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마음챙김법’ ‘올바른 명상 수행법’. 불교적 명상이 현대인들에게 마음치유법으로 각광받으며, 명상법을 설명한 수많은 책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론으로 배우는 명상은 현대인들의 갈증을 좀처럼 해소시키지 못했다. 이에 박태수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은 자신이 몸소 명상을 실천하며 터득한 방법과 소감을 술회하며, ‘직접 체험을 통한 명상 상담사례등을 격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명상, ·타인 동시 변화시켜

박태수 이사장은 1988년부터 2013년까지 제주대 학생생활연구소 상담부장,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에는 제주붓다중앙클럽 총회장, 한국초월영성상담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제주대 명예교수와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으로 있다.

虛心 상태서 란 에고 내려놓고
상대 존재 있는 그대로만나야
가령 상대가 전화 받지 않으면
나를 피하나?’란 생각 피하고
전화 안 받는현실만 볼 것

필자가 상담전문가로 활동한 지 어언 30여년이 됐다. 상담의 대상인 내담자를 만나면서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만날 수 있었다. 내담자를 보면서 상담자인 나를 보았다. 청소년, 중년, 노년기의 다양한 삶에서 겪는 이들의 아픔을 만나면서 이것이 바로 인생이구나하는 깨달음도 일어났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다보니 자연 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며, 누군가의 인생문제를 제대로 돕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상담활동을 하면서 행하고 있는 명상수행은 나라고 하는 개인을 넘어 초개인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의식의 확대로 이어졌다.

명상은 상담과 함께 내 인생의 안내자다. 알다시피 상담은 내담자가 그의 삶의 과정에서 겪는 심리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때, 그 분야의 전문가인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반면에 명상은 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으로써 평화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상담은 개인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하게 하는 것이요, 명상은 개인의 삶을 스스로 바라보고 통찰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상담활동보다 명상활동이 더 많아졌다. 타인을 도와주는 상담활동의 기회가 적어지면서 자신을 위한 명상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자신을 위한 활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만남으로 확대되어 감을 알 수 있었다.

200611일 새벽, 인도 비하르 요가대학에서의 아침명상은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명상상태로 들어가자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면서 문득 내 나이가 벌써 60이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났고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가 살 나이를 가지고 나오지. 그 나이가 60이야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내 나이를 다 살았구나. 앞으로는 남의 나이를 살게 되겠네. 남의 나이로 살면서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도둑의 심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뒤 그럼 이제부터는 남을 위해 살아야겠구나라는 자각이 일어나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정년 이후 나를 위해 명상센터를 짓겠다고 사 놓은 땅을 관계의 확장인 사회에 내 놓기로 하고 사단법인 제주국제명상센터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의 삶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Janet Surrey(1991)는 그의 관계문화 이론에서 명상은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명상은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대화과정에서 명상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을 말하는 동안 그 말을 듣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등 순간순간의 현상에 주의를 기울인다. 명상하는 사람은 이러한 순간의 지각을 상대를 돕는데 사용한다. 이것은 상대의 살아있는 실재, 즉 상대의 말이나 목소리, 감정, 신체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자기’(self-in-connection)에 대한 통찰은 상대의 자기실현을 증진시킨다. 상대가 지나치거나 부끄럽지 않게 하고, 수용과 함께 현재에 존재하기를 돕는다. 이 과정에서 상대는 순간의 진실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는 관계적인 이미지나 자기를 한정시키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자기와 타인에 대한 고정된 관념에 집착했다면 그 관념에서 벗어나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명상은 관계과정에서 나의 성장과 타인의 변화를 도울 수 있다. 개인은 혼자 변하지 않는다. 상대와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순간을 온전히 만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명상은 명상하는 나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상대를 변화시키는 관계의 확대, 즉 세상과의 만남이 일어나게 한다. 명상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그렇다면 명상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나와 세상의 관계가 확대될 수 있는가?

나와 세상이 온전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라는 에고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허심(虛心)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남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매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경험이나 지식, 가치, 종교, 경험 등 현상학적으로 상대를 만난다. 이러한 자신의 삶의 경험들로 상대를 만나다보니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만나지 못한다. 상대의 어려움을 나의 주관적 판단으로 해석하여 조언을 하거나 배려를 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허심의 상태, 즉 에고가 없는 상태로 상대를 만나게 되면 매순간 상대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만날 수 있다. 마치 풋볼 선수가 한 순간도 공을 놓치지 않고 시야에 넣어 두고 있는 것처럼, 권투선수가 상대의 움직임을 매순간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명상가는 상대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놓치지 않고 만날 수 있다. 지금 만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연속적이고, 한 순간의 알아차림이 다음 순간의 알아차림으로 연결되며, 직전의 알아차림의 순간은 다음 순간의 알아차림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마룻바닥의 널빤지 사이에 틈이 없을 때 먼지나 모래가 그 사이로 들어갈 수 없듯이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으니 그 사이로 잡념이 끼어들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생각은 힘든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내가 경험했던 과거로 가거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어떠한 생각을 하든 그 생각은 현재를 방해한다. 예를 들면, 조금 전 만났던 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면 많은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나를 피하려는 것일까? 배터리가 다 되었나? 전화기를 잃어버렸나? 샤워 중인가?’ 어떠한 생각과 판단도 정확하지 않고 생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 가장 정확한 판단은 전화를 받지 않는구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단정할 때 마음은 더 이상 쓸데없는 일에서 멈추게 된다. 세상은 실제대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생각대로 본다. 우리는 실제와는 다르게 보면서 실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충돌이 일어난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각기 다른 사람이 보면서 똑같은 현상을 보았다고 한다. 명상은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 향하면서 걱정과 근심을 멈추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머물게 한다.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 하면서도 마음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걱정을 한다면 지금을 만날 수 없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에는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여기엔 영원한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가 있으므로 현재의 기쁨을 놓친다. 그 원인은 우리가 현재를 만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만날 수 있는 힘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보는 데 있다. ‘있는 그대로본다는 것은 밉다, 곱다, 좋다, 싫다라고 하는 특별한 마음을 짓지 않고 보는 것이다. 마음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힘이 없으니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짓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힘, 주시력을 길러야 한다. 나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는 경험하는 자기와 주시적자기가 있다. 경험하는 자기는 행동할 때 작용하는 자기다. 주시적자기는 경험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다. 주시적자기가 잘 발달된 사람은 행동을 하면서 자기가 뭘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행동하면서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 대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은 주시의식과 체험의식, 즉 주시적자기와 체험적자기로 분리되어 이들 간의 탈동일시가 일어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에 반응한다. 그러나 명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상태를 주시하는 자기주시의 힘이 있어서 주시하는 나주시되는 나로 분리가 일어난다. 주시적자기와 체험적자기가 분리됨으로써 자기경험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탈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탈동일시가 지속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바라보는 주시력이 향상되어 자기라고 하는 에고가 사라지고 개인 안에 있는 큰 자아(Self)가 나타남으로써 세상을 온전히 만나게 된다.

이처럼 명상을 하게 되면 나를 안내하는 주인의식이 확대되어 나라고 하는 개인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되 지금 여기에 대한 알아차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나는 비어있게 되고 세상은 편안하게 다가온다.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2016년 한 해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2017년은 여전히 나를 소중히 여기되 나를 넘어 세상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방향으로 의식을 확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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