상판석의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교판상석은 중국불교를 체계화시키는 나름대로의 기준이지만 지금에서 보면 매우 엉뚱한 시도이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연기적 조건을 바탕으로 붓다 다르마를 만난 것이기에.

이렇게 중국에서 다양하게 가공된 붓다 다르마가 우리에게 흘러들어 왔다. 또한 인도인의 분석적 사유를 직관적 사유로 전환시킨 선불교는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렇게 수입되어 정착된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의 성격이 강했는데 유신교적 다불·다보살 신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다불·다보살 신앙이 민속 신앙과 접목되어 불교가 기복 종교로 추락했다는 비판도 있다.

불교가 조선의 긴 척불의 시대를 거치면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복불교의 뿌리가 내린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 이것은 민속학자나 불교학자의 연구주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종교는 철학, 신화, 주술이 함께 동거한다. 그 동거 형태에 따라 다양한 신앙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의 관음신앙도 이러한 한국불교의 습기(習氣)아래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각인(刻印)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거위가 태어날 때 처음 본 대상을 부모로 알고 일생동안 따라 다닌다고 했던가. 옛 추억으로 졸업한 초등학교를 가보면 운동장이 그 때는 컸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작나 느끼고 돌아오는데 돌아오면 운동장은 다시 커진다.

이러한 중국에서 가공 수입된 한국불교에 큰 진동이 일어났다. 이제 혜초(慧超)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수년간 수행 길로 가던 서역 땅에 하루 만에 가고, 빠리어, 산스크리트 원문 경전이 직수입되어 독해되고 번역되고 있다. 비행기 타고 서역으로 가는 유학승과 유학자도 많아졌다. 이와 함께 하대해 왔던 소위 소승불교에 대한 인식이 변했으며, 오히려 붓다의 뜻에 충실한 근본불교가 아닌가 하는 흐름도 생겼다.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방법인 줄 알았는데 위빠사나, 삿띠 같은 남방불교의 수행법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서구의 불교학자들의 저서도 많이 번역 출판되고 있고, 이 저서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더 효율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 현실이다.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이제 대승불교를 장식한 화려하고 거만한 언사도 줄어들었고
, 한국불교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금 한국불교가 딛고 있는 땅에는 큰 지진이 진동하고 있다. 한국불교 역사상 붓다의 광장에 이렇게 다양한 휘장이 펄럭이는 사례는 없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큰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고 본다. 한국불교 역사상 오늘처럼 교리와 수행론에 큰 파고가 있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에 고기가 제일 많다고 한다. 지금 한국 불교가 그러하다. 원효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나는 그 변곡점에서 붓다를 찾아 가는 여정을 그리는 지도 만들기를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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